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1. 들어가며 2. 충주미륵대원지 3. 충주 미륵리 여래입상 4. 나오며 |
충주미륵대원지의 하늘
1. 들어가며
충주미륵대원지는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입니다. 여기서 하늘재란 계립령, 대원령 등으로 불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을 말합니다. 전략적요충지였던 하늘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많은 충돌을 겪었습니다. 계립령과 죽령을 넘어가면 곧바로 충주로 이어지고 남한강을 이용하면 한강하류까지 나아갈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늘재를 통해서 신라가 북진을 하고, 삼국을 통일하는데 활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하늘재는 삼국시대 문화의 통합현장이었기 때문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불교문화를 비롯한 선진문화를 유입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남한강은 한반조의 젖줄이라 불리는 한강의 본류입니다. 역사상으로 남북과 동서를 연결하는 수로 역활을 담당해오며 남동해안지역과 남한강상류지역 간의 주민이동 및 문화교류가 있었던 곳입니다. 이 지역을 백제 고구려 신라 순으로 차지하는 요충지로 삼국의 문화가 혼재되는 중원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선종사찰을 건립하고 선승을 파견하여 지방관의 역할을 대신하게 하여 지방사회를 통제하고 운영하게끔 하였습니다. 사찰과 국가가 파견한 승려를 통해 지역에 직접적 지배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충주 미륵대원지
2. 충주미륵대원지
충주 미륵대원지는 일탑일금당의 사찰로 우리나라 유일의 북향을 띄고 있습니다. 굴 안에는 석조여래입상이 남아있어 그 가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미륵대원지의 조영은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과거에는 석축위에 목조건물이 있는 반축조 석굴이었으나 현재는 목조건물이 파손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미륵리 오층석탑과 지방 유형문화재 제 19등인 석등이 일렬로 서있어 대찰의 면모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발굴 당시 충청도에서 하늘재로 오르는 입구에서 출토된 명문 기와를 통해 미륵대원지에 대한 몇가지 점을추정할 수 있습니다. 먼저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의 명문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등장하기 때문에 미륵대원지의 창건시기는 일연이 살았던 시대 이전인 것으로 고증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대원사주지라고 쓰여진 기와를 통해 미륵대원지가 대원사로 불렸음을 알수 있고 사찰의 이름에 원을 사용함으로 인해 미륵대원지가 절과 원이 복합되어 있는 사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원은 본래 요충지에 설치된 숙박시설로 여행자나 상인에게 숙박 휴식 식사 등을 제공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원이 절의 관리하에 있는 경우가 다수 존재했으며 이곳 미륵대원지도 그와 같은 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3.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은 미륵대원지의 본존불입니다. 거대한 규모와 장승과 유사하게 표현된 신체와 경직된 얼굴, 부정확한 도상이 특징인데, 이시대의 불상들이 대체로 이러한 모양입니다. 간략한 신체와 그에 대비되는 이목구비가 분명한 얼굴은 전형적인 장승의 특징입니다. 신체는 크기가 제각각인 돌을 원통형으로 적당히 깍아올린 단순한 처리를 통해 제작되었으나 둥근 얼굴과 반원형의 눈썹, 수평적인 눈, 넓찍한 코와 입술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온화한 인상을 줍니다. 석조여새상의 대상은 의견이 분분합니다. 손을 가슴에 모아 약합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 약사여래로 보는 시각과 지명과 사찰의 이름이 모두 미륵이기에 미륵불을 대상으로 하여 입상했다는 시각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수인과 지물이 분명하지 않아 입상의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4. 나오며
미륵사지는 길목의 문화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장승 형식의 본존불을 비롯하며 절의 명칭에도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호족의 영향력이 커지며 호족중심으로 세력이 변화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성이 규모에서 드러납니다. 당시는 힘을 가진 호족이 세력을 장악해서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는 시기로 자신들의 힘을 규모로서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륵대원사지의 규모가 저리도 웅장하고 본존불의 높이와 크기 역시 웅장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호족은 문화적인 면은 부족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의 권력의 힘을 과시하나 민중을 포섭하여야 했다는 면을 불상 등의 조각을 통해 보여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존불의 몸체는 그저 웅장할 뿐 단순하게 표현되었는데 얼굴은 온화한 모습을 띄면서 민중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며 그 웅장함으로 백성들을 지켜줄 것만 같은 느낌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륵대원지의 이름에 원이 들어가는데 고려가 승려를 통해 지방을 중앙 집중시키려고 했던 점에서 미루어 보아 호족을 지원한 선종의 승려들을 국가가 지지하고 그에 합당한 존중을 해줬다고 생각이 들고, 지배층의 온전한 자신의 사람으로 승려를 사용했다고 보여집니다. 고려의 시기는 왕권보다는 신권이 매우 막강했던 시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정부안에서도 왕은 상징성을 가진 인물일 뿐 실질 정치에서는 신권의 영향력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 중요했고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중요했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왕건의 정책으로 호족을 포섭하는 정책으로 국가를 유지하고 이어나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호족의 세력을 약화하였으나 왕국안에는 왕의 사람이 없었기에 광종대에 와서야 과거제를 시행하여 왕의 사람을 하나 둘 뽑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말기 호족을 지지한 선종의 승려들은 왕이 된 하나의 호족을 지지해주고 왕의 명령에 따라줄 신하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가져볼 수 있었습니다. 웅장함으로 권력의 힘을 보여주려 했던 삼국통일시기의 모습이 드러나는 문화재를 볼 수 있어서 감회가 뜻 깊은 답사였습니다.
첫댓글 미륵 대원지가 굉장히 커서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에 대해선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이 글에서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좋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