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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i 창가학회
오마이뉴스 기자이자 목사인 백찬홍 선생이 종교의 올바른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 써온 글을 모아 <종교의 안부를 묻는다>라는 책을 냈습니다. 여기에 창가학회 초대회장이 일본 군국주의의 탄압으로 사망했다는 내용도 게재되어 있어서 소개드립니다.
창가학회(SGI)는 일본에 기원을 두고 일상적으로 '남묘호렌게쿄'라는 독특한 주문을 외우는 신자들의 모습이 기이하게 보이기 때문에 일부에서 사이비 일본종교로 비난을 하고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많은 신자가 있고 창립자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국주의의 탄압에 맞서 옥사할 정도로 사상적으로 건실한 종교다.
창립자 마키구치, 일본 군국주의의 탄압으로 옥중에서 사망하기도
창가학회(SGI)의 기원은 13세기 가마쿠라 막부 당시 활약했던 불교 지도자 니치렌(日蓮)선사에서 기원한다. 니치렌은 천태종과 선종에 심취했지만 실망을 느끼고 <법화경>만이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불교가 내생에만 매달리고 현생을 돌보는 데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연호하며 신앙생활을 하면 누구나 자신의 생명 속에 잠재된 불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의 현실적이고 단순한 가르침은 복잡하고 현학적인 귀족들의 불교로부터 버림받은 가난한 백성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니치렌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니치렌 사후 제자들의 갈등으로 종파가 나뉘어졌는데 애제자였던 닛코가 세운 것이 일련정종(日蓮正宗)이 되고 나머지 제자들이 세운 것이 일련종(日蓮宗)이 되었다. 이후 두 종파는 각기 경쟁과 갈등관계를 가지면서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SGI는 일련정종의 맥을 잇고 있다.
오늘날 창가학회(SGI)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1871~1944)에 의해서 시작됐다. 그는 영국의 공리주의와 미국의 실용주의를 자신의 철학에 기반으로 삼았고 진리개념을 별도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바로 지금, 곧 현재의 실천을 통해 유익한 결과(효과)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육자로서 서양철학과 니치렌의 사상을 결합해 자신의 교육이론의 근저가 되는 <인격가치의 창조>의 내용으로 하는 교육철학을 확립했다. 1930년 11월 19일 마키구치는 <창가교육학체계>을 발간했는데 이 책의 내용 중에 <창가교육학회>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을 계기로 창가학회에서는 창립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마카구치는 인간의 최고 목표는 행복이라고 주장했고 그러한 견지에서 니치렌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했다. 그가 결성한 조직은 그의 충실한 제자 도다 조세이(1900~1958)에 의해 계승되었다. 도다는 창가학회를 예술의 기본가치인 미(美)와 도덕의 근본가치인 이타성(利他性)의 원리에 따르면서 회원들의 복리증진에 힘써 신자수를 늘려나갔다.
그러나 창가학회(SGI)는 태평양전쟁이라는 엄혹한 상황에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지침을 거부하면서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침략전쟁 미화와 사상통일을 위해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했으나 마키구치와 도다는 이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1943년 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마키구치는 그의 신념을 꺾기 위한 당국의 고문과 회유, 협박에도 불구하고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옥중에서 사망했다.
창가학회와(SGI)는 달리 당시 불교를 비롯한 일본의 모든 종교단체들은 군국주의에 적극 협조했다. 선종과 정토종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유명 선사인 하라다 다이운같은 승려는 '전쟁터에 몸을 던져 보지 않고 불법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썼다.
삼보교단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전후 서구에 일본불교를 전파하는 데 앞장선 야스타니 하쿤 역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당연히 우리는 죽여야 하며, 가능하면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 우리는 용감하게 싸워야 하고 적군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죽여야만 한다. 그 이유는 자비와 충성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선은 돕고 악은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생을 하는 순간 죽이되 죽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마음에 품고, 우리의 눈물을 삼켜야만 한다." <(전쟁과 테러리즘, 데미언 키론, 허남결 번역, 불교평론 2007년 12월 인용).
이처럼 살벌한 상황에서 창가학회가 신흥종교단체로서 군국주의를 거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이는 히틀러체제에 맞섰던 독일 고백교회의 사례와 비교할 수 있고 마키구치가 옥사한 것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한국의 주기철 목사와 견줄 수 있다.
전후 공명당 창당, SGI창립, 평화운동 등 활동무대를 넒혀
1945년 감옥에서 풀려난 도다는 전후 일본의 비참한 현실에서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실천에 옮기면서 창가학회를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여 1958년 사망할 때까지 회원 수를 약 300만까지 늘렸다.
