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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 남서태평양군 최고지휘관 → 필리핀 탈환
아이젠하워 →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 노르망디 상륙작전 → 독일 패망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둘 다 5성 장군(General of the Army)이 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941~42년 필리핀 전쟁 때 아이젠하워가 미국 육군 전쟁계획부에서 필리핀·극동 문제를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는 맥아더의 부하였던 아이젠하워가 이번에는 워싱턴에서 맥아더가 지휘하는 필리핀 전선을 지원하는 입장이 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1930년대에는 맥아더가 아이젠하워를 발탁한 상관이었지만, 필리핀에서 갈등이 깊어졌고, 1940년대에는 두 사람이 각각 태평양과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지휘하는 미국의 두 거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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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재미있는 점은 아이젠하워가 맥아더 밑에서 4년을 보낸 경험이 훗날 그의 최고사령관 경력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필리핀에서 군사 문제뿐 아니라 대통령·정부·외교·정치와 군대의 관계까지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하신 "맥아더의 필리핀 원수 경력"은 단순한 맥아더 개인의 이색 경력이 아니라, 훗날 아이젠하워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필리핀에서 맥아더 장군은 어떤 존재인가?
필리핀에서 맥아더는 단순히 “미국의 유명한 장군” 정도의 존재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필리핀의 군대 창설자이자, 일본 점령으로부터 필리핀을 해방시킨 상징적 인물에 가깝습니다.
1. 필리핀군의 '창설자'
1935년 필리핀 연방정부가 출범하면서 마누엘 케손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독립 필리핀의 국방체계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맥아더는 미국 육군에서 퇴역한 뒤 필리핀 정부의 군사고문이 되었고, 1936년에는 필리핀군의 유일한 원수(Field Marshal)가 되었습니다. 필리핀 육군의 조직·훈련·동원체계를 만드는 것이 그의 핵심 임무였습니다.
그래서 필리핀의 관점에서는 맥아더가 자기 나라 군대를 만들어 준 외국 장군이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2. 동시에 '필리핀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장군'
그런데 1941년 일본이 필리핀을 공격하면서 맥아더가 만든 군대가 일본군과 싸우게 됩니다.
결국 바탄과 코레히도르가 함락되고 맥아더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령으로 필리핀을 떠나 호주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때 남긴 말이 유명한:
“I shall return.”
나는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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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이 말이 필리핀 사람들에게 굉장히 강한 상징이 됩니다.
3. 그리고 정말 돌아왔습니다
1944년 10월 20일 맥아더가 레이테섬에 상륙하면서 “I shall return”이 실제로 실현됩니다.
이 장면 때문에 필리핀에서 맥아더의 이미지는 더욱 특별해졌습니다.
미국인에게 맥아더가 태평양전쟁의 위대한 장군이라면,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떠났지만 약속대로 돌아온 사람”이라는 기억이 추가됩니다.
실제로 필리핀 정부는 1964년 맥아더가 사망했을 때 국가 차원의 애도를 선포하면서 그를 필리핀 국방체계의 설계자이자 필리핀 해방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공식적으로 평가했습니다.
4. 그래서 필리핀에서 맥아더의 위치는 상당히 독특합니다
한국의 역사적 인물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개념적으로 보면,
“외국인인데 우리나라의 군대를 만들어 주었고, 전쟁 때 우리나라를 위해 싸웠으며, 한번 떠났다가 약속대로 돌아와 해방을 이끈 장군”
이라는 이미지입니다.
