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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사만 사천의 찬양
(계 14: 1-5)
= 성 화 론 =
요 약
우리는 온전한 승리자의 모습인 십 사만 사천을 본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한 무리요, 하나님 형상으로 변화된 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들이요, 구원의 참 의미를 아는 자들이요,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요, 하나님의 주권에 철저히 순복하는 자들이요, 역경 가운데서 연단을 거친 자들이요, 참 믿음을 가져 성화된 자들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믿음을 가지려면 예수 복음에 견고히 서서 감사와 찬양과 순종하는 삶이 필요하다.
설 명
<장성한 성도>
1.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자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1절)
2. 하나님 형상으로 변화된 자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1절)
3. 영적으로 장성한 자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2절)
4. 구원의 참 의미를 아는 자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3절)
5.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자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4절)
6. 하나님 주권에 순복하는 자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4절)
7. 연단 받아 성화된 자
“처음 익은 열매로”(4절)
8. 온전한 성화를 경험한 자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5절)
★ 이 믿음을 소유하려면
① 복음 안에 서라 ② 기도하라 ③ 순복하라
(본 문)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1-5)
(강 해)
이 시간에는 “십 사만 사천의 찬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십 사만 사천은 이미 7장에서도 나왔지만 14장과 다른 점은 7장은 인치는 면이 부각되어 있다면 14장은 그들의 신앙적인 세부사항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7장은 성령 충만과 연단을 통해 완성되어지는 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14장은 666과 같은 온갖 유혹도 다 이겨낸 지속적인 견고한 믿음을 강조함입니다.
한 마디로 여기 십 사만 사천은 영성을 입고 유혹을 이긴 성화에 이른 성도의 모습입니다.
감사한 것은 시온산에 선 십 사만 사천은 천상의 성도만이 아니라 지상의 성도의 성화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보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하신 성도의 영적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이렇게 영광스럽게 하신 것을 믿고 복음에 서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에 서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성령 충만이 임하여 십 사만 사천의 실재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앞의 666과의 관계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앞의 666이 죄에 빠진 인격을 말씀한 것이라면 십 사만 사천은 그 반대적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성령의 인침 받아 악한 세대에서 구원함을 받은 승리의 무리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666의 무리가 아닌 십 사만 사천의 무리에 들어야 합니다.
그럼 십 사만 사천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입니까?
1.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승리한 자들입니다.
1절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했습니다.
이 말씀 중에 어린양과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시온산에 섰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 어린양은 구속주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시온 산에 섰다는 것은 시2:6의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신 대로 죽으셨으나 다시 사시고 높이 되신 그리스도의 승리적 왕직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택한 자들을 대표하신 구속주로서 온전히 승리하신 왕직입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함께” 란 바울서신에서 안에 라는 용어와 교호적으로 사용된 동의어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복음의 터전에 굳게 섰다는 것으로 예수 안에서 되어진 구속의 진리에 견고히 서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복음적으로 볼 때 이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승리한 무리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초점은 복음의 원리보다 그들이 이 복음에 섰을 뿐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그 영광스런 실재를 누리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시24:3-6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 사만 사천은 예수의 복음에 견고히 선 자요 성령의 은혜로 죄악에서 승리한 거룩한 자들입니다.
2. 그들은 구속의 결과로 아버지의 형상으로 변화된 성도들입니다.
1절에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했습니다.
앞의 666표를 받을 때도 이마가 나왔는데 여기 대조적으로 다시 이마가 나옵니다. 그래서 666과 144,000은 상반된 개념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마에 성자와 성부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이름이란 언제나 실체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씀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말씀은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아름이라고 했을까요?
그리고 아버지가 먼저 나옴이 통례인데 어린양이 먼저 나옴도 신기합니다. 그것은 어린양의 이름은 구속을, 그 아버지는 닮음이 강조됨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구속하심의 결과로 그들이 아버지의 거룩한 형상을 닮았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앞장에서 이마의 666표가 죄의 인격이라면 본문에서의 이마의 이름은 하나님의 형상의 성화된 인격입니다. 이 신의 성품은 우리에게도 약속된 성품입니다(벧후1:4-7). 그리고 벧전1:16에도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했습니다.
