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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제 의자왕시대
2.백제 의자왕시대
[삼국사기]
의자왕(義慈王)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의자왕은 아좌태자의 아들이다.
웅걸차고 용감하였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무왕이 재위 33년(632)에 태자로 삼았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와는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무왕이 죽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사부랑중(祠部郞中) 정문표(鄭文表)를 보내 왕을 책봉하여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2년(64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왕은 주·군(州郡)을 순행하면서 위무하고 죄수를 살펴서 사형할 죄死罪 이외에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미후성(~~城) 등 40여 성을 함락하였다.
미후성은 충청북도 청주의 미호천변으로 고려된다.
8월에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다.
대야성은 경상남도 합천이다.
성주 품석(品石)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은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서울王都에 전달하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의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남겨 두어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은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3년(643)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은 고구려와 화친(和親)하고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당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당항성은 안산으로 고려된다. 장항구(獐項口) 성이라고도 했었다.
마침내 군대를 발동하여 공격하니 신라 왕 덕만(德曼)선덕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4년(644)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은 사농승(司農承)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두 나라를 타이르니 왕은 표를 받들어 사례하였다. 왕자 융(隆)을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가을 9월에 신라 장군 유신(庾信)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일곱 성을 빼앗았다.
5년(645) 여름 5월에 왕은 당나라 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신라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일곱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는 장군 유신을 보내 쳐들어 왔다.
[김유신전]에는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등 일곱 성을 쳐서 크게 이겼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가혜진(加兮津)을 열었다고 하였다. 이는 고령군의 가혜아성, 성산군 등으로 고려된다.
7년(647) 겨울 10월에 장군 의직(義直)이 보병과 기병步騎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茂山城) 아래로 나아가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성(甘勿城)과 동잠성(桐岑城)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친히 군사를 격려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싸워 크게 깨뜨리니 의직은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무산성(茂山城)은 전라북도 무주군이다. 감물성은 김천시(金川市)로 고려된다. 동잠성은 영동군(永同郡)으로 고려된다.
8년(648) 봄 3월에 의직이 신라의 서쪽 변방의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요거성은 경기도 파주 거유령으로 고려하여 현재 파주 성산 부근으로 고려된다.
여름 4월에 옥문곡(玉門谷)으로 군사를 나아가게 하니 신라 장군 유신이 맞아 두번 싸워 크게 이겼다.
9년(649) 가을 8월에 왕은 좌장(左將) 은상(殷相)을 보내 정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 장군 유신(庾信)· 진춘(陳春)· 천존(天存)· 죽지(竹旨) 등이 이를 맞아 치자, 은상은 이롭지 못하므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치고 다시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11월에 우뢰가 치고 얼음이 얼지 않았다.
한탄강 지역의 전투다.
11년(651)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당나라 고종(高宗)이 조서璽書를 내려 왕을 타일러 말하였다. 『해동(海東)의 삼국이 나라를 세운지 오래며, 경계를 나란히 하나 땅은 실로 들쭉날쭉하다犬牙. 근대 이래로 마침내 의혹과 틈새가 생겨 전쟁이 번갈아 일어나서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고, 마침내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칼과 도마刀俎 위에 올려놓게 하고, 무기를 갖고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 저녁으로 서로 이어졌다.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심히 긍휼히 여기고 민망해 하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 등의 사신이 함께 와서 조공하자 짐은 이러한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을 돈독히 하도록 명령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이 상주하여 아뢰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빨脣齒과 같이 서로 의지하여 마침내 무기를 들고 번갈아 침략하니 큰 성과 중요한 진(鎭)들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되어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아울러 쇠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하소서.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으면 곧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쳐서 빼앗을 것이되 다만 옛 땅을 얻으면 곧 서로 화호를 청할 것입니다.’짐은 그 말이 순리에 맞으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제후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망한 나라를 존속시켰는데 하물며 짐은 만국의 임금으로 어찌 위기에 처한 번국(藩國)을 구휼하지 않으리요.
