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식일학교 장년교과 보충교재(예언의 신 인용구들/Ellen G. White Notes)
(1) 이 자료는 대총회 안교부가 매기마다 안교 장년교과와 함께 매일의 공부 내용과 연결하여 새로운 통찰력과 신선한 관점을 얻도록 돕기 위해 출판하는 보충교재 [Ellen G. White Notes for the Sabbath School Lessons]-예언의 신 인용구들을 한글판으로 바꾼 것입니다. (아직 한글번역본이 없는 예언의 신 인용구는 게시자가 번역함)
(2) [활용방법] 매일의 교과를 공부한 후, 그날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결하여 묵상하면 큰 유익이 됩니다.
<2024년 3기 – 마가복음>
제5과 갈릴리 호수의 이적들
(Miracles Around the Lake)
<7월 27일/안, 서론>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사탄은 자신의 통치권을 반박하기 위하여 하늘의 사명을 가지고 한 분이 강림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새로 나신 왕의 권위를 증거하는 천사의 기별을 듣고 떨었다. 사탄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자로서 하늘에서 가지셨던 지위를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다는 사실은 그를 놀람과 염려로 가득 채웠다. 그는 이 큰 희생의 신비를 측량할 수 없었다. 그의 이기적인 정신으로는 기만당한 인류를 위한 이러한 사랑을 깨달을 수 없었다. 하늘의 영광과 평화 그리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쁨은 사람들에게는 희미하게만 이해되었으나 덮는 그룹이었던 루시퍼는 이런 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잃어버렸으므로 다른 이들을 자기처럼 타락시킴으로 복수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하늘의 사물들을 과소평가하고 마음을 세상의 사물에 몰두하게 함으로 이 일을 성취하려고 하였다.(소망, 115-116)
◎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필요한 것들을 그분의 것으로 여기셨다. 하나님과 일체이셨던 그분은 결코 끊을 수 없는 줄로 그분 자신을 인류에게 붙들어 매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히 2:11)신다. 그분은 아버지 보좌 앞에서 인성을 쓰신 우리의 희생제물이시요 우리의 중보자시요 우리의 맏형님이시요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그분의 구속하신 인류와 일체가 되신 인자이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류를 멸망과 죄의 타락에서 건져내시고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해 거룩한 기쁨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었다. …
이러한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하늘나라 왕의 자녀! 귀한 허락! 이는 가장 깊이 명상할 제목이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케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을 십자가에 비추어서 연구할수록 그분의 자비와 온유, 공평과 의로 섞인 용서를 깨닫게 되며,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을 더 분명하게 분별하게 된다. (정로, 14~15)
◎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그분 안에 있던 생명을 찾으시기 위하여 무덤에서 나오셨다. 인성은 죽었으나 신성은 죽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신성으로 사망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셨다. 주님께서는 그분 안에 그분의 원하는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생명을 갖고 계신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모든 피조물이 생존한다. 피조물들은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받는 자들이다. 아무리 능하고 재능이 많으며 아무리 능력이 큰 자일지라도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력을 재공급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샘이요 원천이시다. 오직 불멸의 생명을 가지고 빛과 생명 가운데 거하시는 분만이 “나는 [나의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요 10:18)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 (1기별, 301)
<7월 28일/일, 폭풍을 잠잠하게 하심>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데 열중한 그들[제자들]은 예수께서 배에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저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죽음만이 앞에 놓인 것을 깨닫게 되자 저들은 누구의 명령으로 바다를 횡단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던가를 기억하였다.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에게 있었다. …
갑자기 번갯불이 암흑을 꿰뚫자 그들은 예수께서 그 소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워 주무시는 것을 보았다. … 눈부신 번갯불이 그분을 비췄을 때 그들은 하늘의 평화가 그분의 얼굴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분의 시선에서 자아를 잊은 부드러운 사랑을 느끼자 마음을 그분께로 향하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
그같이 부르짖은 영혼은 결코 무시당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최후의 노력을 다하기 위하여 그들의 노를 붙잡을 때 태풍은 격노하고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서신다. … 그분께서는 자비의 봉사에 그토록 자주 쓰셨던 손을 드시고 성난 바다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말씀하신다. …
예수께서 믿음으로 아버지의 보호 안에서 쉬신 것처럼 우리도 구주의 보호 안에서 쉬어야 한다. (소망, 334~336)
◎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통어하시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아신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도 잘 알지 못하지만,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히 4:13) 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혼란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좌정해 계실지라도 만물은 그분의 거룩한 눈앞에 드러나 있다. 그리하여 영원 전부터 그분께서는 그분의 섭리가 가장 좋다고 여기시는 대로 명령하신다.
한 마리의 참새도 아버지의 주목을 받지 않고 땅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다. 사탄은 하나님께 대한 증오 때문에 말못하는 생물들을 죽이는 데서 기쁨을 얻는다. 새들이 기쁜 노래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보존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 (8증언, 272-273)
◎ 우리의 거룩한 주님께서는 어떠한 비상사태에도 동일한 분이시다. 그분께는 불가능한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분은 극기와 희생의 생애를 사심으로, 또한 고통의 죽음을 당함으로 우리를 위한 그분의 위대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대의 모습 그대로를 그리스도께 나아가라. … 그대 자신을 온전히 그분의 자비하심에 위탁하라. 그분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있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난폭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의 난폭한 폭풍을 잔잔케 하신 그분은 번민을 당하는 그 마음을 향해 “잔잔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의 보호하심에 내어 맡긴다면 그리스도께서 정복하실 수 없으리만큼 반역적인 성질은 있을 수 없으며 성질이 아무리 난폭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잔잔케 하실 수 없으리만큼 난폭할 수는 없다.