도다가 사망하자 잠시 혼란을 겪었던 창가학회는 1960년 32세의 젊은 이케다 다이사쿠(1928~ )를 제3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창가학회가 급속하게 성장하자 일본의 우익잡지인 '문예춘추(文藝春秋)'와 자매지 '주간문춘(週刊文春)' 그리고 기타 잡지들이 창가학회를 공격했다. 창가학회 역시 이에 대응했으나 역부족을 느끼고 정당을 창당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다.
1961년 '공명정치연맹'을 만든 후 1964년 공명당(公明黨)을 창당해 1966년 참의원선거 14명, 1967년 중의원선거 25석을 확보해 자민당과 사회당 양당구도 속에서 캐스팅보드를 쥐기도 했다.
1969년 자신들을 비난하는 서적의 출판을 방해한 사건으로 언론의 표적이 되자 창가학회는 정교분리를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공명당과의 관계를 정리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양자 간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창가학회 신자들은 선거 때면 공명당에 대한 지지를 계속하고 있다. 공명당은 1993년 이후 자민당 연립 내각에 참여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명당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평화헌법 개정 등 자민당과 일부 정강이 맞지 않지만 연립정권에 참여하는 것은 창가학회가 일본 군국주의 시절의 박해와 전후 일본 우파잡지와의 극심한 대결 속에서 느낀 피해의식의 산물로 풀이되고 있다.
창가학회(SGI)의 이케다 현 회장은 1975년 해외포교를 위해 SGI(국제창가학회)를 창설했고 국제평화활동에 힘을 쓴 공로로 유엔평화상과 시몬 비젠탈센터의 국제관용상 등을 수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경희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고 한겨레신문 등도 언론문화 창달에 대한 공로로 감사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창가학회가 해외포교에 힘쓰고 국제평화운동으로 눈을 돌린 것은 일본 내의 우파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이비논쟁 등을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 창가학회 신자는 195개국에 약 2천만명(자체집계, 일본은 170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창가학회(SGI)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60년대 초 고국을 방문한 재일동포들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창가학회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탄압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재일동포들의 많은 수가 전후 창가학회에 가입했고 이들 중 일부가 한국에 돌아와 전도활동을 한 것이다. 창가학회는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쉬운 교리, 현세적 복락 강조와 회원간의 강한 결속을 통해 서민층에 급속히 파고들었다.
창가학회(SGI)는 한때 왜색종교 시비 등으로 불법화되기도 했으나, 김대중 정부시절인 2000년 4월 한국SGI는 문화관광부에 정식으로 재단 등록을 마치고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국내 신자는 약 150만명(자체집계, 전문가들 역시 100만이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음)에 이르고 있고 조혜련씨 같은 유명 연예인도 신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창가학회(SGI)는 거의 예외적으로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한 종교(역시 예외적으로 가가와 도요히코 같은 기독교인들도 있었음)로 탄압을 받았고 국내포교도 재일동포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등 독특한 종교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등과 같은 초월과 현실의 이중구조, 구원관을 가진 역사적이고 계시적인 종교보다 좀 더 발전한 형태로 현실적 구원, 신자들의 자율행위, 성직자 배제를 통한 생활종교를 추구하는 등 좀 더 근대적인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 등 일부에서는 여전히 창가학회를 경쟁상대로 인식하고 왜색종교로 간주하고 있지만 일제시대 국내의 거의 모든 종교가 일제의 협박에 굴복해 신사참배를 한 것을 감안하면 무조건 창가학회를 비난할 수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창가학회(SGI)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어떻게 한국인들의 심성에 파고들어 그 많은 신자들을 확보했는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물론 창가학회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이루고 있는 공명당과의 문제, 이케다 회장에 대한 지나친 숭배분위기, 불교를 표방하면서도 니치렌 선사를 붓다 이상으로 높게 받드는 것은 불교입장에서는 정통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달라이라마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기는 티벳불교나 간디와 함께 인도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현대 인도불교를 부활시킨 암베르카르를 인도 불교도들이 붓다처럼 섬기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현대 일본 변화된 현실 속에서 옛 전통의 토대를 보존하는 절충의 묘를 살리면서 성장해온 창가학회는 큰 이변이 없는 한 현재의 추세를 유지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서브프라임사태로 경제위기가 가속화되는 시점에 창가학회가 지향하는 신자간의 상호부조와 복리증진 강령은 서민층에게 호응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한국종교는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