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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산 천황봉(萬行山 天皇峰·909.6m)은 남원 지역에서 지리산 다음으로 유명한 산으로, 마치 하늘을 찌를 듯이 삼각추처럼 뾰족하게 솟구쳐 올라 장수 팔공산과 함께 조망이 훌륭해서 새해 일출산행으로 각광받는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 여름이면 시원한 계곡과 녹음, 가을이면 단풍, 겨울이면 상고대가 산객을 유혹한다.
천황봉(임금을 지칭)의 원래 이름은 만행산(만인이 다녀감), 또는 보현봉(보현방에 있음)이다. 용성지나 남원지에는 '천황봉 일명 보현봉은 보현방에 있다. 산봉우리가 구름 위로 나와 있으며, 봉우리 위아래를 통칭해서 만행산이라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산 동쪽에 있는 귀정사 사지(寺誌)에는 만행산과 귀정사의 유래를 이렇게 적고 있다. 만행산 천황봉은 주산, 대성산(大聖山)은 청룡, 승상봉(丞相峰)은 백호의 형상이고, 물줄기는 서쪽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 구십구곡수가 한 곳으로 모여 흘러간다. 원래 천황봉은 만행산, 귀정사는 만행사(萬行寺)라 했으나 삼한시대의 어느 임금이 태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이 사찰에 찾아와 고승의 설법을 들으며 3일간 머무르며 정사를 살피고 돌아가서 귀정사라 했고, 그 임금이 죽고 살기를 고승과 같이 한다(生之殺之我師同之)고 했다고 한다.
또 고려 말, 이성계가 이 고을을 거쳐 고남산 아래 운봉 황산벌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물리치고, 회군길에 귀정사에서 고승의 법문을 듣고 돌아갔다가 임금이 된 뒤에 다시 만행사에서 3일간 정치를 하고 돌아갔다 해서 귀정사라 명명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이 사찰에 임금이 3일간 머물며 산 이름과 지명도 모두 바꾸었다. 법당 뒷산인 만행산은 임금을 상징하는 천황봉, 왼쪽 봉우리는 태자봉, 앞산은 승상봉, 남쪽 고개를 남대문재(南峙), 북쪽 산골을 북대문재(北峙), 병사들이 주둔한 곳을 둔병치(屯兵峙), 사찰 아래 마을은 3일동안 당나라 요순시대와 같다하여 요동(요골)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형도에는 천황봉이라 표기돼 있고, 보절면에서는 만행산으로, 산동면에서는 천황봉이라 부르고 있어 혼선이 온다. 따라서 용성지와 남원지의 기록과 같이 산 전체를 부를 때는 만행산, 주봉(主峰)은 천황봉, 또는 보현봉으로 불러야 옳을 듯하다.
또한 한국지명총람과 지형도에 나와 있는, 상을 준다는 의미의 상사바위(賞賜巖)도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다.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는 상소(上疏)바위, 상서롭다는 의미의 상서(祥瑞)바위,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는 상사(相思)바위 등으로 불리고 있어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정상에서 동으로 지리산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지리연봉과 정령치, 고남산, 백운산, 덕유산이 한눈에 잡힌다. 북쪽은 호남금남정맥의 팔공산, 서로는 보절 방면의 들녘, 남쪽은 남원 교룡산 풍악산 문덕봉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높고 낮은 산들이 춤춘다.
산줄기는 금남호남정맥 팔공산에서 서쪽으로 나뉜 섬진2지맥이 마령치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친 뒤 남으로 뻗어가며 장수의 묘목산을 지나 상서바위와 만행산을 솟구쳐 놓고, 노적봉 풍악산 응봉 문덕봉 삿갓봉 고리봉을 지나 남원 금지면의 섬진강 변에서 여맥을 다한다. 이 지맥은 요천과 오수천의 분수령이 되며, 만행산의 물줄기는 요천과 율천으로 흘러들고, 율천은 오수천에 합수되어 섬진강의 수자원이 된다. 행정구역은 남원시 보절면과 산동면 경계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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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만행산 정상인 천황봉에서 일출을 기다림. 2 천황봉 정상의 회원들. 3 도로에서 본 만행산.
