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이른 아침, 늦가을 가랑비가 짙게 내리고 간간이 얇은 바람이 더하여 아침 산책을 불편하게 하는 그런 날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신라대학교 평생교육원 ‘Well-being 명리학 교실’ 담당 교수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반 학우의 어머님이 ‘광안 좋은 병원’에서 운명하셨다고···.
5일 전 문병을, 갔을 때만 해도 오른쪽 다리의 골절상으로 입원한 지 며칠 되었다는데, 곧 완쾌될 것으로, 믿어졌다. 병원 측 현대의학의 눈부신 의술을 신뢰했으며 가족들의 간병 또한 정성이 지극하였다. 1929년 11월 13일 육사 시대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2018년 10월 3일 새벽 3시 운명을 하시고야 말았다. 만 구십 세 생일을 1개월 10일을 남겨둔 채···.
우선 동급생인 상수에게 전화로 애도의 인사를 전했다. 21세기 우리의 생활이 참으로 간편하고 편리해졌다. 부고장을 쓰고 우체국을 이용하는 등 번거로운 절차도 필요가 없으며 시골이라도 사람을 보낼 이유도 없어졌다.
명조를 풀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배운 것을 기초로 하여 하나하나 들어갔다. 그러나 내 실력이 유치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학우의 모친이 운명하심에 공부를 앞세우는 내 마음이 별로 환자가 편치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 年, 月, 日, 時의 명조에 신경이 쓰이곤 한다. 왜 이럴까, 좀 더 확실한 사주풀이를 연마하려는 나의 욕심 때문이라 생각을 하며···.
장례예식이 끝나고 배정된 8번 화구 앞으로 운구할 때는 가족과 친지들의 통곡이 이어졌다. 화구는 모두 15개 문으로 되어있고, 약 2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시신이 들어와 계속해서 화장하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영정 앞에서 애모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상주들 애별이고의 애절함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영정사진을 모시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상주들의 안색이 매우 수수롭고 서러움에 눈시울이 벌겋게 부은 유족들, 장례식을 엄숙히 지켜보는 문상객들,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사람, 수심에 차 넋을 잃은 사람, 모두가 생전의 고인의 정을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슬픔에 잠긴 표정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희로애락의 각축을 다투다가 한 웅큼 부토로 돌아가 생로병사의 여정으로 마치게 되는 것을 실감하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스스로 체험하는 장례식장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교훈을 받는다.
사람은 죽어서도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요즈음 Well-dying이란 용어가 유행하고 있다. 죽음 앞에서 당당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자식과 주위에 부담을 주지 않는 사전 준비가 필요한 세상이다. 영구차, 관, 수위, 봉안함 등의 약 70여 가지의 장례용품이 규격과 질의 상하로 구분하여 최저 약 오백여만 원에서 사정에 따라 수천만 원이 드는 돈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요즈음 노인들의 Well-dying이요 마지막 삶의 가치라는 새로운 용어가 노인들의 ‘998834’에 뒤이어 나온 유행어가 되고 말았다.
우리 반은 모두 나이 든 성인들의 교실이다. 최저 30대에서 80대까지의 성인 교육장으로 주로 명리학, 풍수지리 등 사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울산 도사, 김해 도사 등 이미 개업을 하여 성업 중에, 있는 역술가들이 더 배우고 숙련하기 위해 학교에 오는 분들도 있다. 과거야 어쨌든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과거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고, 현재 없는 미래 또한 없을 것이다. 흘러간 대운과 세운을 잘, 정돈하고 다가올 미래를 ‘명리학’이라는 학문에 근거하여 예측하며 많은 사람에게 실망 대신에 희망을 안겨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며, 흉 운을 피하여 길운으로 유도하는 인생살이의 길잡이가 되려고 모두가 열심히 공부한다.
기당 선생의 어머님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아오셨다. 우리나라가 살아온 세월의 강은 망국의 비운을 당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비참하기 그지없는 참혹한 시기였다. 그 힘든, 때에 우리 어머님은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1919-1945년 일제 강점기 그때는 농사를 지었지만, 알곡식은 모두 빼앗기고 보릿고개에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빈곤과 무지의 시대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어도 농촌에는 신문, 전화, TV도 없던 깜깜한 시기였다. 차가운 가을이면 달이 유난히도 밝았다. 논밭에는 찬 바람 쌩쌩 부는 겨울을 이기고 연둣빛 보리가 자라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차가운 겨울밤 등잔불을 밝히고 홀로 식구들의 옷을 만드는 바느질을 하셨다.
시골 농가는 무척 가난하였다. 하루 세끼 쌀밥을 먹는 집은 드물었고, 가을 추수 이후 잠시가 지나면 밥은 쌀과 보리가 반반이고 수제비도 자주 먹었다. 보릿고개가 다가오면 보리쌀 밥도 모자라서 해초와 산나물 등으로 죽을 끓여 연명하곤 하였다. 그 어려운 시절에 1남 1녀를 훌륭하게 가르치고 길러주신 우리들의 어머님, 실상으로 잘 내색하지 않으셨다. 떳떳한 대한의 어머니로 살아오셨다.
부산의 동해남부선 바닷가에도 태풍 ‘카레이’의 위세가 영향을 미치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매우 거칠다. 바위 사이로 부딪치는 칼바람이 되어 우산을 날려버리고 사람이 움직이기 매우 불편한 상태다. 바위에, 부딪치는 거대한 물 더미가 너울성 파도가 되어 하얗게 부서지며 밀려오고 또 밀려간다. 괴성을 지르면서 쏴쏴 철석···.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가만두지 않고, 부모님께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님이 기다려 주지 않는다’. 부모님의 머리 위에 내린 흰 눈은, 봄바람이 불어와도 녹지를 않는다. ‘靑山 古令同이요 人心은 朝夕變’이란 옛 시인의 글귀를 생각하며 그 속에 사람이 나고 멸하며 시간을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