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이미지
먼저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자.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이지 이미지의 종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성경의 주된 관심이다. 한 사람의 진정한 모습과 그의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는 때가 많고,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르다. 기독교인이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형상, image of God)를 우리의 몸과 정신에 구현하는 것이지, 우리의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인은 불신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 불신자들이 성도들의 선한 행실을 보고 불신자들이 회심하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인 것이다. 80년대 미국 텔레비전 전도자(‘televangelist’)인 짐 베커(Jim Bakker) 부부와 지미 스웨거트(Jimmy Swaggart)의 스캔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미국인이 시험에 빠졌었는가? 성직자의 재산 도피나 교회 세습, 혹은 여성비하 발언 등을 들으면서 얼마나 많은 불신 남편이 기독교를 비난하는가? 결국 불신자가 교회에 나오고 싶도록 만드는 것은 보이는 교회의 보이는 이미지인 것이다. 한국 교회가 수적으로 점차 줄고 있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바로 나쁜 이미지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인이 이미지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가 또 있다. 보여 지는 것의 깊이에 진정한 우리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의 도전을 받아 우리의 내부를 성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가 개발 지향적이고 환경문제에 대하여는 무관심하다는 지적을 받은 후, ‘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 논의가 활발해 진 것이 하나의 예이다.
그러나 외부의 자극으로 우리의 내부를 성찰하는 것이나, 그 반성적 작업 후에 우리의 이미지를 고쳐 나가는 작업이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가치중립적인’(value-free) 입장에서, ‘사실’(facts)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모든 다른 이미지들이 그런 것처럼, 일정 부분 조작된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기독교를 폄하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사고 시스템과, 그로부터 비롯된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기독교의 이미지를 선전한다. 교회가 가진 약점과 이 편향된 시각이 복잡하게 얽혀서 교회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즉 무턱대고 불신사회의 비판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실망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교회는 무조건 옳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교회의 잘못에 대하여 매스컴이 비판을 하면, 근거 없는 패배의식에 빠져서도 안 되고, 동시에 방송국 앞에 가서 데모를 하면서 내부의 결속을 다져도 안 된다. 교회는 자신의 이미지의 정당성을 변증하면서, 동시에 교회 내부의 악을 지적하고 척결해야 한다.
한국교회 이미지의 역사
우리의 이미지를 하나님 편에서 보기 위하여 해야 할 작업의 중요한 부분은 바로 우리의 모습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는 것이다. 교회의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교회에 대한 인상도 그가 겪은 갖가지의 경험이 어우러져 생겨난다. 사회 전체의 교회에 대한 이미지 형성은 훨씬 더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한 사회가 공유하는 교회에 대한 경험의 교집합(交集合)과 그것이 남긴 역사적 궤적(軌跡)과 음영(陰影), 중첩(重疊), 그리고 때때로 벌어지는 반전(反轉) 등을 고찰해야 한다.
이 짧은 글에서는 지난 120년의 한국교회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과연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우리의 역사를 그렇게 나누는 것처럼, 전근대(개항이후부터 1960년대 산업화 이전), 근대(산업화시대부터 1990년 문민정부 이전까지), 후기근대(민주화 이후)로 삼구분하여 각 시대의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어떠하였는지를 개괄할 것이다. 각 시대별로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와 부정적 이미지를 소개하려 한다. 우리 사회가 전근대를 완전히 극복하고 근대로 이행하였거나, 혹은 근대의 과제를 다 끝내고 후기근대사회로 돌입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이미지도 봉건사회, 근대, 근대이후를 정확히 갈라놓을 수는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거 시대의 이미지가 희미한 기억으로 혹은 극복되지 못한 외상(外傷, trauma)으로 남아 있으면서, 새로운 문제에 부딪쳐 허우적거린다.
