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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군대의 지휘관입니다. 그러기에, 적군을 공격할 때는 지휘관이 있는 사령부를 먼저 집중 공격하며, 함장이 타고 있는 모함을 향해 함포를 발사합니다. 만약, 지휘관을 잃게 되면, 군대의 사기가 떨어져서 강한 무기가 있어도 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쟁에 있어서 가장 유일하고 중요한 존재는, 바로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삶 속에서도 전장의 지휘관처럼, 잃어서는 안 되는 유일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지켜야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속히 자신을 도우시며, 칼과 원수들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의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구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겁니다. 다윗은, 자신을 사자의 입과 들소의 뿔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을 것을 확신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는 시 22편에는 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5복음서”라는 겁니다. 4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지만, 시 22편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훨씬 전에 쓰여진 구약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복음서” 또는 “다윗복음서”라고 합니다. 시 22편은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탄원과 감사와 신뢰가 두드러집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의 아픔을 아름답게 시적으로 표현하는 본문은, 삶 속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절박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현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않으신다는 느낌으로 절망에 빠져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는 성숙한 신앙의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찬양과 감사 그리고, 믿음의 확신으로 끝나야 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욥 8: 7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끝이, 확신과 다짐이 되는 성숙한 기도로 성장하는 가운데,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간구를 듣고, 응답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9절을 보시면,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합니다. 우리는 나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원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며,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다윗은 지금, 도무지 소망이란 것을 가질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속히 도우시도록 간구합니다. 이것이, 단 3: 18에 나오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위기 가운데 있는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도움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다윗을 도와 그를 위기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절망적인 순간에, 소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다윗을 극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도우심은, 이렇게 극적으로 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되 끝까지 의지해야 합니다. 소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절망의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고 신뢰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평소보다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풀무불 속으로 던져진 세 친구들이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된 것입니다. 단 3: 25을 보시면,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라고 합니다. 이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던져진 풀무 불 속에, 세 친구 외에 다른 한 존재가 있었던 것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그 형상이 신의 아들과 같았다고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세 친구들을 보호하셨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세 친구들이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는 그 순간, 아주 극적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도 상황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되 끝까지 의지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아뢰고 또 아뢰며, 도움을 간청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순간을 맞게 됩니다. 이런 순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그 역시 하나님을 버립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이 극적이라는 것을 알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멀리 하지 말라고 호소하며, 하나님을 향해 “나의 힘”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힘을 의지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 자신의 힘”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 생각, 노력 등 나 자신의 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세상의 힘”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잘 되지 않을 때, 세상의 힘을 의지합니다. 여기에는 주변 사람들의 인맥, 재물 그리고, 해결을 위해 애쓰는 여러 가지 방법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는 본문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힘, 나의 도움”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상상하지 못했던 극심한 고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도리어 모든 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더욱 간절히 간구합니다. 이를 볼 때,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고 흔들릴 수 없는 분이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본문 속의 다윗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소망이 없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이 길어지면서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 왜 내게 기름부으셔서 이 지경이 되게 하셨냐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속히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도인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심을 확신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끝까지 기도의 자리를 지킬 때,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여러분, 어떠한 상황에서든, 내 힘, 세상의 힘이 아니라, 다윗과 같이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0절을 보시면,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라고 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하고 신뢰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본문에서, “내 생명”과 “내 유일한 것”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며, 또 유일한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본문에서, “자신의 생명과 삶”을 구하는 겁니다. 무엇으로부터 구하는 겁니까? “칼과 개의 세력”입니다. “칼”은 죽음의 세력입니다. 그리고, “개의 세력”은, 자신을 위기 가운데 몰아넣은 대상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살인자들이나 반역자들을 죽이게 되면, 장사도 지내주지 않고 그 시체를 거리에 내던 졌는데, 그것을 들개들이 먹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실제로 칼과 죽음의 협박을 자주 겪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의 다윗의 절규가 크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죽이고자하는 칼과 개의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며, 우리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앞에서 다윗은 악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악한 무리로부터 손과 발이 상함을 입었고, 심지어 겉옷과 속옷까지도 빼앗겼습니다. 이러한 악한 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다윗의 생명입니다. 생명을 빼앗기는 것은, 최종적인 패배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유일한 생명과 소중한 영혼을 해하려 합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군대의 지휘관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 해야 합니다. 다윗이 본문에서 고백하듯, 하나님만이 우리를 극적인 환난에서 건져 주실 유일한 능력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굳은 의지로 기도의 자리를 지킬 때, 극적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다윗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모두 다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시고 구원을 허락해 주실 것을 더욱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난을 경험하면서,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즉각적인 도우심을 간청하는 다윗의 음성을 들으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본문의 다윗을 통해, 항상 기억하고 신뢰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우리에게 닥친 현재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즉각적인 구원의 응답을 주시도록 언제나 기도로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2절을 보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간구를 듣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성도된 우리는 영원한 찬송해야 합니다.
본문부터는 시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본문 앞의 21절까지는 “탄식과 부르짖음”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본문 22절부터는 “감사와 찬양”으로 일관합니다. 이렇게 시의 분위기가 급반전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본문 앞의 21절의 “내게 응답하시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그 동안 다윗의 부르짖음에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응답하신 겁니다. 그러기에, 본문 뒤의 24절에서,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라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촉구했을까요? 이는, 다윗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저 덧없이 오가는 한 인생으로 기억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차,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인도해야 할 지도자였고,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열방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야 할 중차대한 사명을 지닌 사명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이 사망의 진토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 겁니다. 본문 22 - 26절의 내용을 보면 “찬송하리라”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사역은, 성도들의 영원한 찬송 제목이 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에서, 이에 대한 찬양이 끊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입술의 중심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현실적인 면으로 볼 때, 다윗이 당한 고난은 이방인들에 의해 당한 것이기 보다는 동족들에게 당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의 다윗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대한 경험을 이스라엘에게 전하면서, 그 기쁨과 감격을 함께 나누고 누리는 겁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에게 아직 구체적인 구원이 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고 서원을 올리며, 자신이 구원받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 역시, 본문의 다윗과 같이, 언제 어디서나 또, 어떠한 상황에서나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항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