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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46편1~11절
제목 : 하나님은 피난처이심
본 시의 저작자도 고라 자손으로
저작 시기는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왕 산헤립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가 18만 5천명이 하룻밤에 몰살되고 예루살렘은 무사히 구조된 때입니다.
열왕기하19장과 이사야서 37장을 보면 앗수르왕 산헤립 군대가 18만 5천명의 군대로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있을 때에 히스기야 왕이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하룻밤에 몰살하고 예루살렘이 구조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지은 시입니다.
“알라못”은 여성의 고음 곧 스프라노 소리를 가리킨 말입니다.
소프라노와 같이 높은 음을 내는 악기에 맞추는 노래입니다.
46편 47편 48편은 세 쌍둥이 시로서 저작자도 시기도 같은 시입니다.
46,47,48편은 비슷한 주제를 말하는 연속적으로 연결된 시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46편은 원수나 적의 위협이 제거된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하는 것으로 나오고,
47편은 정복당하고 패배한 원수들에 대해서까지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에 대해 초점을 두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48편은 상당히 위험에 처해 있었던 시온성이 얼마나 상하지 않았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볼 수 가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이십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요”라고 하였고,
7절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하였고,
11절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는 이유는
1) 환난 중에 큰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기 때문입니다.(시37:39)
시편59:16절에서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을 세 가지로 묘사합니다.
①피난처 ②힘 ③큰 도움, 하지만 각자의 의미는 조금씩 다릅니다.
① 피난처는 들어가서 완전하게 숨을 수 있는곳을 이야기 합니다.
② 힘은 어떤 시련과 고난도 능히 견기는 것을 의미하고,
③ 도움은 항상 대기 상태에 있는 도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2~3절상반절에서 땅과 산과 바다와 바닷물 그리고 다시 산으로 연결되는 엄청난 자연 재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쓰나미와 같은 재난, 인간의 과학적이고 건축적인 어떤 지혜와 노력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재난을 연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집니다. (2절)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크고 참혹한 대지진이라도 산이 바다 복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니
이것을 마지막 대 심판으로, 이 세상 종말을 짓는 것으로 보아도 되겠습니다.
②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고 넘치고 산들이 흔들립니다.(3절)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라고 하였습니다.
땅의 흔들림보다 바다의 솟아남은 더 겁나는 것인데 그것이 넘침은 바다가 땅을 덮음이니, 노아 홍수 때에 비도 비였지만 바다의 넘침이(창7:11) 온 땅을 뒤 덮는데 더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최악의 재앙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난들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두려움과 공포일 것입니다.
이사야는 바다를 나라로(사27:1),
바다의 넘침을 앗스르의 침략과(사8:7~8),
아람의 침략으로(사17:12)말하였습니다.
여기 시인은 앗수르의 예루살렘 내침을(왕하18:13)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이 아무런 침해를 받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떠한 나라들의 어떠한 침략이라도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고, 바닷물이 솟아나고 산들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11:4절 “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앗수르 대군을 하룻밤 사이에 진멸시키시는
대권능을 보고 이를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고라 자손이니 그 조상 고라가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땅이 입을 벌려 그와 그 도당을 삼켰다는 이야기를(민16:31~33, 26:10) 들었을 것이며,
동조하지 않은 아들이 살아서(민26:11)
자신이 그 산 자의 자손인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땅이 아주 바뀌는 대변동이 일어나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는다면 끄떡없을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시편102:26~28절에 “[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28]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변동 정도가 아니고 아주 없어저도 영존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영생할 것이니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51:6절에소도 분명히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주 안에 있는 자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2) 하나님이 흔들이지 않는 성(城)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4,5절입니다.
“[4]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절에서 저자는 물이라는 주제를 언급합니다.
-3절에서 바닷물은 엄청난 기세로 모든 것을 삼키며 모든 것을 뒤엎고 파괴하는 난폭자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4절에서 물은 한 시내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완전한 통제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적에 따라 사용되는 수단에 불과 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5절에서는 그 물은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 시온성을 흔들수도 없다고 합니다.
3절에서 바닷물은 산을 흔드는 위력과 힘을 나타내지만 하나님께는 얌전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보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시내」은 언제나 기쁨, 안식, 평안입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사시사철 푸릅니다. 싱싱합니다.
시냇가에 있는 나무는 철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시1:3)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은 죽은 땅을 살립니다.
생명수 강이 흐릅니다.(겔 47:1-12, 욜 3:18, 계 22:1-2)
바닷물은 '혼돈의 상징'이지만,
사시사철 흐르는 강물은 '생명, 기쁨, 축복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에는 강들이 많이 있지만 대부분 와디(乾川)입니다.
메마른 강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시내]는 물이 철! 철! 넘칩니다.
감동과 환희의 시내입니다.
이 시내는 하나님의 성을 풍요롭게 하여 즐겁게 합니다. 축복의 시내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을 피안(彼岸)의 세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은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 위치합니다.
하나님의 성은 오늘, 여기, 살아있는 우리 가운데 위치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을 지성소, 성전으로 제한하지 않고 '그 성 중에'라고 합니다.
