인간이란 어쩌면 젓대 한 자루
속이 텅 비고 구멍 뚫린 악기, 그 공으로 바람과 숨결이 지니는 동안 제각각 제 생긴 모양대로 울고 웃고 소리치고 떨다가 그 바람이 다하면 다시 고요하고 잠잠한 공으로 돌아가는 일 무릇 인간과 한 생(生)이 그러할 것이다. 적로는 한 소리를 찾아 평생을 떠돈 사람들, 필멸의 소리로 불멸을 붙잡으려 헤매며 한 생을 지나갔던 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많은 소리들이 만나 마음을 다 하고 때가 되면 헤어져 침묵과 공허 속으로 표표히 흩어지는 그러한 마주침과 헤어짐에 대한 것이며, 모든 숨결이 지나간 뒤 젓대 끝에 방울져 내리는 한 방울의 이슬처럼, 그 순간이 남겨놓은 흔적에 대한 것이다.
시놉시스
1941년 초가을 경성.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늦은 밤 청계천변 어느 돌다리 위에 꺼떡꺼떡 건들건들 중늙은이 두 사람이 서있다. 환갑을 넘긴 노구에 근래 깊어진 기침이 심상찮아 그간의 경성살이를 작파하고 고향 진도로 내려갈 참인 종기와 소목 집안 유일한 풍각쟁이로 팔자 살 이를 하며 누구보다 종기의 소리를 잘 알아주는 동료로 그의 귀향을 만류하며 성화인 계선이 이별주를 한 잔 걸치고 실랑이를 하고 있다. 젓대 연주로 명성이 자자하던 두 사람 앞에 난데없이 이들을 모셔가겠다고 나타난 인력거 하나, 이유도 목적지도 모른 채 인력거에 올라타 도착한 곳에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으나 십수 년 전 불현듯 사라져버린 기생 산월의 모습이 꿈처럼 눈앞에 펼쳐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