전근대: 근대화의 선구 vs.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 역사는 선교와 사회변혁을 동시에 이룩한 자랑스런 역사로 기억된다. 당시의 기독교는 한 마디로 말하여 근대의 문물과 더불어 전래된 근대화의 선구자이다. 선교사들은 서양의 발달된 의학과 신교육을 가지고 들어온 서양의 대인[洋大人]이었다. 전통사회의 오랜 구습인 반상제도와 축첩제도, 서얼차별, 남녀차별, 조혼제도 등을 철폐하는 정신적인 동력을 제공하였다. 술과 도박과 음란함과 우상숭배에 온 정신을 빼앗긴 민족을 인도할 거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상상해 보라. 새로운 학문과 도덕으로 무장하고, 반상․남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며, 신식 창가(唱歌)를 부르면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하여 연설하는, 검정교복을 입고 평양시내를 활보하는 신청년의 모습을.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면서, 역사의 우연인지 하나님의 섭리인지, 기독교는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애국적 종교로 자리매김한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라 할 수 있는 반봉건․반외세 운동을 앞장서는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다. 사회주의 운동이 경쟁자로 등장하였지만, 기독교의 세력을 따라올 수 없었다. 일제 말이 되면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친일로 기울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더 많은 수의 기독교인이 음으로 양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땀과 피와 눈물의 기도를 바쳤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기독교는 근대화의 선구자였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관(官)과 민중의 박해의 대상이었다. 결국 어떤 사회이든 변화를 원하지 않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고, 전근대사회일수록 그 사회 가치관의 수혜자이든 피해자이든 변화에 대한 수구적인 태도를 보인다. 특히 기독교는 한국인의 정신과 물질세계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추구하였기에 저항이 더욱 심하였다. 선교사들이 어린아이를 유괴하여 그 살과 피를 먹는다는 소문으로 인한 폭동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전통적 가치인 반상제도나 남존여비를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수구적인 세력에게는 사회전복의 위협이 되었다. 일제의 강제적인 ‘근대화’ 작업이 없었더라면 기독교의 민주적 가치체계의 전파는 아마 더욱 큰 저항에 부딪혔을 것이다. 기독교가 우상숭배를 반대한다 하여 조상 제사를 금지한 것은, 기독교가 ‘척사’(斥邪)운동의 대상이 되도록 하기에 충분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이미지는 존경은 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이단적인 사교에 불과하였다. 마치 지금 “도를 믿으십니까?” 하면서 접근하는 증산도나, 집총과 수혈을 거부하는 왕국회관 사람과 비슷하였다는 말이다. 근대적 가치가 정착된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문화를 선도하던 것처럼 보일 뿐이다. 여기에 과거의 것은 다 좋고 현재는 과거의 타락이라는 식의 낭만주의적 정서까지 가미됨으로 초기 기독교에 대한 과장된 호감이 일반화되었다.
사실은 지금도 기독교를 근대화의 선구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무 종교도 갖지 않고 있다가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왜 불교 대신 기독교를 택하였느냐고 물어보면, 기독교가 현대 젊은이에게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사람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제사 문제 때문에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는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초기 기독교의 이미지는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변천을 겪는다. 역사를 선도해 가는 청년 선구자의 이미지가 오늘날은 보수적이며 심지어 수구적인 할아버지의 이미지가 되었다. 사시사철 짙은 곤색 양복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성경을 품에 안고 여집사 몇 사람과 함께 진한 연기를 내뿜는 회색 봉고차를 타고 심방하는 목사의 모습이 고리타분하다. 넓고 높은 진고동색 강대상에서 끽끽거리는 마이크를 앞에 놓고 높은 톤으로 거창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논하는 설교는, 이제 막 전근대사회에서 빠져나온 탈북자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 뿐이다. 어째서 이런 이미지의 반전이 생겼을까? 역사를 통하여 해답을 찾아보자.
