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장봉기, 보국안민, 제푹구민, 제세안민/우리역사넷
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
茂長東學輩布告文/원문
人之於世最貴者, 以其倫也. 君臣父子人倫之大者. 君仁臣直, 父慈子孝, 然後乃成家國, 能逮旡疆之福. 今我聖上, 仁孝慈愛, 神明聖睿. 賢良正直之臣, 翼贊佐明, 則堯舜之化, 文景之治, 可指日而希矣. 今之爲臣不思報國, 徒竊祿位, 掩蔽聦明, 阿意苟容, 忠諫之士, 謂之妖言, 正直之人, 謂之非徒. 內無輔國之才, 外多虐民之官, 人民之心, 日益渝變. 入無樂生之業, 出無保軀之策. 虐政日肆, 惡聲相續, 君臣之義, 父子之倫, 上下之分, 逆壞而無遺矣. 管子曰, 四維不張, 國乃滅亡. 方今之勢, 有甚於古者矣. 自公卿以下, 以至方伯守令, 不念國家之危殆, 徒切肥己潤家之計, 銓選之門, 視作生貨之路, 應試之場, 擧作交易之市. 許多貨賂, 不納王庫, 反充私藏, 國有積累之債. 不念圖報, 驕侈淫昵, 無所畏忌. 八路魚肉, 萬民塗炭, 守宰之貪虐, 良有以也, 奈之何民不窮且困也. 民爲國本, 本削則國殘, 不念輔民安民之方策, 外設鄕第, 惟謀獨全之方, 徒竊祿位, 豈其理哉. 吾徒雖草野遺民, 食君土服君衣, 不可坐視國家之危. 而八路同心, 億兆詢議, 今擧義旗, 以輔國安民, 爲死生之誓. 今日之光景, 雖屬驚駭, 切勿恐動, 各安民業. 共祝昇平日月, 咸休聖化, 千萬幸甚.
무장 동학 무리의 포고문(茂長東學輩布告文)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의 인륜은 그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강직하며, 어버이가 인자하고 자식이 효도를 한 이후에야 나라가 성립되고 한없는 복을 누릴 수 있는 법이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셨으며, 신통력 있는 명확함과 성스러운 명석함을 지니셨다. 현명하고 어질며 바르고 강직한 신하가 전하를 보좌하여 밝게 한다면 요순(堯舜)의 덕화와 문경(文景)의1) 통치를 손꼽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신하라는 자들은 나라에 충성을 다할 생각하지 않고 다만 녹봉과 지위를 도둑질하며,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하고 뜻만 맞추면서 충성을 간하는 말을 요사스러운 말이라 하고, 정직한 자를 비도(匪徒)라고 한다. 안으로는 나랏일을 도울[輔國]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가 많아, 백성들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변하였다. 집 안에 들어가서는 즐겁게 살아갈 생업이 없고, 밖에 나와서는 몸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 학정이 날마다 심하여 원성이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 상하의 명분이 뒤집어지거나 무너져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가 바로 서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정승 이하부터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 배를 불리고 자기 집안을 윤택하게 할 생각에만 골몰하고, 관리를 선발하는 통로를 재물이 생기는 길로 생각하여 과거 시험을 보는 장소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터가 되었다. 나라의 많은 재화와 물건들이 나라 창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 호주머니만 채우고 있다. 또한 나라 빚은 쌓여만 가는데 아무도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탕한 짓을 하는 것이 도무지 거리낌이 없다. 전국은 모두 어육(魚肉)이 되고 모든 백성은 도탄에 빠졌는데도 수령들의 탐학이 참으로 그대로이니, 어찌 백성이 곤궁해지지 않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 바, 근본이 쇠약해지면 나라도 쇠약해진다. 나랏일을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할(輔國安民)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시골에 집을 지어 오직 혼자만 온전할 방법만을 찾고 오로지 녹봉과 지위를 도둑질하니, 이것을 어찌 도리라 하겠는가.
우리는 초야에서 사는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있으므로 나라의 위태로움을 좌시할 수 없다. 이에 전국은 한마음으로 수많은 백성과 의논하여 오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어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를 하였다. 오늘의 상황이 비록 놀랄 만한 일이겠지만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라. 함께 태평한 세월이 오기를 기원하며, 모두 임금의 덕화(德化)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노라.
* 출전 : 무장동학배포고문, 취어/국사편찬위원회
* 참고 : 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
동학농민혁명 당시 1894년 1월 10일 고부(古阜) 기포(起包)이후 3월 20일(양력 4/25) 총대장 전봉준 비롯 해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오시영 등을 중심으로 한 동학 농민군 지도부가 전북 무장읍(茂長邑) 동음치에서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에 재기포하면서 발표한 격문(檄文)으로 작성은 전봉준 내지 옹택규, 정백헌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글에서 동학농민군의 弊政改革 의지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로 폐정의 원인과 실태 및 그로 인한 정치,경제,사회상의 면면을 적나라게 나열하고 있다.
무장포고문의 내용은 5월 8일 동학농민군(전봉준)에 초토사 홍계훈에게 전주화약 조건으로 요구(제중생등의소(濟衆生等義所)’의 명의로 홍계훈에게 피도소지(彼徒訴志)를 전달)한 폐정개혁안 27조(부전, 전봉준 사형 판결문,1895,2 정창렬 재구성, 갑오농민전쟁연구,1991)와 맥을 같이 한다. 이로써 농학농민운동은 호남일대로 확산 되었음은 물론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무장포고문을 보건대 척왜양창의 보다는 유교적 인본주의, 지배층의 반봉건 부패와 사회신분질서 비판, 보국안민과 제세안민에 머무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 주) 문경/한의 문제(文帝)와 그의 아들 경제(景帝)를 略稱한 말. 아버지와 아들 모두 어진 군주로 통치를 잘해서 ‘문경지세(文景之世)’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