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南京)대학살 70주년(2007년 12월 13일)을 앞두고 중·일, 미·일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난징대학살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1월까지 일본군이 난징에서 중국인 30만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희생자 중에는 중국군 포로도 일부 포함돼 있으나 대부분 무고한 민간인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중국은 현재 2만5000여평 규모의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내년 12월 7만여평 규모로 확대 개관할 계획이다. 중국 정부는 이를 위해 현재 증축 공사를 벌이고 있으며 기념관 주변에 평화공원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중국 측의 의도는 일제의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것이다. 중국은 이밖에 난징대학살 70주년이 되는 내년에 대대적인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은 당시 일본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학살인원이 수만 명 수준이라고 축소 주장해 중·일 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일본 우익은 한술 더 떠 난징대학살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해 중국인을 격분케 하고 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관계자는 “난징대학살 30만명의 희생자는 전쟁 후 극동군사재판에서 인정한 것”이라며 “당시 시체를 묻은 사람, 생존자, 외국인 증인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사건의 전모가 생생히 드러나고 희생자 수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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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대학살을 소재로 중국과 대만이 같이 만든 영화 '난징 1937' |
중·일 간의 대치 국면에 미국도 가세했다. 난징대학살을 주제로 한 영화를 제작해 내년 12월 개봉할 예정이다. 지난 7월에 크랭크인한 이 영화는 당시 난징에 살던 미국인 선교사의 눈을 통해 일본군이 중국인에게 저지른 만행을 그리게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맡고 그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열연했던 메릴 스트립이 출연한다. 또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서 사제지간으로 등장했던 장쯔이와 양쯔충이 이 영화에서는 모녀지간으로 출연할 계획이다. 이 영화에는 영국 정부도 200만달러를 무상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70년이 다 돼 가는 해묵은 이 사건이 새삼스레 국제적인 핫이슈로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일본군의 만행(蠻行) 자체가 워낙 잔혹했던 데다 가해자인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하기는커녕 사건을 축소·은폐하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인 중국의 국력이 커지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 것도 사건을 재조명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우선 사건의 진상은 어떠했는가?
흔히 전쟁의 참상을 묘사할 때 ‘살인, 방화, 약탈, 강간’이라는 말이 상투어로 붙어다닌다. 난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난징대학살은 불과 한 달 보름 남짓한 짧은 기간에 30만명이라는 인명을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 강간, 고문했다는 점에서 흔히 전쟁 중 있을 수 있는 군인의 민간인에 대한 범죄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사건은 20세기 발생한 어떤 집단학살 사건과도 비교가 안된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일반 군대가 아니라 ‘악마의 군대’였기 때문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파죽지세로 중국 땅을 유린하던 일본군은 11월 난징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12월, 일본 화중군(華中軍)사령관 마쓰이 이시네(松井石根)가 난징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 최고사령부는 비행기로 난징 곳곳에 투항권고서를 뿌렸다. 12월 10일 오전 11시40분, 난징시 중산문(中山門)에 일본군 승용차가 도착, 화중군단 참모장 무토(武藤) 등 4명의 일본 군관이 내렸다. 그들은 중국군 관계자들이 백기를 들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2시 정각이 돼도 중국군 관계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10분이 지나자 무토 부참모장은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가면서 코웃음을 쳤다. “흥! 가소로운 놈들, 자비로운 은혜를 거절하다니. 일찍이 역사에 없는 피의 장강을 보게 해주마!” 사흘 뒤에 벌어질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예고하는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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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들을 생매장하고 있다. |
난징을 지키던 중국군이 투항을 거절하자 드디어 일본군은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13일 오전 0시10분, 일본군 제6사단의 선봉 부대가 난징 19개 성문 중 제일 견고한 중화문(中華門)을 점거하고, 이어 오카모토(岡本)부대가 성 안으로 진격했다. 당시 중국의 수도이던 난징은 이날 이렇게 무너졌다. 12월 13일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가 1808년 나폴레옹에게 함락된 날이며,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동진정책을 펴온 제정 러시아가 1898년 중국의 뤼순(旅順)항을 점령한 날이기도 했다. 이후 난징에서는 20세기 최대의 참극이 벌어진다. 목불인견(目不忍見), 천인공노(天人共怒) 등 그 어떤 말로도 난징에서 벌어진 일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다.
일본은 중·일전쟁 개전 후 가는 곳마다 학살과 강간 등을 자행했지만 특히 난징에서 대학살을 감행한 배경에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의 저항이 갈수록 거세지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본 지도층은 전쟁이 장기화될지 모른다는 초조감을 느꼈고 병사들은 점차 전쟁에 지친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본에 저항하면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모든 중국인에게 알려줄 희생양이 필요했고,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이 그 대상으로 선택됐던 것이다.
일본군은 난징에 진입하기 전에 치밀한 사전학살계획을 세웠다. 마쓰이 화중군사령관은 “난징은 중국의 수도로 난징을 점령한 것은 국제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필히 상세한 계획을 세워 행동에 옮김으로써 일본군의 위상을 높이고 중국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에 따라서 난징 13곳에서 거의 동시에 학살이 저질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