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 가더니 - 유대인들이 이렇게 많이 따라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이적을 보지 못할 번 하였다.
[요 11:32]"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 이 말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권능은 믿었으나, 부활시키시는 권능은 믿지 못했던 것이 드러난다.
[요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 어떤 학자들은, "통분히 여긴다"는 말의 헬라 원를 다른 뜻으로 해석하였으니, 곧, "슬퍼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뜻을 취하면, 그가 슬퍼하신 것은, 그 우는 자들을 동정하시는 체휼의 슬픔이었을 것이다.
우리 한역대로 "통분히 여기시고"라고 한다면, 그것은 노하신다는 뜻으로 보아야 된다. 그러면, 그가 누구에게 대하여 노하셧단 말인가? 이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1) 예수님의 신성이 그의 인성에게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곧, 나사로의 주검 앞에서 슬퍼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인성의 약점에 대하여 그의 신성이 노하셧다는 것.
(2) 유대인의 불신앙, 혹은 의식적 울음에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3) 사망의 세력, 혹은 마귀에게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이 해석이 가장 자연스럽다.
[요 11:34]"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이 귀절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애의 정서를 많이 나타내셨다. 나사로의 죽은 사건을 둘러 싸고 왜 그는 슬퍼하셨을까? 그는 이제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것을 내다보시고 계셨는데 왜 슬퍼하셨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곧, (1) 그에게 대한 이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같은 이들도 신앙이 부족하였고, 유대인들은 불신앙의 철면피였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편견을 고집하고 앉아서 예수님을 냉혹히 논단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가슴에 송곳을 꽂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신앙 앞에서 가장 큰 고통을 느끼신다. 그는 불신앙의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적도 있다. (2) 예수님은 진리이시니, 진리 그것을 그대로 느끼심. 죽음이 비애라는 것은 천정의 진리이다. 그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죽음이 슬픈 것은 사실이다.
[요 11: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6]"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 11:37]"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요 11:38]"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요 11:39]"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에 있어서, 거기 모인 사람들더러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라고 하신다. 그것은, (1)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일에도, 인간이 할 일은 인간이 해야 된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가르치고, (2)거기 모여 있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이적 역사에 수종들므로, 그들은 그 이적의 놀라운 사실을 좀 더 인상 깊이, 또는 밀접하게 체험하게 되어 확신에 이르게 된다.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이것은 마르다의 불신앙을 표시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을, 인간의 냄새 맡는 표준으로 측량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마르다의 이 말은, 그 이적의 위대를 다시금 뚜렷이 드러나게 했으니, 곧, 냄새 날 정도로 부패한 시체를 부활시키셨다는 사실이, 만대에 전파될 수 밖에 없다.
[요 11:40]"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 예수님께서 여기 관설하신 말씀은, 25-26절 말씀이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의미하신 바는, 마르다의 믿음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조건이란 뜻은 아니다. 다만 마르다가 불신앙하면, 그 나타날 부활의 이적을 영적 눈으로 보지 못하며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적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만 느낄 수 있다. 불신앙하는 유대인들도 나사로의 부활한 사실을 보기는 보았으나, 거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으로만 보며 느낀다.
[요 11:41]"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