- 용평~천황봉~귀정사 코스
해마다 호남지리탐사회와 전북산사랑회(회장 김정길)는 호남지역의 산들을 순회하며 국가의 안녕과 어려운 이웃에게 기쁨과 희망이 넘치기를 기원하는 해맞이 산행과 시산제를 올리고 있다.
이제 무자년의 어렵고 힘들던 일들을 모두 잊고 새해를 희망과 기쁨으로 맞으라는 듯이 서설이 내려서 온천지가 하얀 은빛이다. 보절면 벌촌 마을 앞 황벌교에서 동쪽으로 달리면 매은 정기삼 기념비가 마중 나오고, 도촌을 지나면 북쪽으로 팔공산이 눈인사하고 잠시 후면 농은 이기석 비가 반겨준다.
느티나무와 추어 마을안내판이 있는 삼거리에 닿으면 왼쪽은 산서로 가는 길로 이곳까지 군내버스가 운행되며 제법 큰 주차장이 있다. 버스에서 내려서 동쪽의 용평교를 지나면 용평지구 농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계곡을 막아 웅장하게 확장해 쌓아놓은 용평저수지 제방이 흉물스럽게 눈앞을 가로막는다. 예전에 용동 마을 앞에 있던 용호정(龍湖亭)과 용동폭포, 그리고 아름다운 계곡과 바위가 어우러졌던 자연경관과 용호약수는 저수지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용호정은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이 젊었을 때 학생들을 인솔하여 소풍을 왔다가 소나기를 만나 쉴 곳이 없어 학생들이 비를 맞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은퇴 후 사재를 털어서 지은 정자였기에 아쉬움을 더해준다.
저수지 옆 길을 따라 왼쪽으로 조금 가면 삼거리다. 동쪽은 천황봉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저수지 위 임도를 따라가면 보현사에 닿는다. 보현사는 고려 충숙왕 원년(1314년)에 창건하고 숙종 18년에 중창하였으나 화재로 전소되어 최근 재건하였다. 그런데 예전의 보현사 주변의 수려했던 자연경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용평저수지가 턱밑까지 확장돼 황량한 모습으로 불자를 맞는다. 보현사 뒤로 우뚝 서있는 상사바위만은 예나 지금이나 웅장하다(용평교에서 20분 거리).
보현사에서 동쪽 임도로 오르면 이정표가 임도를 따라가면 천황봉 지름길이고, 만행산 산행의 백미인 상사바위를 거쳐 천황봉을 가려면 좌측 산길로 가라고 한다. 소나무숲에 들면 계곡물소리와 산새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며 산객을 맞는다. 송림에서 삼림욕을 즐기노라면 동쪽으로 상사바위의 멋진 암봉이 눈을 가득 채운다. 급경사 길을 땀에 젖어 오르면 진주강씨 묘소를 지나 금남호남정맥의 팔공산 방향에서 뻗어온 주능선에 닿는다.
북으로 팔공산, 동으로 백운산과 백두대간 마루금이 눈앞에 펼쳐지고, 남으로 상사바위가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주변 산줄기마다 묘소들이 많다. 힘들게 안부를 올라서면 용동에서 장수군 번암면으로 넘어가는 큰재, 일명 상사바위재에 닿는다. 북쪽은 마령치로 가는 길이고, 만행산은 남쪽으로 오른다. 상사바위를 감상하며 철쭉길을 따라 오르면, 서쪽은 천길 낭떠러지고 눈앞엔 암벽이 멋있다. 평평한 상사바위에 오르면 사방이 막힘없이 조망된다. 남으로 노고단과 반야봉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연봉들도 한눈에 잡힌다(용동교에서 1시간30분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