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성문 앞에서 백성을 가르치는 ‘지혜’
옛 가나안의 최북단에 해당하는 ‘단’ 유적지, 곧 ‘텔 단’에 가면 옛 성읍의 성벽과 성문 그리고 성문 앞에 자리한 작은 공터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공터에는 지도자가 좌정하였을 자리가 보존되어 있고, 이곳이 성경 시대에 재판소로 쓰였음을 보여주는 그림도 붙어 있습니다.
사실 성문 앞에 자리한 공터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주변의 근동인들도 재판소처럼 사용하던 자리입니다(이사 29,21; 아모 5,10 등). 옛 성읍들은 유사시를 대비하려고 요새처럼 지어져 그 안이 거주지로 조밀하였기에, 군중이 모일 만한 장소는 성문 앞 공터뿐이었습니다. 성읍 주민들은 이 공터로 나와 외부인들과 만나 물건을 사고팔았고, 이곳에 좌정한 지도자에게 재판을 청하기도 했습니다(2사무 15,2 등).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는 바빌론 대신들이 예루살렘 성의 중앙 대문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예레 39,3). 이는 바빌론을 배신하고 반역한 유다 왕국을 심판한다는 의미를 지닌 상징 행위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문 앞 공터는 늘 붐볐기에, 예언자들은 백성을 선도할 말씀을 전달할 때 ‘성문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곤 하였습니다.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의 멸망과 유배를 앞둔 시절, 예레미야도 성문 옆에 서서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레 7,2에서는 “주님의 집 대문”에서, 19,2에서는 “‘토기 문’ 곁에 있는 벤 힌놈의 골짜기”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성문 앞에 자리한 공터의 이런 역할은 잠언에도 반영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지혜”는 잠언의 다른 구절에서 ‘성문 곁에 서서 목청 높여 백성을 가르치는 이’로 의인화됩니다(잠언 1,20-23; 8,3 참조). 곧, 잠언에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슬기로운 여인으로, 공정과 정의를 세워야 하는 성문에서(아모 5,15) 백성을 지도하는 현인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다만 오늘 제1독서에 언급되는 “어리석음”은 단순한 우매(愚昧)를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꾸짖는 어리석음은 무지(無智)의 차원이 아닌 ‘종교적 불경’(不敬)을 의미합니다. 일례로, 예레 4,22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백성이 어리석어서 나를 알지 못한다… 악을 저지르는 데는 약삭빠르면서도 선을 행할 줄은 모른다.” 이사 32,6에는 ‘어리석은 자들이 마음으로 죄를 짓고 하느님 앞에서 불경을 저지른다.’라는 질책이 나옵니다. 마태 5,22에서는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고 욕하는 자는 지옥에 던져진다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음’은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타락했다.’라는 뜻이어서 그 자체로 형제에게 심한 모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문 앞에서 그리고 언덕 위에서 백성을 지도하는 이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지혜’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걸으라고 가르칩니다. 이 같은 지혜의 면모는 “지혜의 근원은 주님을 경외함이니 그것들을 행하는 이들은 빼어난 슬기를 얻으리라.”는 시편 111,10의 말씀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박사, 광주가톨릭대학교 구약학 교수, 전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저서 「에제키엘서」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
[2024년 8월 18일(나해) 연중 제20주일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