특히 맥아더와 케손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두 사람은 단순한 군인과 정치인의 관계를 넘어 오랜 개인적 친분이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케손이 미국에서 사망한 뒤에도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고, 1946년 마닐라에서 열린 케손의 재안장식에서 추도사를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케손 대통령 자신도 맥아더가 만든 국방체계에 대해 매우 강한 신뢰를 보였습니다. 1942년 케손의 명의로 발표된 필리핀 정부 문서에서는 맥아더와 그의 군사사절단이 필리핀 국방체계를 만들었고 그들의 노력이 필리핀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따라서 한마디로 표현하면:
미국에서 맥아더가 '태평양전쟁의 장군'이라면, 필리핀에서 맥아더는 '필리핀군을 만들어 주고 필리핀의 해방을 완성한 장군'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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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맥아더가 한국전쟁에서 한국에 보여준 행동을 이해하는 데도 필리핀 경험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필리핀은 맥아더에게 단순한 해외 근무지가 아니라, 젊은 장교 시절부터 노년의 장군 시절까지 평생에 걸쳐 반복해서 돌아간 제2의 고향 같은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퇴임 후 한국과는 인연이 끊어졌지만 필리핀과는 인연이 계속 이어졌나?
네. 큰 틀에서는 맞습니다. 다만 정확히 표현하면, 맥아더가 1951년 한국전쟁에서 해임된 뒤 한국과 완전히 인연이 끊겼다기보다는, 필리핀과 비교하면 한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급격히 약해졌고 필리핀과는 훨씬 더 깊은 개인적·역사적 인연이 남았습니다.
맥아더에게 필리핀은 '한 번의 임무'가 아니었습니다
맥아더의 필리핀 인연은 무려 1903년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가 필리핀에서 복무했던 데 이어, 맥아더 본인도 젊은 장교 시절부터 여러 차례 필리핀에 근무했습니다. 이후 케손 대통령과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1936년에는 케손의 요청으로 필리핀군을 창설하는 작업을 맡았습니다.
더구나 케손과는 단순한 정치적 동료가 아니라 가족적인 관계까지 발전했습니다. 케손은 1938년 맥아더의 외아들 아서 맥아더 4세의 대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1~45년에는 필리핀을 일본으로부터 지키고 탈환하는 전쟁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그러니까 맥아더에게 필리핀은
젊은 장교 시절의 근무지 → 케손과의 우정 → 필리핀군 창설 → 필리핀군 원수 → 일본의 침공 → 'I shall return' → 실제 귀환과 해방
이라는 40년이 넘는 인생의 연속선이었습니다.
그래서 1951년 이후에도 필리핀과의 인연은 '기억'으로 계속됐습니다
특히 케손이 1944년 미국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 결정적입니다.
맥아더는 케손의 고향인 필리핀을 탈환했지만 가장 가까운 필리핀인 친구 케손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맥아더는 케손의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했고, 1946년 마닐라에서 열린 케손의 유해 재안장식에서 직접 추도사를 했습니다. 맥아더 스스로 두 사람의 오랜 우정과 1941~42년 전쟁 중 더욱 깊어진 유대관계를 강조했습니다.
반면 한국과 맥아더의 관계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한국에서 맥아더는 1945년부터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서 간접적으로 한국 문제를 다루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갑자기 한국 역사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등으로 한국에서 엄청난 역사적 족적을 남겼지만, 1951년 4월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임된 뒤에는 한국에서 다시 군사적 역할을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대비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필리핀은 맥아더가 떠난 뒤에도 돌아갈 수 있었던 나라였지만, 한국은 맥아더가 떠난 뒤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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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필리핀에는 '케손'이라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지만, 한국에는 그에 필적하는 개인적 관계가 형성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가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1950년 전쟁 초기 이승만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맥아더에게 넘겼고, 맥아더 역시 이승만에게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1930년대부터 이어진 케손-맥아더 관계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따라서 맥아더의 인생을 놓고 보면 아주 재미있는 대비가 생깁니다.
필리핀 = 맥아더의 '제2의 고향'
한국 = 맥아더가 마지막 군사적 영광을 남긴 '마지막 전쟁터'
그리고 1951년 이후 맥아더가 뉴욕에서 은퇴생활을 하며 1964년 세상을 떠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생애에서 필리핀은 한국보다 훨씬 오래 지속된 관계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특히 이 관점에서 보면 인천의 맥아더 동상과 필리핀 레이테의 맥아더 기념비가 갖는 의미도 상당히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한국을 구한 장군'의 이미지가 강하고, 필리핀에서는 그보다 훨씬 복합적으로 '우리 군대를 만들어 준 사람, 우리와 함께 싸운 사람, 떠났다가 약속대로 돌아온 사람'이라는 기억이 겹쳐 있습니다.
