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기법(16)-맥주 세 병 안주 하나
- 문단은 의장이다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글쓰기의 부정적인 전형은 법원의 판결문과 검찰의 공소장이 아닐까. 전문적인 법률용어가 많이 나오기도 하지만 문장이 길어 독자를 지루하게 한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십 쪽 분량의 글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뤄져 있었다. 문장이 끊어질 듯하면 ‘하였으며’ ‘하였고’ ‘한편’으로 이어진다. 이런 문장을 읽는 독자는 숨이 막힌다. 마치 비흡연자가 흡연실에 들어갈 때 느끼는 것처럼.
어느 해, 어느 세미나에서 필자는 21세기형 문화도시에서 문화는 삶의 질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선택조건이 아니라 일상적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필수절대조건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한 구청 소식지에 실린 아래 예문은 뒤엉켜 어디가 주어이고 어디가 술어인지 알기 어렵다. 문단의장이란 문장은 짧게 쓰고, 뜻은 깊게 하라는 말이다.
“대청봉이나 천왕봉처럼 웅장하거나 또 이름난 곳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는 가까운 곳에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예쁜 산이 있어 가슴이 답답할 때 언제든지 찾아와 온 천지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해를 보며, 또 아름답게 조용히 지는 석양을 보며 희망찬 새날을 기약할 수 있다면 우리의 또 다른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독자가 인내심을 갖고 한참 좇아가더라도 앞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장황하고 화려한 수식어 속을 헤매다 정작 중요한 의미를 놓쳐 버리고 만다. 미로 속을 걷는 느낌이다. 이쯤 되면 글을 쓴 사람은 자신의 뜻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겠다는 꿈을 접어야 한다. 독자가 둔하고 게을러 필자가 의도하는 바를 좇아오지 못한다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두 번, 세 번 읽어야 비로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쓴 사람의 책임이다. 10여 년 전 국내 신문기사의 한 문장 길이가 70자 안팎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요즘엔 이것도 길다는 지적이 나온다. 50자 안팎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문장을 길게 쓰는 것은 고질이다. 여간해선 잘 고쳐지지 않는다. 평소에 긴 문장을 두세 개로 나누는 연습을 하자. 불필요한 수식어를 없애는 것도 방법이다. 형용사·부사를 될 수 있으면 적게 쓰자. 예외 없는 법칙은 없는 법, 항상 짧은 문장이 읽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이 종을 부릅니다.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엄청난 빚이었습니다. 종은 돈이 없었습니다. 엎드려 빌었죠. 주인은 종을 용서합니다. 그 애절함 때문이었죠.” 음악의 스타카토를 연상시키는 글(신문 칼럼)이다. 간결하지만 단조롭고 딱딱하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어울린다.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필요와 상황에 맞추는 것이 자연스럽다. 가장 짧은 명문의 본보기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선거 표어인 「아이 라이크 아이크」일 것이다. 더 이상 짧을 수 없고 더 이상 그 완벽할 수 없는 구조이다. 세 단어로 된 문장이지만 글자 종류를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like의 알파벳 넉 자 속에 l like ike의 모든 글자가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네 글자만 가지고 한 문장을 만들어낸 셈이다. 그러면서도 그 짧은 글 속에 두운:initial rhyme, 흉운:internal rhyme, 그리고 말운:end rhyme의 다양하고 절묘한 운율이 모두 들어 있다. 「아이」의 두운은 「아이크」의 「아이」와 짝을 이루고 동시에 「라이크」의 흉운과 겹쳐진다. 「라이크」는 또 「아이크」의 말운과 맞물려 있다. 소리와 의 미가 마치 메아리처럼 얽히면서 짧은 문장 속에 변화와 반복, 차이성과 동일성을 준다.
그래서 누구나 이 표어를 한번 들으면 평생 동안 잊혀지지 않게 된다. 명문이란 외우려고 해서 외워지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머리 속에 가슴속에 각인된다. 희랍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말을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다. 이 표어를 가슴속에 달고 다닌 아이젠하워의 선거원들이나 유권자들은 진실로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