3. 그들은 장성한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2절에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했습니다.
여기 그들의 찬양을 하늘에서 나는 소리라고 함에서 그들이 영적으로 하늘에 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더 이상 땅의 소리가 아닙니다. 또 그들의 목소리가 많은 물소리 같았다는 것은 1:15의 예수님의 목소리와 같은 것으로 그 만큼 성장을 암시하며 나아가 그들이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가 큰 뇌성 같았다는 점에서 보좌에 계신 엄위하신 아버지를 닮을 만큼 성장한 것임과 아울러 하나님의 원수인 죄와 사단과 세상과 더 이상 친하지 않고 대항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봐도 영적으로 장성했다란 먼저는 죄에서 떠난 것이요(고전3:1), 아버지를 닮아 사랑이 풍성하며(고전13:11-13), 예수님을 닮아 은혜와 진리가 풍성함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영적으로 장성함에 도달한 자들입니다.
4. 이들은 구원의 참 의미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2-3절에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했습니다.
여기 하늘에서 나는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 소리가 요한의 듣기에는 거문고 타는 소리로 들렸다는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구원의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고 있음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그들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여기 새 노래란 계시록 5장에 나타나 있는 대로 구원의 노래를 가리킵니다.
계 5: 9-10에 “새 노래를 노래하여 -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한 내용을 보십시오. 그들의 구속의 노래를 새 노래라 한 것은 이들은 구속의 진리를 알고 실재로 경험한 자들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새 노래란 그리스도의 공로를 실재로 경험한 자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들은 죄에서 해방을 알고 성령으로 화평과 의로움과 영적 권세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노래란 산 체험 속에서 나오는 감격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화의 자리에서만 복음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걸까요?
우리는 이미 되어진 구원의 과거 시제를 믿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의 구원적인 삶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직 죄인의 경험에 있을지라도 복음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지상에서 성화 경험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점차 은혜를 체험한 아는 자의 노래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5. 이들은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4절에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했습니다.
문자대로만 본다면 십 사만 사천은 남자여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 여자는 단순한 여자라기보다 17:1의 음녀가 암시하는 것처럼 세상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약4:4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했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는 문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를 더럽히는 것은 세상적인 죄악들입니다. 그래서 고후7:1에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했습니다.
그리고 정절이 있었다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신부의 수준에 이른 장성한 자임을 시사합니다.
성도는 호세아의 아내 고멜과 같이 예수 말고 다른 것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6. 이들은 철저히 하나님 주권에 순복하는 사람들입니다.
4절에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했습니다.
여기 어린양은 구속의 주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감이란 소명과 중생과 회개와 신앙과 칭의와 성화의 장차 영화 구원의 과정을 순복함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감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며 함께 왕노릇하는 그 과정을 철저히 수납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강조했듯이 단번에 되어진 복음을 믿고 노래하면서 철저히 나를 십자가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자신의 생각과 사고보다는 주님의 사고와 가치관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같은 억울하고 고통스런 환경이 올지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을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 때 성령 충만이 임하여 믿어지게 되고 믿는 진리가 실재가 됩니다. 십 사만 사천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자들입니다.
7. 이들은 역경 가운데서도 성화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4절에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했습니다.
여기 처음 익은 열매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과일인 무화과를 암시한 것으로 무화과는 몇 가지의 과일로 구별됩니다. 즉 겨울철의 푸른 무화과와 이른봄의 처음 익은 무화과와 잘 익은 여름 무화과가 그것입니다. 여기 처음 익은 무화과는 가을에 맺혀 겨울을 이기고 이른봄에 익는 과일로서 지상에서 온갖 고난 중에서도 성화된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잘 익은 여름 무화과는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온전한 성화와 영화입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성화 되는 처음 익은 무화과는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더욱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큰상을 주시며 귀히 써 주십니다.