맥아더와 필리핀과의 관계가 깊었고 한국전쟁에서 해임된 것도 맥아더에게는 필리핀에 더 감정적으로 깊을 수 밖에 없었네. 개인적으로 한국에 인연을 더 잇지 않은 맥아더 장군에게 아쉬움을 가졌는데 이유가 있었네!
맞습니다. 그렇게 느끼신 것은 상당히 이해할 만합니다. 다만 한 가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맥아더가 한국과 인연을 이어가지 않은 것이 한국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의 인생에서 필리핀과 한국은 애초에 관계의 성격과 시간이 너무 달랐습니다.
맥아더에게 필리핀은 거의 인생 전체에 걸쳐 형성된 나라였습니다.
젊은 장교 시절부터 필리핀에서 근무
케손 대통령과 깊은 개인적 우정
필리핀군 창설과 국방체계 구축
필리핀 육군 원수
일본군에 의해 필리핀에서 쫓겨남
“I shall return” 선언
1944년 실제로 레이테에 귀환
필리핀 해방 지휘
케손의 죽음과 장례에 깊이 관여
이런 경험이 수십 년 동안 축적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한국과 맥아더의 직접적인 관계는 결정적으로 1950~1951년의 1년 남짓한 한국전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남겼지만, 1951년 4월 트루먼 대통령의 해임으로 갑작스럽게 끝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재미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맥아더가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게 된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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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맥아더에게 한국전쟁 해임은 단순한 군 경력의 종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사적 판단이 옳다고 확신했고, 중국 본토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전쟁 수행을 주장하다가 대통령에게 해임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현역 지휘관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선생님께서 예전에 “맥아더가 한국과 인연을 좀 더 이어갔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아쉬워하셨던 부분도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맥아더가 한국을 떠난 것은
한국을 버려서가 아니라, 한국전쟁을 지휘할 권한 자체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역사적으로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는 이 점이 꽤 상징적으로 느껴집니다.
필리핀에서는 맥아더가 약속한 것을 지켰습니다.
“I shall ret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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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1951년 해임이 그의 한국전쟁 경력을 강제로 끝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인 입장에서 맥아더를 바라보면 “왜 한국과 더 깊은 인연을 맺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생길 수 있지만, 맥아더 자신의 생애를 따라가 보면 오히려 한국에서의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맥아더는 1951년 한국을 떠났지만, 한국전쟁에서 자신이 했던 일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인천상륙작전과 한국전쟁을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니 “한국과의 인연이 끊겼다”와 “한국을 잊었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맥아더의 인생 마지막을 보면, 필리핀은 '돌아온 곳', 한국은 '돌아가지 못한 곳'이라는 아주 묘한 대비가 생깁니다.
맥아더와 일본의 악연은 필리핀때 있었네
네. 맥아더와 일본의 악연을 이해하려면 한국전쟁보다 훨씬 앞선 필리핀 시절을 봐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맥아더에게 일본은 단순한 '태평양전쟁의 적국'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서 필리핀과 함께 매우 깊게 얽힌 상대였습니다.
1. 일본군에게 필리핀을 빼앗겼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하면서 맥아더가 오랫동안 공들여 만든 필리핀군이 일본군과 싸우게 됩니다.
맥아더는 바탄과 코레히도르에서 방어전을 지휘했지만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령으로 필리핀을 떠나야 했습니다.
