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
허 열 웅
‘나는 사유思惟한다, 고로 존재한다.’ 2022년 처음으로 국보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두 점만을 위한 전시회가 국립주앙박물관 2층에서 열렸다. 이곳에 MZ세대를 비롯한 관객이 70만 명이 넘게 다녀갔다고 한다. 처음으로 함께 전시되는 두 불상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사유를 통해 마음의 평온을 체험한다. 나 역시 반가사유상에 현혹되어 한 시간이 넘도록 그 앞에 서 있는 나. 어쩌면 옷깃 한 번 스치고 간 먼 인연 같은 아득함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조급해진 몸과 마음을 잠시라도 사유에 잠겨 나를 바라보는 여유를 갖고 싶은 마음에서 였다.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오자 모두 서둘러 빠져나가고 나 홀로 남았다. 잠시였지만 묵상과 기도의 깊은 시간이 되었다. ‘무얼 그리도 깊이 생각하십니까?’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에게 말 걸기에도 더 없이 좋은 조용한 해질녘 이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으셨다. 다만 철없는 나의 질문으로 깊은 사유에 실금이라도 가는지 엷은 미소가 한 순간 흔들리는 듯 보였을 뿐이다.
온 몸에서 뿜어 나오는 해묵은 청동의 빛을 품고 투명한 유리 집에 앉아 세속의 모든 언어를 머금고 있다. 천년이 흐르고 또 천년이 흘러가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감은 듯 뜬 듯 가느다란 두 눈, 우아한 미소, 신체 각 부분의 조화, 옷자락과 허리의 생동감까지 자연스러운 자세로 앉아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머리에 3면의 둥근 산모양의 관을 쓰고 있어서 삼산三山반가유상으로도 불린다. 얼굴은 거의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하고 눈두덩과 입가에서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고, 목에 두 줄의 목걸이가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왼발은 내려서 작은 연꽃 좌대를 밟고 있고 오른 쪽 발은 왼쪽 무릎위에 얹어 놓았다. 왼손으로 오른 발목을 잡고 오른 손은 팔꿈치를 무릎에 얹었으며,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괴고 있다. 연꽃무늬의 좌대를 덮은 옷자락은 길고 자연스럽게 조각되었다. 단순하면서도 균형 잡힌 신체 표현과 분명하게 조각된 눈, 코 입 등, 그리고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반가상의 자비로움은 종교조각으로서의 숭고미를 더해준다.
사유思惟의 국어사전은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이고, 철학적 해석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가장 근본적인 사유는 인간 본성에 대해 ‘인간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즉 자기 외부로 향해 있던 인식의 시선을 자기 내부로 돌리는 작업이다. 내가 나 자신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일이 오직 내 손 안에 있다는 점에서 손쉽지만 자신에 대한 성찰이 습관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만만치 않다. 특히 요즈음은 자기 PR 전성시대라고 할 정도로 모두 다 시끄럽게 큰 소리를 내고 자신을 드러내지 못 해 안달하는 세상이다. 또 한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도 뛰어야 할 정도로 바쁜 세상이니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볼 여유가 없다.
나는 학생시절부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너무 좋아했다. 팔로 턱을 고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 고뇌가 가득 찬 침묵 속에 빠져있는 그림을 책상 앞에 붙여 놓기도 했다. 지상의 많은 인간들의 고뇌를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형상화한 그 침묵이 나를 깊이 빠져들게 했다. 언어가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보고, 듣고, 생각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먼 훗날에서야 알게 되었다. 침묵은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 후에 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림과 같다. 긴 인내와 희망을 필요로 한다. 삶의 깊은 의미는 침묵 속에 있다. 그래서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지 마는 침묵을 배우기 위해서는 60년도 더 걸린다고 한다. 20년간 입을 다물고 걸어서 여행을 한 ‘워커 존 프란시스’는 걷기와 침묵은 속도를 늦춰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줬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이가 들면 흔히 몸은 현실에 두고 과거를 먹고 산다고 한다. 또 한 기운이 입으로 올라와 말이 많아진다. 그리고 소외당하는 서러움에 ‘내가 왕년에는…소리를 자주 되 뇌이지만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 나이 노년의 막바지에 늦은 감이 있지만 앞으로는 내 애기는 한 번만 하고 남에게 세 번 이상의 기회를 주며 열심히 경청하는 자세로 돌아가야 하겠다. 지식이 낱말의 연결구조인 언어의 세계라면 지혜는 심연과 같은 침묵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침묵의 의미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은 아니고 싶다. 사회가 보수와 진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젊은이들의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효의 사상이 실종되는 현실에서 불의에 침묵하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나의 젊은 날 희망과 고뇌와 방황의 길에서 바라본 상像이었다면 ‘반가사유상’은 노년에 나에 대한 성찰과 해탈을 꿈꾸는 침묵의 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 입은 닿을수록 품위가 드러나고 지갑은 열수록 빛난다고 한다.” 앞으로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반가사유상의 엷은 미소로 대신하고, 넉넉지 못한 노후 연금이지만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는 자선냄비 앞에서 기꺼이 지갑을 열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