세상은 온통 요지경입니다. 날마다 흔들리고 밤마다 휘청거립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은 안전합니다. 녹색지대입니다. 생명보호지역입니다.
하나님의 성은 비록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현실을 초월하는 힘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가볍게 흔들려도 하나님의 성은 무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장 높으신 분의 처소이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 성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기는 지진이 일어나도 괜찮습니다. 화산이 폭발해도 괜찮습니다.
바람 불어도 괜찮아요. 비가 내려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절대 안전지역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7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라고 하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전우주를 장악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뜻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동시에 만군의 여호와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시니(시24:8),
곧 전쟁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어서(삼상17:47, 대하20:15)
하나님의 마음대로 처리됩니다.
그러니 세상 그 어떤 나라가 침략해 온다고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야곱의 하나님”으로 말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 12지파가 야곱에게서 파생된 것이므로 야곱만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다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피난처시로다”라고한 “피난처”란 말은 1절에서 말한 피난처와는
다른 말로서 시편 9:9과 18:2절에 “산성”으로 번역한 말이니 험하고 높은 산 위에 건설된 요새처를 말한 것입니다.
그 안에 피난하면 가장 안전합니다.
둘째, 새벽에 하나님은 도우십니다.(5절)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
도독이 새벽에 든다고 합니다. 새벽은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취약한 부분,
가장 약한 시간에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의미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고 함은 앗수르 군대가 진멸당한 것을 발견한 시간이니 (왕하19:35)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또 생각지도 못한 때에 벌써 다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지나고 난 다음 늦게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데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벌써 다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늦어서 후회하는 일 없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히4:16) 주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따라 육지가 된 홍해에 들어갔던 애굽군을 새벽에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어지럽힐 때 애굽군이 깨닫고 도망치려 했으나(출14:24~27)
때른 이미 늦었으니 어찌하겠는가?
시편30:5절에 “그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의지하는 자와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 정반대로 나타나십니다.
*새벽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의미있는 시간입니다.
홍해에서 새벽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순간이었지만,
애굽 사람에게는 심판의 시간 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때 유다를 에워싼 앗수르의 185천명은 새벽에 죽었으며,
그 새벽에 유다는 구원을 보았습니다.
밤이 있으면 반듯이 새벽이 오듯 하나님의 도우심은 반듯이 임한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행적(8~11절)
1) 하나님의 행적을 보라(8~9절)
“[8]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9]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주시고 살펴서 교훈을 얻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주의하지 못하고 망각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주시한다면 하나님께서만 의지하고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라고 함은
앗수로 군대를 진멸시키신 것을 지칭함니다.
이 사실을 잘 살펴본다고 하면 하나님의 절대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교만하던 자도 이슬이나 서리가 햇빛 앞에서 녹아 없어짐같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지고 말지 않았는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은 전쟁이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기 때문에(삼상17:47, 대하20:15)
땅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실 수 있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앗수르를 물리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활”, “창”, “수례”는 다 무기를 가리킴이니 “수례”는 “병거”를 가리킵니다.
“창을 끊음”은 창 자루를 끊어 버리는 것 곧 잘라 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들은 결국 무기 전부를 사용할 수 없게 함이니 전쟁을 못하게 함입니다.
이 구절은 메시아 왕국의 예표로서,
이사야2:4절에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고,
호세아2:18절에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고 하였으니,
메시아의 통치는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9:7)
6절에서 뭇나라와 왕국들이 대적을 하지만,
9절에서 하나님께서 전쟁의 무기인 활과 창과 수례를 불태워 모든 전쟁을 끝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 되심을 알라(10~11)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는 데서 모든 불행이 싹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어서 하나님께서 무소불능하신(욥42:2) 창조의 능력으로 죽은 자도 잘리시며 없는 것도 있는 것 같이 불러내시는(롬4:17) 하나님으로 바로 알라고 합니다.
“가만히 있어”는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싸우려고 덤벼드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함은 하나님만이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을 바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국의 거짓 신과 같은 줄 알고 멸시하고 능욕하다가
멸망당한 앗수르 왕의 일을 경고로 모든 열방에 경고함입니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는 이 말 앞에
이유 접속사가 있어서 이 말이 전반절의 이유 설명임을 보여 줍니다.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 됨을 알아야 할 이유가
하나님께서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바로 알로 세계 열방들이 다 하나님을 높이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되시고 섭리주 되시고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못한 자들은 장차 그 심판대 앞에서 진멸 당합니다.
이사야는 사37:20절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11절은 후렴이니 7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로 시작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로 마칩니다.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에 계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어디든지 함께 하시고 어떤 일이든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와 함께 하실까요?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백성인 우리를 사탄과 지옥의 세력에서 건져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찾아올 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해결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언제나, 무슨 일이든지 완전한 평화와 승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이기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만 믿고 그분께 피하십시오.
그러면 때마다 일마다 반드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의 든든한 요세요, 믿을수 있고, 신뢰 할 수 있는,
그리고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출처: 헤브론선교회 글쓴이: 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