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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7일 목요일 [(녹)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부터 사랑하셨으며 그들이 멀어져 가도 멸망시키지 않으시리라고 호세아 예언자는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서 평화를 빌어 주라고 하신다(복음).
<내 마음이 미어진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는 자신이 받은 것을 너무나도 당연시하거나, 또는 오히려 자신의 공으로 돌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나서 성장할 때까지 부모님과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로부터 공짜로 받은 것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
“전대에 금도 은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홈런을 치려면> 가끔씩 우리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불만족스럽다 못해 한심스럽고 때로 비참하다고 여겨질 때도 있지요. 불평불만이 솟구쳐 올라와 머리끝이 뜨거워질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원인을 찾아가다보면 대체로 몇 가지로 축약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상적인 ‘비움 작업’의 소홀을 들 수 있겠습니다. 또 다른 원인 한 가지는 너무 지나친 기대감이 아닐까요? 나 자신에 대한 기대, 이웃들에 대한 기대치를 부단히 낮추지 않을 때 우리는 조금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중병에 걸려 꼼짝없이 드러누워 있다가 회복된 형제들, 대형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오랜 세월 침대를 친구삼고 있다가 가까스로 병원을 벗어난 이웃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강조점이 있습니다. 내 발로 걸어서 마음대로 화장실 갈 수 있는 것, 통증 없이 밤 잠 제대로 한번 자보는 것, 통닭이며, 육개장이며, 삼겹살구이며...이것저것 음식 가리지 않고 마음껏 한번 먹어보는 것, 평소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는데, 그렇게 기쁘고 행복한 일인지 이제야 깨달았노라고... 조금만 주의해서 주변을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 감사꺼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깨에 힘을 빼면, 한껏 치올랐던 자존심을 버리고 나면 얼마나 많은 은총들이 우리 삶을 휘감고 있는지 모릅니다. 야구시합에서 홈런을 치는 선수들의 타격자세를 유심히 바라보면 스윙이 자연스럽습니다. 어깨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자연스럽습니다. 거기에 정확한 배팅 타이밍이 조화를 이루면 그것이 바로 홈런인 것입니다. 축구시합에서도 기가 막힌 ‘베컴 슛’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세게 찬다고 해서 골인이 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발목에 힘이 가해진 킥은 대체로 하늘 높이 뜨기 마련입니다. 다리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공을 찰 때, 멋진 골이 성공합니다. 우리 어깨에서 힘을 빼면, 몸과 마음을 비우고 부드럽게 하면, 경직된 심리상태를 내려놓으면 삶은 얼마나 편안해지는지 모릅니다.그 순간부터 우리 삶은, 또 우리 신앙생활은 탄탄대로가 될 것입니다. 내 의지대로, 내 고집대로, 내 계획대로만 끌고 가려고 기를 쓸 때, 내 인생이라는 작품은 절대로 걸작이 될 수 없습니다. 몸에서 힘을 빼고, 마음에서 완고함을 제거하고, 내 고집, 내 욕심, 내 의지를 접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을 때, 그분 손에 맡겨드릴 때, 내 보잘 것 없는 삶으로도 찬란하고 영롱한 멋진 작품 하나 만들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움켜쥠보다는 폄을, 지니기 보다는 버리기를, 그래서 혈혈단신으로, 바람처럼, 구름처럼, 무심한 나그네처럼 그렇게 복음 선포를 떠나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내 등짐 안에 이것 저 것 잡다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 발걸음은 무겁기 마련입니다. 비우고 또 비워 한껏 가볍게 만들 때,복음 선포를 위한 우리의 발걸음은 훨씬 힘찰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거저 주어라
제가 사제서품을 받고 첫 미사를 고향에서 할 때 저의 오랜 친구가 저 대신 강론을 해 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저보다 일 년 먼저 서품을 받았는데 유학을 하고 돌아온 저로서는 그가 사제가 되어 하는 첫 강론을 저의 첫 미사 때 듣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그는 굉장한 말더듬이었고 그래서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의 강론은 신자들을 완전 사로잡는 달변의 강론이었습니다.
제가 놀라서 나중에 물어보니 본인도 사제가 되어 그렇게 말을 잘 하게 된 것을 놀라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제 서품을 받아 주님의 제자로 쓰이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무언가 필요한 능력을 주심을 그것을 보고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라고 하여 받는 것들은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쓰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어렸을 때 “공부해라, 공부해서 남 줘?”라고 말씀하셨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은 남 주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면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 도움이 되도록 온갖 도움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습니다. 한방 병원이었는데 그 분들은 신기한 방법으로 저의 체질과 안 좋은 곳들을 짚어내셨습니다.눈을 감고 조용히 진맥을 하는 모습에서 그 쪽에서는 정말 전문가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맥을 한다면 단지 맥박이 뛰느냐 안 뛰느냐 혹은 빠르기 정도만을 알 수 있겠지만, 그 사람들은 그 단순한 박동에서 복잡한 몸의 상태를 구별해 내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많은 교육과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전문가들은 자신의 재능으로 돈을 법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배우기 위해 그들도 그만큼 많은 돈을 썼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능력들은 조금 다릅니다. 사회에서는 돈 주고 받았으니, 돈 받고 그 능력을 쓰는 것이지만,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거저 그런 능력을 주신 것이고 따라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개인적인 사욕을 채워서는 안 됩니다.
주는 것이 곧 사랑이기 때문에 거저 줄 줄 모르는 사제는 주님의 사제로서 온전하지 못합니다. 또 물질도 나누어 줄 줄 모르고 자신을 위해서 모으는 사람이라면 영적인 것은 안 봐도 뻔 할 것입니다.
어제 주교님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주교님은 방에 들어가 십만 원짜리 몇 장을 봉투에 넣어주시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사 오는 사람마다 그러기 쉽지 않은데 우리 주교님은 당신이 가지신 것을 모조리 나누어주십니다. 우리는 돈보다도 그 분의 정신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신자들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던 ‘가난한 과부’를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됩니다. 자신도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사제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모습을 볼 때, ‘나보다 낫다!’라고 생각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도 사람인지라 가끔 물질까지도 걱정하고 더 많이 가지려하고 받기는 잘 받으면서도 남에게 베풀 때는 계산을 하며 주는 자신을 볼 때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주지 못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를 할 때마다 저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서 바치신 신비에 놀랍니다.
하느님은 성모님께 당신의 아들, 즉 당신의 전부를 주셨고, 성모님은 그 전부인 아들을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신비 안에서 성모님은 하느님과 온전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셨습니다. 당신이 거저 받으셨으니 인간을 위해 거저 주신 것입니다. 이 거저 주고받는 사랑의 신비를 통해 인간과 한 몸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거저 주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거저 주는 모습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Without cost you have received; without cost you are to g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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