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들이닥친 시월 한파.
몇 번의 가을이 더 허락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가을을 이렇게 보낼 순 없다- 위기감에 입술이 바짝 마른다. 올 가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뭐라도 건져봐야지!
가을 보러 갈 사람, 손~
일요일 늦은 저녁. 회가 동했다. 월요일 하루는 쉬어갈 요량이었으므로 멤버를 소집해본다. 어떤 정신 나간 인간들이 일요일 늦저녁에 여행을 나설까. 그래도 미친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다. 비룡 내외와 무쇠팔 상미가 걸려든다. 멤버가 확정되었으면 다음은 행선지. 코스는 오야 엿장수 마음이다. 출렁다리가 유명하다는 예당저수지를 찍고, 주변의 펜션을 검색한 후
“늦게 죄송합니다. 방 있나요?”
“방은 있지만... 지금요?”
22시 30분에 펜션 주인장과 통화를 하고, 90분만 참았으면 4만 원을 아낄 수 있었던 숙박비 12만 원을 이체하고, 부랴부랴 귀가해 배달모드를 해제하고, 간단한 옷가지와 잡동사니를 챙기고, 24시 마트에 들러 할인 딱지가 붙은 한우와 먹거리를 사고... 출발!
도착하니 01:30.
옹기종기 여러 펜션이 모여 있음에도 불빛 하나 없는 어둠이다. 서리가 내려앉은 잔디를 밟고, 뵈지 않는 허방에 발을 헛디디고, 울퉁불퉁한 외벽을 더듬어 할애된 룸으로 들어선다. 투숙객이 몇 팀 있다는데 소리도 불빛도 없다.
짐을 품과 동시에 꽃-등심 구울 준비를 하는데
“어라? 환기시설이 안 보이네.”
역시 요식업 사장의 안목은 예리하다. 02시까지는 전화해도 된다고 했으니
“사장님, 고기 구우려는데...”
“실내에선 인덕션 외의 취사가 불가합니다. 밖에서 구워야 합니다.”
어쩐지. 환기시설이 없더라니.
배 째!
밖에서 굽는 척 모양을 떨다가
어슬어슬 팔뚝을 오르는 소름에 착한 손님을 포기하고 실내로 이동,
문처럼 생긴 놈들은 죄다 열어놓고 꽃등심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
‘고기는 역시 한우지’
게눈 감추는 속도로 해치운 후 이어지는 한돈 목살 굽기.
한우 꽃 향이 채 가시기도 전 돼지 목살을 들이미니 목젖에서 살짝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네가 언제부터 한우만 찾았다고’
반항하는 목구멍에 카스 세례를 퍼붓고 다시 욱여넣기.
한우 예찬에 시시껄렁한 잡담까지
가을의 새벽을 만끽하다보니 어느 새 05시.
1년 치 주량- 맥주 2캔을 넘어서 불콰해진 나는 미니 2층의 잠자리로 직행.
‘터프한 상미가 설마...’ 일말의 불안감이 없진 않았으나 다행스럽고 무사한 굿-모닝이다.
아래층 비룡 내외도 그냥 손만 잡고 잤단다.
역시 로맨스완 거리가 멀어진 불쌍한 중년들. ㅠ.ㅠ
가을 감상은 아침 산책으로.
‘의좋은 형제’ 팻말 붙은 사과밭을 거닐고, 가시오가피 나무의 가시를 희롱해보고, 노란 들국화에 코를 디밀어보고...
백주대낮 사과/단호박 한 알의 서리로 산책을 마무리.
“의좋은 형제님, 농장 관리가 넘 부실허드라. 사과들이 그냥 썩고 있잖여여. 암튼 계좌 주시면 사과 한 알 값 부칠 게여. 단호박은 걍 싸비스 오키?”
펜션 2층의 대형 창에서 멋진 프레임으로 등장하는 예당저수지.
호변의 가을은 특별히 인상적인 게 없었다. 출렁거리지 않는 출렁다리도 좀 그랬고.
돌아 나오는 길엔 수덕사 앞에서 산채&더덕 정식을 선택한다. 더덕 고유의 향이 느껴지질 않아 원산지를 확인해보지만 국내산. 비룡 주방장이 한마디 한다. “너무 쪼사(?조져?) 뿌러꾸마.”
스산함 혹은 아련함.
돌리는 발걸음에 몇 닢 때 이른 낙엽이 차인다. 가을의 정취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2021년 나의 가을은 이렇게 저물어간다.
첫댓글 예당에 오셨군요^^ 어죽도 괜찮아요 😊
예, 갔지요. 어죽은 비려서... 그래도 굳이 쏘시겠다면 도전은 해보겠...ㅋㅋ
여행의 참맛은 바로 이러한 불현듯함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낭만님의 불현듯 여행으로 제가 사진으로나마 예당저수지를 봅니다.
그나저나 올해 가을을 두고 저물어간다고 하시는 말씀은 못 받아들이겠습니다.
저의 가을은 크리스마스까지 입니다. 늘 그랬습니다.
가을은 크리스마스까지라... 낭만은 저보다 윗길이시네.
일상이 늘 바빠 보이셨는데 어딘가로 떠나셨다는 소식이 반갑습니다~🙂👍
에구, 티가 났나요?
낭만과 배달,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보니
여우 같은 여유란 놈을 항상 놓치네요. ㅠ.ㅠ
@낭만배달부 몸도 생각하셔서 여유를 자주 챙기셔요~~^^
좋은시간 되셨기를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