근대: ‘자본주의 정신’ vs. 현실로부터 도피
근대 산업사회에 들어오면서 한국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역할이 상당부분 수정되었다. 기독교는 산업화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의 일정부분을 제공하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들라면 성장에 대한 신념과 이를 이루기 위한 근면성의 강조이다. 우리 어렸을 적에 교실 벽에, 독서실 입구에, 수험생의 질끈 동여맨 머리띠에, 등장하던 수많은 표어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자, 할 수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 중 어떤 것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고, 어떤 것이 속설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예수 잘 믿고, 십일조 잘 하고, 주일성수하면 부자 된다는 것이 대다수 성도의 믿음이었다. 대형교회의 가르침이 그러하였고, 그 교회들의 성공 스토리가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승리주의적 중산층 윤리의 중흥기였는데, 교회는 설교를 통해서 이 윤리를 내면화시켰다. 교회 밖의 사람들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열심히 산다는 것은 다 인정하였다. 박정희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그가 가르친 이데올로기는 다분히 당시 주류 개신교 설교의 내용과 일치하였다.
‘자본주의 정신’은 친미․반공 이데올로기와 맥을 같이 한다. 초기부터 기독교인이 친미적인 성향을 띠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또한 집과 교회를 공산당에게 빼앗기고 월남한 목회자들이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반공 이데올로기 또한 교회의 가르침으로 자연스럽게 정착되었다. 기독교적 유신론과 공산주의의 유물론은 공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자본주의(시장경제)는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기독교도 공산주의에 반대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일치한다는 논리적인 오류(소크라테스는 여자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돼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돼지다?)가 그대로 수용되었다. 어쨌든 산업화시대, 냉전시대의 기독교는 역사의 발전을 위하여 일정부분 순기능적 기여를 한 셈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체성을 ‘자본주의 정신’과 동일시한 가르침의 부작용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장제일주의, 기복신앙, 대교회주의, 개교회주의 등의 용어가 유행한 것이 80년대 이었을 것이고, 바로 이것이 당시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여기에 이데올로기 문제가 결합되었다. 군사독재의 친미․반공 노선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하였기에, 교회가 군사독재를 비판하는 일에 대하여 직무유기를 범하고 말았다. 대부분 보수적 개신교에서는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또 한 가지의 비슷한 논리적 오류가 힘을 얻었다: 현정권은 공산주의를 반대한다, 민주화운동은 현정권을 반대한다, 그러므로 민주화운동은 공산주의이다. (소크라테스는 여자가 아니다, 돼지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그러므로 돼지는 여자다?) 70-80년대 보수적 기독교의 이미지는 현실에 참여하지 않고, 현세적인 복을 구하는 종교라는 이미지를 깊게 각인시켰다. (사실 보수적 기독교가 현실문제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사회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종교가 어떻게 한 순간에 정교분리로 돌아설 수 있었겠는가?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시청 앞 광장 집회를 보면 분명 사회참여 의식이 있다. 다만 참여의 방법이 달랐을 뿐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70-80년대 기독교가 현실 문제를 도외시하는 것처럼 보인 데는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진보주의적 기독교에게 아젠다를 선점(先占) 당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보주의(신학적 자유주의)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다, 전통적 기독교는 진보주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전통적 기독교는 민주화 운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적 오류가 다시 작동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여자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인간이 아니다.)
근대 세계에서의 기독교(종교)의 위치는 처음부터 애매하였다. 기독교가 근대 과학과 시민혁명과 민주화와 모든 철학적 거대담론의 정점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이성(理性)이니 조화니 진보니 하는 계몽주의적 정신과 모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점차로 기독교와 근대정신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고, 20세기 초 미국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fundamentalist/modernist controversy)에서 그 극에 달하였다. 이성(理性)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신학적 자유주의와 전통적 기독교는 이제 함께 갈 수 없게 되었다. 50-6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은 좀더 심각한 양상을 띠고 나타났다. 전통적 기독교는 ‘자유주의적 기독교’(정말 우리나라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가 존재하였는가 하는 것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를 용공(容共) 혹은 친공(親共)으로 모는 맥카시즘이 난무하였다. 결국은 교단분열로 이어지고, 서로가 서로를 극렬하게 비난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전통적 교회는 점차 근본주의화하게 된다. 진보적 기독교가 이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전통적 교회는 아예 반지성주의 노선을 택하였다. 진보적 기독교가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자, 아예 정교분리의 미명 하에 민중운동,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의 사회문제 참여를 거부하였다. 진보적 기독교가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양상을 보이자, 독선적이며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심지어는 분리주의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교회 밖에서는 교회의 발전을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주시하였지만, 그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후기근대: 절대를 주장하는 배타적 종교
21세기의 기독교는 근대에 나타난 기독교의 부정적 이미지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정보화시대를 맞이하여 그러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사회전반에 여과 없이 전달되기 때문에 그 파괴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러면서도 젊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대사회적인 봉사의 자세를 고취시키기도 하고,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통하여 세속 학문과 문화와의 거리를 좁히려 하고, 권위주의를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목회 방향을 모색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운동은 이제 막 도입되었을 뿐 정착되거나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니다.