왕이 겸병한 신라의 성은 모두 마땅히 그 본국에 돌려줄 것이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의 포로들을 또한 왕에게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 환난을 풀고 분규를 해결하고,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전쟁을 그치면 백성은 짐을 내려 어깨를 쉬는 소원息肩之願을 이루게 되고 세 번국들은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다. 이는 저 변경의 부대에서 피를 흘리고 강토에 시체가 쌓이고 농사와 길쌈이 모두 폐(廢)하게 되여 사녀(士女)가 의지할 것이 없게 된 것과 어찌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왕이 만약 나아가고 머무는 것進止을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이미 법민(法敏)이 청한 바대로 왕과 승부를 결정하도록決戰 내맡길 것이고, 또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즉시 거란(契丹)과 여러 번국(蕃國)들로 하여금 요하(遼河)를 건너 깊이 들어가 노략질하게 할 것이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할 것이며, 좋은 계책을 살펴 도모하여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12년(65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3년(653) 봄에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다. 가을 8월에 왕은 왜(倭)와 우호를 통하였다.
15년(655) 봄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였다.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여름 5월에 붉은 색의 말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에 들어가 울면서 법당佛宇을 돌다가 며칠만에 죽었다.
북악 오함사는 황해도 토산군(옛 오사함달)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을 7월에 마천성(馬川城)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마천성은 지리산 동북쪽에 있다.
8월에 왕은 고구려와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와서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신라기]에는 1월에 신라 북쪽의 33성을 탈취하였으므로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16년(656) 봄 3월에 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지고 마음껏 즐기며淫荒耽樂 술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좌평 성충(成忠)<혹은 정충(淨忠)이라고도 하였다.>이 극력 간언하자 왕은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굶어 죽었는데 죽음에 임하여 글을 올려 말하였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강의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이한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서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險隘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연후에야 가할 것입니다.
왕은 살펴보지 않았다.
기벌포는 소부리주에 있고 이는 충청남도 금강 하구로 고려된다. 당시에는 백강이라고 하였다.
17년(657) 봄 정월에 왕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에게 식읍(食邑)을 주었다. 여름 4월에 크게 가물어 농작물이 말라죽었다.
19년(659) 봄 2월에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上佐平)의 책상書案 위에 앉았다.
여름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
왕의 서자 41명은 많은 것이다. 문란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구주백제왕 시절에도 시녀가 6~700명이었다. 그러니 41명의 서자가 일본에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왜국 규슈와 일본에서 들어온 의자왕의 서자들이 왜국 출신으로서 백제 땅에서 인화를 이루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 멸망의 원인은 신라군의 죽음을 무릅쓴 단결과 백제의 상하부조화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백제에는 태자 효(孝)가 있었고 뒤에 태자가 된 융(隆)이 있었다. 이들은 의자왕의 백제 왕후가 낳았을 것이다.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성(獨山城)과 동잠성(桐岑城)의 두 성을 쳤다.
동잠성은 영동(永同)으로 고려된다.
5월에 서울王都 서남쪽의 사비하(泗比河)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장(丈)이었다.
[신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공주(公州) 기군(基郡)의 강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100자나 되었고 [그것을] 먹은 사람은 죽었다.
신라에는 공주나 기군이 없다. 이는 백제의 공주 기군을 의미하는데 바로 현재의 공주다. 또한 현재의 공주가 당시 백제 웅진성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670년에 서북에서 옮겨온 웅진이 현재 공주에 들어간 것이다.
가을 8월에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18자이었다.
생초진은 경상북도 산청군이다.
9월에 궁중의 홰나무槐樹가 울었는데 사람이 곡하는 소리 같았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20년(660) 봄 2월에 서울王都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해 바닷가에서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사비하(泗比河)의 물의 붉기가 핏빛과 같았다.
여름 4월에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서울의 저자 사람들市人이 까닭없이 놀라 달아났는데 마치 붙잡으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하여 넘어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것은 헤아릴 수 없었다.
