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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태교육연구소 터 원문보기 글쓴이: 터사랑
우리나라에 적멸보궁이 들어선 것은 자장스님(慈藏:590 ~ 658)에 의해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율사는 선덕여왕 5년( 636)에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한 것으로 전해진다. 스님은 중국 오대산 태화지(太和池)에 있는 문수석상 앞에서 간절한 기도 끝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에 부처님 사리 100과와 부처님께서 입으시던 가사 1벌을 당나라로부터 가져 와 오대산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기도를 계속했다. 오대산에 월정사와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에 흥녕사(지금의 법흥사), 태백산의 갈래사(지금의 정암사) 등이 창건된 것은 이런 인연에 의해서다. 3년후 신라 조정에서 내린 대국통이라는 직위를 받아 황룡사 9층 석탑을 세워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초석을 다졌고 선덕여왕 15년(646)에는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모시고 금강 계단을 세웠다. 임진왜란 중에 통도사의 사리는 왜구들에 의해 도난당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아 왔다. 이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정암사에 나머지는 통도사의 계단을 중수하고 봉안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5대 적멸보궁은 경상남도 양산군 영축산 통도사,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상원사,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강원도 영월군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淨巖寺)로 알려져 있다. 법흥사 적멸보궁은 사자산 연화봉 중턱에 있다. 경내 입구인 원음루에서부터 5백미터 정도 올라가면 있다. 넓고 큰 돌들을 엮어 1단대의 지대를 마련하고 목조건물로 조성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맛배집이다. 적멸보궁 기와의 입막새에는 법(法)자가 씌어져 있고 '소화(昭和) 8년 11월 준공 이라는 글씨가 양각되어 있는데, 이는 1934년에 법흥사의 기와를 굽고 새로 지었다는 뜻이다. 적멸보궁 뒤에는 자장스님이 불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던 곳이라 전해지는 토굴과 사리탑이 있다. 적멸보궁 뒤 축대 위에 석조 사리탑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됐다고 전해지나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토굴의 외부는 뒷편의 낮은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그 흙으로 석실을 엎었는데 남향한 입구 쪽 정면만 높고 뒷편은 경사 때문에 약간 봉긋한 모양의 원형으로 마치 무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토굴 안의 평면은 입구부터 약간씩 넓어지다가 중심부에서 서쪽 한쪽만을 확장하고 원형에 가깝도록 했다. 내부의 높이는 키 작은 사람이 겨우 설 수 있을 정도인 160센티미터 너비는 190센티미터에 불과해 앞쪽에 조그마한 숨구멍만 남겨둔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자장 이후 다른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석관을 안치하여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하고 경첩을 간직하던 곳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토굴 옆에는 자장이 당나라에서 불사리를 모셔올 때 사리를 넣고 사자 등에 싣고 왔다는 석함이 남아있다. 몸체의 개석이 모두 파손되어 있으나 각부의 부서진 조각이 잔존함으로서 완전한 형태를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석함은 한 개의 장방형 돌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징효대사가 쓰던 경함이라는 설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