근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였는데 세상은 저 만큼 앞서 가서, 이제 ‘후기근대사회’(post-modern society)에 돌입하였다고 한다. 근대 한국의 기독교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부여잡고 씨름하던 많은 젊은 학자와 목회자들에게 새로운 적이 나타나서 그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20세기의 근대의 모순의 총화인 분단이 극복되지 않았는데, 생태문제, 여성문제, 동성애문제, 상업주의 등이 앞을 가로 막는다. 그리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근대정신의 쇠퇴와 더불어 기독교의 책임론을 제시한다. 환경파괴의 주범이 자연을 비신성화한 기독교의 책임이며,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정신적 뿌리도 기독교라 한다. 성경에 근거하여 동성애나 낙태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메마른 율법주의자라 하고, 예술적 표현을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검열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기독교의 엄숙주의를 향해 있다.
한 마디로 말하여 기독교의 절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다원성의 세기에 절대를 주장하는 기독교는 독선과 아집을 낳고 결국은 투쟁과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다는 말이다. 일간신문의 종교란을 장식하는 사건을 보라. 종교다원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종교 간에 대화하는 모습, 함께 수행하고, 사회문제에서 협력하는 운동을 크게 다룬다. 그 배후에는 기독교의 종파주의에 대한 강한 반대가 자리 잡고 있다. 90년대 초 유행하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여운계와 강부자의 성격구도가 시사적이다. 자기 잇속만 차리는 깍쟁이, 그러면서도 교회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여운계의 모습이, 종교를 뛰어넘어 폭넓은 가족애를 가진 강부자와 대비된다. 김지하, 김용옥 등 대중적 사상가가 전통적 동양종교에 기초하여 새로운 시대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내어놓은 후 절대종교를 고집하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그 도를 더해 간다. 기독교의 절대성을 비판하는 서적의 출판이 뒤를 잇고, 기독교계 안에서도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차분한 믿음과 치열한 비판
과거를 돌이켜보는 작업은 늘 우리를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과거에 있었던 것이 오늘도 내일도 반복된다는 것에 안도하는 자기합리화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현재 우리 모습의 뿌리를 좀더 객관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느끼는 지적 만족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의 이러한 부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어져 내려왔다는 믿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거 교회의 이미지가 조작된 것일 수도 있고,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담담하고 성실하게 역사가 부여한 과업을 수행한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 대한 믿음직스런 마음도 든다. 교회 밖에서 교회를 보는 이미지에 대하여 과도한 호들갑이나, 부정적 이미지의 원인을 자기를 제외한 ‘한국교회’에 돌리는 잘난 척하는 책임전가, 혹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는 졸속적인 대안 제시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분한 믿음과 합하여 치열한 자기비판이 뒤따라야 한다. 기독교의 이미지 뒤에는 우리의 약점, 우리의 죄악사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부모도 없고 나라도 모르는 종교라는 비판과 박해에 대하여 성경적 신앙에 기초한 진정한 애국, 진정한 효도를 구형(構形)하기 위하여 반세기를 보낸 조상들을 본받아야 한다. 성장제일주의, 물량주의, 기복신앙, 분열, 권위주의, 수구적 이미지 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연구실에서, 삶의 현장에서, 강단에서, 기도굴에서 혼신의 힘을 쏟은 우리 선배와 동료의 노력을 기억한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롭게 다가오는 비판의 목소리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절대주의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더 열린 마음을 가질 수는 없을까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