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편에서 계속> 손 전 대표가 마시는 주병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원래 이 주병은 윤동환 전(前) 강진군수가 선물했습니다. 그는 원래 고봉요에서 만든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고봉요에서 2개의 주병을 가져왔는데 하나는 화학약품이, 하나는 천연재료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선물하려고 보니 어떤 것이 천연재료로 만든 것인지 여러 번 설명을 들었는데도 분간이 되지않았다는군요. 그래서 이용희선생을 찾아가 물었더니, 이 선생께서 “기왕이면 내 작품을 선물하는게 어떻겠느냐”고 해 결국 이 선생 것을 선물한 것이죠.
노(老)대가는 청자의 전자파에 주목하고 있지만 강진에 있는 사십여명의 도공들은 저마다의 특기들이 있습니다.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일례로 이영탄(48)씨 같은 작가는 4남1녀의 장남으로 어릴 적부터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분입니다. 빈농 아버지를 둔 이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했다고 하지요. 서울에 올라와 짜장면 배달부터 안해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어느날 아름다움에 눈을 떴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뜻하지 않게 삶이 바뀐 것입니다. 그는 우연히 윈도우 속에 전시된 나전칠기 같은 공예품 문양을 보게 됐다고 하지요. 그런데 가슴 속에서 강렬한 욕망이 일었습니다. “저걸 나도 만들고 싶다!”
혹시 그의 선대(先代)에 예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 아니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는 “아버지는 제가 열일곱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동생들 먹여살리시기만 했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묘한 것인지 그는 작은 공예품 공장에 들어가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고 얼마 안가 솜씨가 소문나자 마포 신수동 불교미술 제작품 회사로 옮겼습니다. “탱화 조각도 해보고 범종(梵鐘) 조각도 해보고 안해본게 없었습니다. 열네살 때 서울와 스물일곱살 때까지 일했는데 마지막에 받은 월급이 150만원이었어요. 당시로서는 꽤 많은 액수였습니다.” 먹고살게 되자 불현듯 고향 생각이 났다고합니다.
이씨는 수소문 끝에 고향 강진 땅에서 청자 재현사업이 한창이라는 얘길 들었습니다. 청자는 불교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에 그는 “그간 갈고 닦은 불교 조각 솜씨를 청자와 접목시키면 어떨까”하고 생각하다 귀향해 ‘금릉요’를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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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1994년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강진에서 청자를 만드는 곳은 지금 고려청자박물관의 전신인 청자사업소의 몇몇 장인들과 개인 요(窯) 서너군데 뿐이었습니다. 당시 장인들의 목적은 비색을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것에만 골몰하고있었습니다. 그는 생각이 달랐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작가의 이름이 등장한 계기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늦은 저녁 다산초당 아래에서였습니다. 다산학 전파자인 윤동환 전 강진군수께서 사방 벽에 가득찬 수백점의 다구와 술병 가운데 찻잔 하나를 척 뽑아온 것입니다. 윤 전 군수는 “요즘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찻잔이 이겁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호기심에 저는 다음날 아침 이영탄 작가의 금릉요로 달려가 물었지요. “작품 빛깔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입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퍼센트로 말할 수도 없겠지만 전 생각이 달라요. 고려 청자를 재현하는 것도 의미있지만 당시와 흙 성분도, 기술도 다르지않습니까? 유명한 시인의 시가 있어요. 그걸 음미하는게 아니라 똑같이 지으라면 어떨까요? 도자기도 같습니다.”
이영탄 작가는 “저만의 칼라와 색깔과 모티브를 조합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데도 그의 자기는 가을 하늘처럼 새파랗지도, 비색과 비슷한 것 같지만 뭔가 더 청아한 색을 내자 거기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묘하지요? 그는 사발공모전, 강진청자 공모전, 아름다운 우리 자기 공모전 등에서 수없이 큰 상을 탔지만 이영탄은 “상은 그냥 상일 뿐 의미를 두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시골 강진만의 섬과 바다와 산과 사람들의 놀이를 모티브로 삼고 싶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의 작품 중에는 작은 단지에 문인화를 새겼는가하면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에 새긴 ‘정석(丁石)’이라는 글씨를 새긴 접시를 돼지코에 매단 우스꽝스러운 것도 보였습니다. “돼지처럼 살되, 정석(定石)으로 살라는 뜻이지요. 한문으론 다르지만.”
그런가하면 밑을 연꽃으로 감싼듯한 사발의 주특기지만 청자의 3대 미라는 형태-색-문양에서 문양을 과감하게 빼버린 민짜 자기는 수수함을 자랑하는 조선 백자처럼 아무 꾸밈이 없었습니다. 화려한 문양없이 순수한 청색만의 자기도 색다른 맛이 있었습니다. 지금 강진 일대에는 늦가을의 정취가 자욱합니다. 아침에는 바다 앞 섬들이 안개에 쌓여있고 낙엽이 거리를 덮고있지요. 여러분도 머나먼 남도 땅 강진으로 가 옛 선비들의 자취도 짚어보고 고려청자의 비색을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보는게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