5월에 바람과 비가 갑자기 불어 닥쳤고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 두 절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 백석사(白石寺)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과 같이 공중에서 동과 서로 나뉘어 서로 싸웠다.
6월에 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승려들 모두가 배의 돛과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야생의 사슴野鹿과 같은 모양의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의 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깐 사이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서울王都의 여러 개들이 길가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고 하다가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귀신 하나가 궁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게 했더니 세 자尺 가량의 깊이에서 한 마리의 거북이 있었다.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는데 『백제는 둥근 달月輪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新月과 같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물으니 무당이 말하였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가득 차면 기울 것입니다.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으면 점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느 사람이 말하였다. “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國家는 왕성하게 되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진다는 뜻일까 합니다.” 왕이 기뻐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백제를 치게 하고, 아울러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隅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그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덕물도(德物島)는 덕적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덕적도가 아니라 개성시 동남쪽 덕물산(德物山)이다.
[신당서/백제기]와 [신당서/소정방전]에는 웅진강구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당서]는 또 당시 의자왕 도읍을 진도성(眞都城)이라고 하였다.
自城山濟海.百濟守熊津口,定方縱擊,虜大敗,王師乘潮帆以進,趨 "真都城" 一舍止.虜悉拒,復破之,斬首萬餘級,拔其城.義慈挾太子隆走北鄙,定方圍之.
웅진강 입구에서 소정방이 크게 이기고 물을 따라 올라가서 진도성(眞都城)의 30리 앞에서 멈추었다. 다시 만여명을 죽이고 성을 함락했다. 의자욍과 태자가 나라의 북쪽 경계로 도주했는데 소정방이 포위했다.
[책부원귀]에는 역시 웅진강구이고 역시 진도(眞都)라고 하였다. 백제대장 녜식(~植)이 의자왕을 이끌고 항복했다고 추가했다.
[삼국사기] 원문에도 진도성이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으로 진도성이 속해있다.근자에 자치통감을 이용하여 진도성을 기도성(其都城)이라고 고쳐적기도 한다.
그러나 문장을 똑바로 보자. 진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북으로 도주하였다. 사비성은 의자왕이 도주한 후에 항복하는 것이며 또한 항복하는 것을 발기성(拔其城)이라고 하지 않는다.즉 의자왕이 싸우다가 도주한 진도성은 소정방에게 함락되었고 부여성은 미처 함락되지 않았는데 이후에 항복하였다.
여기서 백제 수도는 하나가 아니라 동서양성이었다는 기록을 고려해야 한다.
[구당서] 其王所居有東西兩城
[신당서] 王居東西二城
즉 임진강의 진도성이 왕이 거하는 두 성의 하나였다고 고려되는 것이다.
웅진부의 웅진성은 훨씬 북쪽에 있어서 북방성이다.
고마성, 혹은 거발성인 안협군과 진도성 사이에 위치한 삭녕군 앞을 흐르는 임진강이 옛 지도에는 ‘금강(錦江)’으로 표기되어 있다.
삭녕군에는 승령산성이 있고 대사리가 있는데 의자왕이 일본에 백제대사를 지은 것처럼 승령산에도 백제대사를 지었을 수 있다.
661년 7월에 다시 임진강으로 들어온 유인궤는 웅진의 지라성을 함락하고 진현성을 다시 함락하였다.
[신당서] 二年七月,仁願等破之熊津,拔支羅城,夜薄眞峴,比明入之,斬首八百級,新羅餉道乃開。
[신라기]에서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임하여 높고 험하고 요충지에 해당되므로 군사를 더하여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가퀴에 육박하였는데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 800명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었다.