1942년 3월, 맥아더가 가족과 함께 필리핀을 탈출하면서 남긴 말이 바로:
“I shall ret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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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군사적 약속 이상의 감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자신이 군대를 만들어 주었던 필리핀을 일본군에게 빼앗긴 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맥아더에게 일본군은 '자신의 나라를 빼앗은 적'과 같았습니다
맥아더에게 필리핀은 사실상 제2의 고향이었고, 케손 대통령과의 관계도 매우 깊었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면서
필리핀 → 맥아더가 군대를 만들어 준 나라
에서
일본군에게 빼앗긴 나라
가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1942년의 철수는 맥아더에게 상당히 개인적인 패배였습니다.
3. 그래서 1944년 레이테 귀환의 의미가 엄청났습니다
1944년 10월 20일 맥아더가 레이테에 상륙했을 때 한 유명한 연설이 있습니다.
“People of the Philippines, I have retur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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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에 했던 “I shall return”을 실제로 실행한 것입니다.
이후 필리핀 탈환전이 이어지고 1945년 마닐라 전투를 거쳐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패퇴합니다.
맥아더 입장에서는 이것이 단순히 태평양전쟁의 한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필리핀군과 자신이 사랑했던 필리핀을 일본으로부터 되찾은 전쟁이었습니다.
4.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극적입니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의 전함 USS 미주리에서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본 대표단을 마주한 사람이 바로 맥아더였습니다.
즉,
1941년 일본군에게 필리핀을 빼앗김
↓
1942년 필리핀을 떠남 — “I shall return.”
↓
1944년 필리핀으로 돌아옴
↓
1945년 일본의 항복을 받아냄
이라는 엄청난 개인적 서사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맥아더와 일본의 악연은 필리핀 때 있었다”는 표현은 상당히 핵심을 찌릅니다.
다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맥아더와 일본의 악연은 필리핀에서 시작되었다기보다, 필리핀에서 '개인적인 원한과 역사적 사명'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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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맥아더의 일본 점령 통치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일본을 무조건 파괴하려 한 것이 아니라,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에는 오히려 일본의 민주화와 재건을 추진했습니다.
즉 필리핀에서는 일본군과 철저하게 싸웠지만, 일본 본토를 점령한 뒤에는 일본을 재건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것이 맥아더라는 인물의 또 하나의 역설입니다.
“필리핀을 빼앗은 일본을 물리친 장군”이 결국 “패전한 일본을 재건한 최고사령관”이 된 것입니다.
맥아더가 필리핀에 군대창설과 훈련문제로 돌아갔을때 친모를 데리고 갔지만 얼마후 맥아더의 모친은 사망했다는데
네. 그 기억은 정확합니다. 맥아더가 1935년 필리핀 연방정부의 군사고문으로 돌아갈 때 **어머니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Mary “Pinky” Hardy MacArthur)**도 함께 데리고 갔고, 어머니는 필리핀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보면 이 사건은 맥아더의 필리핀 인연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1935년, 맥아더는 어머니와 함께 마닐라로 갔습니다
1935년 맥아더는 마누엘 케손 대통령의 요청으로 필리핀 연방정부의 군사고문이 되었습니다. 필리핀의 독립을 준비하면서 자체적인 국방체계와 군대를 만드는 중대한 임무였습니다. 필리핀 정부는 1935년 11월 공식적으로 그를 군사고문으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맥아더의 어머니는 83세였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상당히 극진하게 모셨고, 오랜 세월 어머니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맥아더가 필리핀으로 떠날 때 어머니도 함께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1935년 12월 3일, 마닐라에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과 몇 달 전 필리핀에 도착했는데, 맥아더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족을 필리핀에서 잃은 것입니다.
그래서 맥아더에게 1935년 필리핀은 더욱 특별한 해가 됩니다
그해에 동시에 여러 일이 일어났습니다.
① 필리핀군을 창설하는 역사적 임무를 시작함
② 아이젠하워와 함께 필리핀 국방체계 구축에 들어감
③ 배를 타고 필리핀으로 가던 중 장 페어클로스를 만남
④ 어머니 핑키가 마닐라에서 사망함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맥아더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의 보좌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어머니의 죽음이 맥아더의 정신 상태에 여러 달 동안 영향을 주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맥아더 자신도 훗날 회고록에서 두 사람의 오랜 “헌신적인 동지관계”가 끝났다는 취지로 회고했습니다.