이와 같은 승리의 무리들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상 교회에 은혜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로 갈라진다는 긴장을 주시기 위해서일까요? 그보다 참 성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모두가 성화적인 성도가 되도록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믿음 지키기 어려운 세상의 환경 속에서도 봄 무화과처럼 성화 될 수 있었다는 표본이 됨에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가운데서” 구속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지상에서 성화를 경험한 첫 열매와 같은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는 그들의 연단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시57:4에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했습니다. 대부분의 연단은 대인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특히 가정은 여러분의 신앙 훈련장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을 보면서 늘 하고 싶은 말은 매사의 삶을 우연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신 신앙훈련의 기회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 때부터 삶은 180도 달라집니다. 이것을 알지 못했을 때는 겨울의 푸른 무화과 열매처럼 환경을 원망하며 수없이 시험 들었지만 아는 순간부터는 그 역경이 기회가 되어 믿음의 적극적인 생활을 가져와 온전히 구비된 신앙으로 만들어 줍니다.
8. 그들은 온전한 성화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5절에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했습니다.
이들이 입에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곧 그들의 온전성을 시사합니다.
왜냐하면 약3:2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했기 때문입니다. 마5:48에 예수님께서도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온전은 하나님의 온전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해주신 그 분량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흠이 없고” 란 육신적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 “흠”이란 구약에서 제물을 취할 때 조금도 결격 사유가 없는 양을 고르는데 썼던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흠이 없다란 그들이 충만한 성화를 경험한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엡5:26-27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신 대로 거룩한 신부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럼, 어떻게 십 사만 사천과 같이 아름다운 믿음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 본문에 나타난 몇 개의 동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절에 섰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섰다는 것은 견고성을 암시하며 또한 이 진리에 반하는 모든 세력을 대항하고 대적함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어린양과 함께 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섰음을 가리킵니다. 이 복음에 섬은 약 두 가지로서 먼저는 이 진리에 나를 포함시켜 믿는 믿음의 적용이요, 하나는 성령 충만으로 나에게 실재적 적용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섬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느낌과 상태나 환경이나 실패의 경험이 무수해도 예수님은 나의 생명의 구주이시며 나는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와 함께 살았으며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혀졌고 예수 안에서 승리했고 복을 받았으며 성화 되고 영화롭게 되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15:1-2) 했습니다. 우리가 성화 되는 것은 오직 예수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잘 이해시키고 성령 충만 받게 함이 신앙훈련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2. 3절에 새 노래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복음 안에서 보면 성도는 이미 예수 안에서 승리한 자이므로 성도들은 누구나 승리의 찬양을 부를 자격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처럼 이렇게 믿음으로 부를 때 실재로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믿어가 칭의를 가리킨다면 입으로 시인함은 성화를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찬양의 소리가 십 사만 사천과 같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많은 물소리와 같았듯이 진리의 복음을 알고 부르는 찬양이어야 합니다. 또 뇌성과 같았듯이 어떤 환경과 느낌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어야 홥니다. 그리고 요한의 귀에 거문고 타는 것처럼 들렸듯이 우리의 이 노래가 구원의 즐거움을 가진 기쁨의 노래여야 합니다.
3. 기도생활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이미 7장에서 이들이 인침을 받음 사건에서 했던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항상 기도생활에 충실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거룩한 성도가 됩니다. 성령 충만은 여러 방향에서 오지만 특히 기도가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 기도생활이 부족하면 성화의 깨끗한 옷에 때가 묻을 수 있습니다.
4. 연단을 통해 하나님께 철저히 순복함을 배워야 합니다.
이 말씀 역시 계7:14에서 설명한 바 있듯이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온 자로서 어린양의 피로 씻음을 받은 흰옷 입은 자들입니다.
단12:10에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의 시련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성도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아 결코 낙심하지 말고 감사하며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그 연단이란 먼저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12:12-13에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나를 내려놓는 자기 십자가 지는 삶을 배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 상의 조건을 살펴보면 말씀과 성령과 연단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첫 열매인 성화적인 무리를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푯대 삼아 달려가라 하심입니다.
우리 모두 복음을 이해하고 그 복음에 굳게 서서 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 충만 받아 십 사만 사천인과 같은 찬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