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인물 탐구 - 조려, 성담수, 금성대군, 혜빈양씨
호랑이를 타고 청량포를 건너가 단종의 시신을 거둔 조려
조려(1420-1489)의 본관은 함안, 자는 주옹, 호는 어계이다. 단종 원년(1453)에 벼슬길에 나왔는데 명망이 매우 높았다.
어느 날 그는 제생들을 향하여 읍하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과거 공부를 폐지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의 시에 백이 숙제의 뜻과 돈세무민(세상에 숨어 살아도 아무 불만이 없다는 뜻)의 뜻이 나타난 것은 김시습과 마찬가지이다.
단종이 영월에 안치되었을 때 청량포에는 아무도 출입 못하게 뱃길을 금지하였다. 이때 공은 함안에 살고 있어 영월과는 거리가 5백여 리나 되었지만 한달에 세 번씩 단종에게 가서 안부를 물었다. 잠은 원관란의 집에서 잤는데 밤마다 단종의 만수무강을 하늘에 빌었다.
세조 3년(1457) 1월 10일 단종이 승하하였다는 말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가 밤에 청량포에 닿았지만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때는 벌써 새벽이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다가 의관을 벗어 등에 지고 걸어서 건너려고 물로 들어갔다. 이때 갑자기 뒤에서 무엇이 잡아 당기는 것을 느꼈다. 돌아보니 큰 호랑이였다. 공은 호랑이를 향해서 말하였다.
"천릿길을 달려왔는데 이 강을 건너지 못하는구나. 이 강을 건너야 임금의 시체를 거둘 수가 있는데 불행하게도 이 일을 이루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물에 빠져 물귀신이 되고 싶거늘 어찌하여 너는 나를 잡아당기느냐?"
이 말을 들은 호랑이는 그 앞에 엎드려 올라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조려는 호랑이 등에 업혀 무사히 강을 건넜다. 단종의 빈소에 들어가니 두 사람이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통곡 사배하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뒤에 문 밖을 나오자 그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랑이가 다시 그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너 주었다.
추강 남효온이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호랑이가 청량포를 건너 주어서
조여는 노산의 시신을 염하였네
정조 5년(1781)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절이다.


단종 복위에 실패한 후 평범한 농부로 살았던 성담수
성담수(?-145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이수, 호는 문두이다. 세종 32년(1450)에 문과에 합격, 교리가 되었다. 단종 때 나라일이 매우 위태롭게 되자 사촌 성삼문과 더불어 왕실을 도우면서 죽더라도 마음을 변치 말자고 서로 격려하였다. 성삼문이 죽게 되자 성담수도 무서운 국문을 받았지만 일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김해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나서 공주로 돌아갔는데, 결국 화병으로 죽었다.
성담수는 높은 식견을 가졌으며 아버지의 묘 밑에 숨어서 가난한 살림을 살았지만 마음은 언제나 태평이었다. 한번도 서울에 간 적이 없고 자신이 명문세족임을 나타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농부로 보았다.
그의 조카 성몽정이 경기 감사가 되어 본 고을을 순시할 때 숙부 성담수의 주소를 몰라 수소문 끝에 찾았다. 그의 집을 찾아가니 쓸쓸한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였고, 앉을래야
앉을 만한 변변한 자리조차 없었다. 탄식하고 집에 돌아온 감사 성몽정은 숙부에게 자리를 보냈다. 그러나 성담수는 곧 자리를 돌려보냈다.
"이런 좋은 자리는 우리 같은 가난뱅이 집에는 맞지 않지"
이때 나라에서 죄인의 자제들을 참봉을 시키고 그 거취를 살폈는데 모두 머리를 조아리면서 관의 말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성담수는 끝내 벼슬하지 않고 시를 읊고 낚시로 소일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정조 5년(1781)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숙이다. 언젠가 성담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낚싯대 잡고 온종일 강변에 앉았다가
강물에 발 담그고 곤하게 잠들었네
꿈속에서 갈매기와 만 리를 날다가
깨어나니 몸은 석양에 누워 있네


강물을 피로 물들인 비운의 왕자 금성대군
금성대군(1426-1457) 유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다. 인품이 맑고 아량이 넓으며 말씨에 한 점의 티도 없었다.
을해년에 우의정 한확 등이 아뢰었다.
"금성대군이 모반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한남군, 영풍군, 영양위 정종과 서로 깊이 사귀고 있으니 서둘러서 그 죄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드디어 금성대군은 삭녕으로 귀향 가게 되었다. 세조 2년(1456)에 성삼문 등이 죽고 금성대군은 순흥에 안치되고 그 집은 적몰 당했다.
다음해에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안동 감옥에 갇혔다. 어느 날 금성대군이 옷을 발가벗은 채 도망쳤다. 관청에서 그를 잡으려고 큰 수색을 벌였지만 잡지 못했다. 얼마 후에 금성대군은 자기 발로 들어와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아무리 많아도 나를 잡지 못하지? 그러나 내가 어찌 끝내 도망할 수가 있겠느냐?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신다"
그는 옷을 입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사배하고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이때 이 사건에 많은 사람들이 연좌되어 죽음을 당했으므로 죽계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영조 14년(1738)에 예손 이진수의 하소연을 받아들여 금성대군을 복관하고 시호를 정민이라 하였다.





죽음으로 옥새를 지킨 혜빈 양씨
양씨의 본관은 청주이다. 현감 양경의 딸이고, 찬성사 양지수의 증손녀다. 세종 때 후궁으로 뽑혀 혜빈에 봉해졌고 세 아들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을 낳았다.
세종 23년(1441)에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낳고 9일 만에 죽었다. 세종이 빈 중에서 양씨를 택하여 원손을 기르게 하였다. 양씨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단종을 길렀다. 단종이 덕을 갖추어 잘 성장한 것은 실로 양씨의 공이 컸다.
세종과 문종이 차례로 승하하고 을해년(1455)에 세조가 왕위에 올랐다. 세조가 혜빈에게 옥새를 바치라고 하였다.
"옥새는 나라의 중한 보물입니다. 선왕(세종)께서 세자와 세손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옥새를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혜빈은 목숨을 걸고 옥새를 지키다가 피살되었다. 그 아들 영풍군은 이때 운검으로서 입시중이었는데 동시에 죽음을 당하고 한남군은 함양에 유배되었다가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피살되었다.
정조 15년(1791)에 혜빈에게 민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