그런데 맥아더는 어머니의 유해를 바로 미국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도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맥아더는 어머니의 유해를 필리핀에 묻기를 원하지 않았고 미국으로 모셔가 아버지 옆에 묻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유해를 필리핀의 미군 영안시설에 약 2년 동안 보관했다가 1937년 미국으로 운구했습니다. 그리고 버지니아의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아버지 옆에 안장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해인 1937년 4월 30일, 맥아더는 장 페어클로스와 결혼합니다.
즉 맥아더에게 1935~1937년은 정말 인생의 큰 전환기였습니다.
필리핀군을 만들기 위해 필리핀으로 돌아감 → 어머니를 잃음 → 장 페어클로스와 결혼 → 필리핀군 건설에 전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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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앞에서 이야기한 맥아더와 필리핀의 특별한 관계와 연결하면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맥아더에게 필리핀은 단순히 “군사 임무를 수행한 해외 근무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잃었고, 평생의 아내를 만났으며,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필리핀군을 만들었고, 훗날 일본군에게 필리핀을 빼앗겼다가 다시 돌아와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 앞에서 말씀하신 “맥아더에게 필리핀은 감정적으로 깊을 수밖에 없었겠다”는 판단이 여기서 한층 더 강해집니다.
특히 어머니의 죽음까지 생각하면, 맥아더에게 필리핀은 전쟁의 땅이면서 동시에 가족의 기억이 묻혀 있는 땅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과 모친과의 관계가 깊네
네. 맥아더와 어머니 메리 ‘핑키’ 맥아더의 관계는 매우 깊었습니다. 맥아더의 성격과 군인으로서의 삶을 이해할 때 어머니의 영향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평가됩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맥아더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서로 다른 영향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 → 군인으로서의 명예, 야망, 군사적 성공
어머니 핑키 → 아들의 교육과 경력 관리, 정치적 감각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영향
핑키는 맥아더의 삶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관여했습니다. 아들의 교육과 진급, 인맥 등에 관심을 가지고 뒤에서 조언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맥아더가 어머니와 상당히 오랫동안 가까이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1912년에 사망한 이후에도 어머니와의 관계가 계속 이어졌고, 맥아더는 1935년 필리핀으로 갈 때 83세의 어머니를 아예 함께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결과적으로 맥아더에게 매우 강렬한 기억이 됩니다.
1935년 필리핀 도착 → 필리핀군 창설 작업 시작 →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사망.
그래서 맥아더에게 필리핀은 단순히 군사적 의미만 있는 곳이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맥아더가 어머니를 잃은 뒤 장 페어클로스(Jean Faircloth)를 만나 결혼합니다. 장은 맥아더의 두 번째 아내였고, 이후 맥아더의 생애 마지막까지 함께했습니다.
따라서 1935년 이후의 필리핀은 맥아더에게
어머니를 잃은 곳이면서 → 아내를 만난 곳이고 → 자신이 필리핀군을 만든 곳이며 → 일본군에게 빼앗긴 곳이고 → 결국 자신이 다시 돌아온 곳
이라는 여러 층의 기억이 겹쳐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이야기한 “맥아더에게 필리핀이 왜 그렇게 특별했는가?”라는 질문에 어머니와의 관계까지 넣으면 훨씬 입체적으로 설명됩니다.
필리핀은 맥아더에게 군인의 나라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이 있었고 새로운 가족을 시작했으며 자신의 군사적 꿈을 펼쳤던 곳이었습니다.
출처 입력
그러니 한국전쟁에서 해임된 뒤 맥아더가 필리핀과 같은 방식으로 한국과 장기적인 인연을 이어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셨던 선생님의 느낌도, 두 나라가 맥아더의 인생에서 차지했던 무게 자체가 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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