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여자들만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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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사랑받은 여인이 있어,
하나의 리라에서
모든 여인들의 울음보다
더 깊은 슬픔이 흘러나와
온 세상을 비탄에 빠뜨렸네
숲과 계곡 ...
들판과 시냇물과 동물들,
온 세상이 다시 나타나 슬퍼하네 ...
그토록 그녀는 사랑 받았네. ㅡ 릴케 ㅡ
릴케의 글에서
모든 여인들이 울고
숲이 울고 계곡이 울고 시냇물이 울고 동물들이 울었던 것은
넘 아름답고 넘 사랑했던 그녀(인간)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연이자, 궁극엔 자연 이상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닮아 너무나 아름답거든요.
그녀(인간)는 죽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 이상으로 설계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지금까지 자연계의 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낳고 계속 죽어왔습니다.
창조 미완이기 때문입니다.
창조 미완이라서 사망이 왕노릇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사망은 견딜수 없는 치욕입니다.
사망은 정복해야 할 원수입니다.
사망을 패대기쳐서 사망시켜야 합니다.
예수께서 사망을 정복하시기 위해
사망을 이기시기 위해, 예수님이 친히 사망을 당하셨습니다.
즉 (세상의) 사망을 (예수님의) 사망으로 이기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이행하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입니다.
사망을 이겨서 생명을 쟁취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만 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공히 해당되는 십자가의 길 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길을 누가 따라갔습니까?
남자들은 한 사람도 따라가지 아니하고 여자들만 따라갔습니다.
그 잘난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수제자 베드로도 두려워서 숨기에 바빴습니다.
몇몇 여자들만 울면서 따라갔습니다.
그 당시 사람의 축에 끼워주지도 않던 못난 여자들만 용감하게 따라갔습니다.
사람의 축에 들지 못하는 힘없는 여자가 누구입니까.
고아와 과부들 입니다. 세리와 창기들 입니다.
거지 나사로들 입니다. 길 잃은 어린양 한 마리들 입니다.
집나간 탕자들 입니다.
그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 하나님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그녀들(인간남여)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 처럼 살기 위해 용감하게 죽고자 했습니다.
죽고자 해서 생명이라고 믿던
부모집(기존의 교단)을 나와 배고픈 고아로 떠돌았던 것입니다.
죽고자 해서 생명이라고 믿던
자기집(기존의 교단)을 포기하고 나사로는 문전걸식 했던 것입니다
죽고자 해서 생명이라고 믿던
남편(기존의 교단) 없이 가난한 과부로 떠돌았던 것입니다.
죽고자 해서 생명이라고 믿던
의로운 인간(기존의 교단)에 속하기를 포기하고 세리와 창기는
하나님 앞에 죽을 죄인이라고 가슴을 쳤던 것입니다.
죽고자 해서 생명이라 믿던
양우리(기존의 교단)를 벗어나 어린양 한 마리들은 그토록
울면서 길을 잃고 헤매었던 것입니다.
죽고자 해서 생명이라고 믿던
아버지집(기존의 교단)을 나와 둘째 아들은 탕자가 되어 고생하다가
회개의 기회를 얻었던 것입니다.
진리의 새 말씀을 향한 회개 말입니다.
진리의 새 말씀을 향한 회개이므로…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는 육체의 죽음으로 보여주셨으나
오늘날은 그 본질인 영적 죽음을 죽어 주시고
진리의 새 말씀으로 다시 사시듯이,
그들이 그렇게 영적으로 오늘의 진리의 새 말씀을 듣고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속에 있는자 (현재 살아있는 사망의 우리몸)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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