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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최선의 선택 (눅 10:38-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시간에 “최선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두루미와 백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흙 바닥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달팽이를 찾고 있는 두루미에게 천사 같은 백조가 날아왔습니다.흰 날개를 가진 그 찬란한 모습에 놀란 두루미가 물었습니다.“너, 어디서 왔니?” “하늘에서 왔지.”“하늘이 어디 있니?”“오,넌 하늘에 대해 듣지 못했구나.” 그래서 백조는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을 감동적인 말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두루미는 부러워하며 “아, 나도 그런 곳에 가고 싶다. 그곳에 가면 달팽이도 많이 있겠지?” “아니, 그건 없어.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가득하지.” 그러자 두루미는 흥미 없다는 듯 다시금 진흙 바닥을 따라 달팽이를 찾으면서 말합니다. “너나 하늘에 가서 살아라. 나는 달팽이가 있는 이 진흙 바닥이 좋단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이 있는데도 그보다 땅에 것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가치관의 혼란입니다.
그래서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암 템풀은 이 세상 가치관의 혼란을 비유하기를 “이 세상은 마치 어떤 장난꾼이 남의 상점에 들어가서 쇼윈도에 벌여놓은 상품들의 정가표를 모두 바꾸어놓은 현상과 같다. 그 장난꾼은 비싼 물건에는 낮은 가격표를 붙여놓고 반대로 싼 물건에는 높은 가격표를 붙여놓았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고 헛된 것을 위해 일생을 허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52:2) 외쳤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다 같은 신앙이지만 더 좋은 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마르다의 일도 귀하지만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좋지만 더 좋은 최선의 선택이 있습니다.
그럼 보다 더 좋은 최선의 선택은 어떤 것일까요?
1. 더 좋은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눅12:22-31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의식주만큼 귀한 것이 있을까요? 없으면 당장 굶어죽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 나라에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살 곳도 풍부하고 온갖 부요와 행복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의, 즉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은혜 받고 바로 살면 하나님께서 모든 저주를 다 물리쳐 주시고 우리를 복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물을 구하는 것보다 샘을 구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갈렙의 사위 옷니엘이 갈렙에게 샘을 구했습니다. 사람들이 축복의 열매만 구하지 축복의 나무를 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축복의 나무가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그래서 신28:1-6에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주의 풍요를 구하기 전에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늘 은혜 받고 예수 잘 믿는데 힘쓰란 말입니다. 알고 보면 복 받기 쉽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준대로만 하면 됩니다. 솔로몬의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은지라 구하지 않은 것까지 다 주셨습니다. 순서가 거꾸로 되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의식주보다 돈보다 무엇보다 더 귀한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2. 더 좋은 것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우리에게 가족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내 가족보다 더 귀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아들 딸 손자 손녀 가족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극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고 물으니 가족을 생각하며 이겨나간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고 있지만 나 때문에 가족들이 산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고난도 다 이길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신자가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족보다 더 사랑해야 할 분이 계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와 우애하고 자녀들을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귀해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이 첫째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족을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족이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가족에게 복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가족을 사랑하는 비결은 하나님 잘 경외하여 하나님으로 내 가족을 사랑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20:3-6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셨습니다.
가족사진도 좋지만 가족사진은 잊지 않을 만큼 몇 장만 붙이고 대신에 말씀을 많이 걸어놓으세요. 신6:6-9에 “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했어요. 내 가족이 안 된다면 내 잘못 때문이라 생각하시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3. 더 좋은 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바로가 아들이 없어 왕이 될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라면서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노예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힘쓰다가 라이벌인 후궁의 아들에게 밀려나는 일을 당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그 찬란한 애굽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같이함을 더 기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버지께서 주신 복을 받아 몸도 마음도 머리도 조용하고 편안하고 즐겁게 사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우리보다 더 낮은 곳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보다 더 좋습니다. 마25:40에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관심 갖는 곳에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더 넓은 집에서 더 윤택하게 살 수 있는데 좁은 집을 떠나지 않는 대신 이웃을 동정하고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선교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살 수 있지만 예수 때문에 가난하고, 우리가 편할 수 있지만 예수 때문에 불편하기를 기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 일하면 누구보다 잘 살 수 있지만 십자가 지고 목양으로 나간 것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임마누엘하셔서 더 큰 행복을 우리에게 안겨다 주시기 때문입니다. 막10:29-30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주를 위해서 산 사람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어찌 버리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쁨만 된다면 하늘의 상과 마음의 기쁨은 물론 지상의 형통으로도 100배 이상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심고 많은 것을 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 더 좋은 것은 주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눅10:39-42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가 마르다보다 더 좋은 편을 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봉사도 좋지만 먼저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말씀 없이 봉사하면 며칠 봉사할까요? 마르다처럼 말씀이 없으면 짜증내고 불평하고 힘들어 합니다. 말씀이 없으면 자기 인정으로 하다가 인정 떨어지면 하다가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잘 무장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탄탄한 신앙이 밑받침해주기 때문에 일을 해도 보람 있게 하고 짜증 내지 않고 큰 업적을 남겨도 교만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게 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마르다 보다 더 귀하게 옥합을 깨뜨려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봉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말씀을 무엇보다 더 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묶어서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말씀 잘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확신에 설 수 있고 이단에게 미혹되지 않으며 신령한 영적인 삶을 배우게 됩니다. 주일낮 말씀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주일낮에는 대중설교하다 보니 성경을 풀어 가르쳐 주는 진짜 진수는 전달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대접하는 것 중에 주님의 발아래서 겸손히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잘 대접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겸손하고 경외하는 바른 자세 가지고 사모한다면 그 신앙만큼 빨리 자랄 수 있는 신앙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가치의 혼란에 빠지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더 좋은 것을 취하하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십시다. 천하보다 더 귀한 것, 의식주보다 더 귀한 것, 가족보다 더 귀한 것, 편안함보다 더 귀한 것, 대접보다 더 귀한 것, 그것은 예수 믿고 하나님 잘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주의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좋은 것보다 더 좋은 최선의 선택을 통하여 더욱 행복하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