[신라기]나 [신당서]는 진도성(眞都城)의 이름을 진현성(眞峴城)으로 바꾸어 적었다.이 무렵 당나라 군사는 개성 남쪽에 상륙하여서 웅진강에 겨우 다시 들어오기는 했으나 장단군 임강현이나 임진현 부근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지라성과 진도성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파주군은 액봉현이라고도 했는데 "액"은 의자왕의 일본 이름이다. 구주백제왕 때부터 아해(阿輩)라고도 했다. 이는 [수서]에 기록된 왜왕의 이름이면서 일본 서명천황의 능묘 비문에 적힌 이름이다.
파주군이 백제의 아해봉현이었던 것이다.
김포군 통진의 애기봉은 통일신라 때 동자성이었는데 역시 의자왕의 이름 아해봉과 관련된 것이다.
마전천현(麻田淺縣)이 바로 의자왕의 웅진부 부도인 진도(眞都)이다.
다른 말로 니사파홀(泥沙波忽)이고 신라는 임단현(臨湍縣)이라고 했는데 임당현(臨唐縣)이 변한 말이다. 진도의 진(眞)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마"가 되고 우리말로 진이 니(泥)가 된다. 진도성 서쪽에는 사미천이 흐르고 남쪽에는 임진강, 동쪽에는 임진강이 흐른다. 그 서남쪽에는 소정방 이래로 당나라 웅진도독부가 있었는데 지금 미산면이다.
연천군 왕징면의 무등리, 내동리 등이 궁터일 것이다.
징파천(澄波川)이 있는데 진파천(眞波川)으로 고려된다.
고왕산이 있는데 동명왕사를 세웠을 곳이다. 즉 의자왕의 2경 중의 하나다.
진도성의 서쪽인 장단군 안에 옛 현이 많다. 임강현(사야홀, 장항현), 임진현(오아홀), 송림현(약지두치현) 등이다.
진도성은 현재의 왕징면이다. 왕징면의 어원은 고왕산과 징파리이다.
왕징면 북쪽의 강서리 군영장거리(軍營場巨里)는 백제 군영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또한 왕징면 진도성의 임진강 건너편인 군남면 진상리에는 당묘(唐墓)가 있다. 웅진도독 왕문탁의 묘일 수도 있다. 군남면 왕림리는 웅진도독부를 구하기 위해 신라 문무왕이 왔던 웅현성으로 고려된다. 즉 백제 웅현이다.웅현은 연천군의 옛이름인 웅섬산현을 고려하면 연천군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전곡리 부근으로 고려된다.
왕징면 무등리 북쪽에는 고성산(高城山)이라는 것이 있다.
또한 동쪽에는 미산면 우정리(牛井里) 산성이 있다. 우정리에 산성이 있고 옹현(甕峴)이라는 곳이 있다. 이는 문무왕이 깨트린 옹산성에 해당한다.
왕징면 무등리 창골(倉谷)은 삼국 영토분쟁의 각축장이었을 때 이 골짜기 안에 무기를 보관하던 병기창이 있던 곳이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도 창고가 있던 곳에는 와편이 다량 출토되고 있다. 진도성의 병기 창고인 것이다.무등리 서쪽에 성안동[城內洞]이 있다. 무등리산성의 서쪽, 골짜기 안에 마을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도 예전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토기, 와편, 석재들이 지표에서 많이 수습되는 곳이다.
이제까지 백제성의 성제로 보면 우등리에 평지 토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동리 원수골은 예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 곳으로 피난했다고 하는데 백제 의직 같은 장수가 있었을 것이다.
노동리 태봉(胎峰)은 백제 왕자의 태를 묻었을 것이다.
동중리에는 신성(新城)골이 있다.
동중리에 당현(唐峴)이 있었다. 당나라군이 점령했던 곳이 된다.
북삼리에는 둔밭, 둔전현(屯田峴)이 있는데 군대의 둔전(屯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능곡(陵谷)은 가마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예전에 능이 있었다 한다. 시내기자리 아래에 있는 깊은 못인 용못은 왕의 어원이었을 것이다.
강서리에는 고능동(古陵洞)이 있고 큰 고분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강서리에 오방터와 영전리가 있었다. 오방터(五方垈)는 백제 북방 웅진을 의미하는 곳으로 보인다. 영전리(營殿里)는 궁전이 있었을 수 있다.
왕징면 남쪽인 미산면(역시 마전천현이었다.) 백석리에 도독골(都督谷)이 있다. 이는 당나라 웅진도독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산면의 유촌리는 유인궤의 성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독정동도 있는데 이는 웅진도독부 위치로 고려된다.
북쪽에 중군고개(中軍峴)가 있었다. 당나라 중군이 진주한 곳이다.
치라재와 하오리가 있다. 치라재는 두리산의 길이다.
따라서 665년 신라 문무왕이 부여융과 당나라 도독과 맹세한 취리산이 바로 현재의 두리산이 된다. 옛 지리지에는 ‘분석산(分石山, 盆石山)'으로도 기재되어 있다.하오고개(和友峴)라는 이름도 있는데 취리산의 맹세로 붙여진 마을 이름일 수도 있다.
이 미산면 두리산 치라재가 웅진부의 지라성이다.
661년 7월에 다시 임진강으로 들어온 유인궤는 웅진의 지라성을 함락하였다.
[신당서] 二年七月,仁願等破之熊津,拔支羅城,夜薄眞峴,比明入之,斬首八百級,新羅餉道乃開。
[신라기]에서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임하여 높고 험하고 요충지에 해당되므로 군사를 더하여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가퀴에 육박하였는데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 800명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었다.
[신라기]나 [신당서]는 진도성(眞都城)의 이름을 진현성(眞峴城)으로 바꾸어 적었다.이 무렵 당나라 군사는 개성 남쪽에 상륙하여서 웅진강에 겨우 다시 들어오기는 했으나 장단군 임강현이나 임진현 부근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지라성과 진도성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미산면 우정리에 대성동(大城洞)과 소성곡(小城谷)이 있고 옹현이 있는데 바로 옹산성이 있었고 부흥군이 점령하여서 웅진도독부를 고립시킨 곳이 된다.
서쪽 임강현(사야홀) 북쪽에 석각상이 있다. 북한에서 최근에 발견하고서 임꺽정 석각조상이라고 발표한 것인데 의자왕의 석각조상으로 보인다. 관모를 쓰고 부처의 후광을 표시한 도적은 없을 것이다. 이는 백제의 두 번째 수도인 진도성에 새겨진 의자왕의 조상으로 고려된다.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방면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는 것이 좋을지 지키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지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처음 육지에 내려서 군사들의 기운이 안정치 못할 때에 급히 치면 가히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당나라大國의 후원을 믿는 까닭에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인데 만일 당나라 군사가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세 좋게 진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압니다.”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와서 속히 싸우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 예봉(銳鋒)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라 사람은 이전에 여러 번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므로 지금 우리 군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군대의 길을 막아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은 후에 형편을 엿보아 세력을 합하여 싸우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주저하여 어느 말을 따를지 알지 못하였다. 이 때에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되어 있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다. 흥수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대의 기율도 엄하고 분명하며 더구나 신라와 함께 모의하여 앞뒤에서 호응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 대하여 진을 친다면對陣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白江)<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하였다.>과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였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여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막아도 1만 명이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뽑아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은 성을 여러 겹으로 막아重閉 굳게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사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
이 때에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잡혀 갇힌 몸으로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가히 쓸 수가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게 하여 물의 흐름을 따라 배를 나란히 할 수方舟 없게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올라오게 하여 좁은 길을 따라 말을 가지런히 할 수 없게 함과 같지 못합니다 이 때에 군사를 놓아 공격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왕이 그럴 듯이 여겼다. 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장군 계백을 보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번 크게 어울려 싸워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도 꺾이어 드디어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 탄현은 대전 동쪽 보은군의 탄현이다.
이에 군사를 합하여 웅진강(熊津江) 입구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둔치게 하였다.정방(定方)이 왼편 물가로 나와 산으로 올라가서 진을 치자 그들과 더불어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당나라 군사王師를 실은 배들은 조수를 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댔다. 정방이 보병과 기병步騎을 거느리고 곧장 진도성(眞都城)으로 나아가 30리一舍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삼국사기 원본]에도 역시 진도성(眞都城)이다.우리 군사는 모든 병력을 다 모아 이를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중국 기록에 의하면 이때 진도성이 함락되었다.
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자 왕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성충(成忠)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고 말하고는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와 가까운 아신왕성, 옛 고마성까지 도망한 것이다.
소정방이 진도성을 접수하였다. 이때 경기도 적성과 양주가 래소군(來蘇郡)이 된 것이다. 래소군은 소정방이 왔다는 뜻이다.
소정방의 부대는 웅진성을 포위하였다.
한편, [신라기]에 의하면 6월 18일에 신라왕은 남천정이라고 하던 이천에 도달했다. 6월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이는 경기도 이천에서 한강 하류를 타고 병선 100척을 내려보내서 웅진강의 소정방과 합류하게 한 것이다.
이 때는 소정방이 웅진강구에서 이미 전투를 치르고 백제 제2 수도인 진도성을 함락한 후로 고려된다.
소정방은 태자 법민과 7월 10일에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신라 육군을 만나기로 하였다. 20일 뒤에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한것이다.
소정방은 7월 12일에 부여의 소부리주 벌판에서 소부리성을 포위하고 싸웠고 다음날 7월 13일에 사비성이 항복하였다.
정방이 사비성을 포위하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에게 말하였다. “왕과 태자가 성을 나갔는데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면 우리들은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드디어 측근들을 거느리고 밧줄에 매달려 성밖으로 나갔다.
백성들이 모두 그들을 따라 가니 태(泰)가 말릴 수 없었다. 정방이 군사로 하여금 성첩(城堞)에 뛰어 올라가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
태는 형세가 어렵고 급박하여 문을 열고 명령대로 따를 것을 요청하였다.
충청남도의 부여 사비성이 포위 중에 항복한 것이다. 사비성의 항복은 부여융에 의해 주도 되었고, 부여융은 뒤에 당나라 웅진주도독이 되었다.
부여성이 느닷없이 항복하니, 북쪽에서 농성중이던 의자왕도 웅진에서 항복한다.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정방이 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연(演) 및 대신과 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서울京師로 보냈다.
9월 3일에 소정방이 백제왕을 당나라로 압송하여 보냈다.
[신라기]에 의하면 7월 18일에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고, 그후 8월 2일에 소정방과 김춘추가 부여의 사비성에서 만났다.
당나라 고종황제는 8월 21일 庚辰에 백제를 멸망시킨 것을 알았다.
그리고 9월 3일에 소정방은 유인원을 남겨 부여성을 지키게 하였다. 당나라 황제는 왕문탁을 보내어 웅진도독으로 삼아 지키게 하였다.
9월 28일에 왕문탁은 당나라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삼년산성에 이르러 당황제의 조서를 신라왕에게 전달하다가 죽었다.
이때 당나라 소정방의 고구려 공격이 시작된다.
나라는 본래 5부(部)·37군(郡)·200성(城)·76만호(萬戶)가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현을 통할하게 하였고, 그 지역의 우두머리渠長들을 발탁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령하여 서울都城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랑장(左衛郞將) 왕문탁(王文度)을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당나라는 부여 사비성에 유인원과 군사 1만을 두고 고구려 공격을 위해 철수한 것이다. 당황제는 임진강 파주에 웅진도독으로 왕문탁을 새로 보냈다가 병으로 죽자 유인궤를 대신하게 하였다.
정방이 포로를 바치니 고종이 꾸짖고는 용서하였다. 왕이 병으로 죽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상례(喪禮)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묘 옆에 장사하고 아울러 비를 세우게 하였다. 융(隆)에게는 사가경(司稼卿)을 제수하였다. 왕문탁(王文度)이 바다를 건너와서 죽자 유인궤(劉仁軌)로 대신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