예수님께 그의 심령을 위탁한 자는 실망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능력이 많으신 구주를 모시고 있다. 그대의 믿음의 주장자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그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46:1~2). (하늘에, 17)
<7월 29일/월, 울부짖음에 숨겨진 간구를 들으시는가>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예수님의 명령으로 사귀들은 그들의 포로들에게서 떠나가고 그 사람들은 조용하고 온순하고 정신이 똑바르게 되어 구주의 발아래 앉았다. 그러나 그 사귀들은 돼지 떼를 몰아 바다 가운데로 들어가도록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그러자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축복보다 그 손실이 더 크다 하여 거룩한 치료자 되신 예수님을 떠나가도록 강요했다. 이것이 사탄이 얻고자 했던 결과였다. 그들의 손실에 대한 책임을 예수님께 돌림으로 사탄은 사람들에게 이기적 공포심을 일으켜서 그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사탄은 손실, 불행, 고난의 원인을 그와 그의 부하들에게 돌리는 대신에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그 원인인 것처럼 비난받게 한다. …
이 사건은 제자들에게 인류와 짐승들에게 나타나는 잔인한 사탄의 세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구주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만나게 될 원수가 어떤 자들임을 알고 그 간계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를 원하셨다. 또한 그 지방 사람들이 사탄의 속박을 깨뜨리고 그에게 포로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는 그분의 위력을 보게 하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다. 비록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셨지만 그처럼 놀라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의 긍휼을 전파하기 위해 거기에 남아 있었다.(쟁투, 514~515)
◎ 비록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예수께서는 그들이 선택한 흑암 가운데 저들을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했을 때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거절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빛을 보내시되 듣기를 거절하지 않을 사람들을 통하여 하셨다.
돼지가 멸망 당하게 함으로 사람들이 구주로부터 떠나고 그 지방에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사건은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그 지방에서 일어나게 했고, 그리스도께로 주의를 집중시켰다. 비록 구주께서는 떠나셨지만 그분이 고쳐주신 그 사람들은 그분의 능력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남아 있었다. 흑암의 왕의 수단이 되었던 사람들이 빛의 통로가 되고 하나님 아들의 사자(使者)들이 되었다. 예수께서 데가볼리로 돌아오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사흘 동안 그 주위의 모든 동네에서 모여든 수 많은사람이 구원의 기별을 들었다.(치료, 98~99)
◎ 모든 영혼의 힘은 하나님 안에 있고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평온함과 신뢰는 그들의 심령을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사람의 힘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 대해 일시적인 관심이 아니라 어머니가 자녀를 대하는 것보다 더욱 강력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 … 우리 구주께서는 인간적인 고통과 슬픔에 의해, 모욕과 비난과 능욕과 조소와 거절과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 죄 값을 갚으시고 우리를 사셨다. 그분은 두려워 떨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그대를 지켜보고 계시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다. … 우리의 인간적인 연약함은 하늘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의 통로를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중재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들과 딸, 77)
<7월 30일/화, 예수님과 함께 탄 롤러코스터>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예수께서는 바닷가에서 얼마 동안 머무르면서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다가 연회석에서 세리들을 만나기 위하여 레위 마태의 집으로 향하셨다. 회당장 야이로가 여기에서 그분을 만났다.
이 유대인 장로는 심히 슬퍼하며 예수께 나아와 발아래 엎드려 부르짖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예수께서는 즉시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을 향하여 출발하셨다. 제자들은 그분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일을 매우 많이 보았지만 오만한 “랍비”의 간원에 응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소망, 342)
◎ 군중을 뚫고 나가시는 중에 구주께서는 앓는 여자가 서 있는 곳 가까이 이르셨다. 그 여자는 주님께 접근하고자 거듭거듭 애를 써 보았지마는 헛수고였다. 드디어 그 여자에게 기회가 왔다. 여자는 그분에게 이야기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는 천천히 걸어가시는 주님의 앞길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그분의 겉옷을 만져서 나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병고칠 기회를 놓칠까 염려한 나머지 앞으로 나갔다. …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자의 마음을 다 아시고 여자가 서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그분은 그 여자의 큰 필요를 깨닫고, 그녀가 믿음을 행사하도록 도와주신 것이다.
그분께서 지나가시자 그 여자는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겉옷 자락을 간신히 만지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여자는 나은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그 한 번의 만짐에 그 여자의 일생의 믿음이 집중되었다. 즉시 고통과 질병은 사라졌다. (치료, 59~60)
◎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자신이 그 진상을 몰라서 [“누가 나를 만졌느냐?”] 물으신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 제자들과 그 여자에게 줄 교훈이 있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희망으로 격려하고자 하셨다. 치료의 능력을 가져온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를 원하셨다. 그 여자의 믿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쳐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의 감사의 간증을 통해 영광을 받으셔야만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자의 믿음의 행위를 그분이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그녀가 깨닫기를 바라셨다. 그분께서는 다만 절반쯤 축복한 채 그 여자를 보내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 여자는 자기의 고통을 주님께서 알고 계셨다는 것과, 그분께 나오는 모든 사람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과 능력을 믿는 그의 믿음을 그분께서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것을 깨닫고, 그 여자는 떨면서 앞으로 나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 여자는 감사의 눈물을 머금고 모든 사람 앞에서 그분의 겉옷을 만진 이유와 만진 즉시 고침을 받은 자초지종을 그분께 말씀드렸다. 그 여자는 그분의 겉옷을 만진 것이 일종의 참람된 행위가 아니었는지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입에서는 한 마디의 책망도 나오지 않았다. … 그분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8:48)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그녀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을까? 이제 그녀의 기쁨을 한층 더 비참하게 만들었던 공포감은 사라졌다. (치료, 60-61)
<7월 31일/수, 배척과 영접> 예언의 신 보충자료
◎ 회당에서 청중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은 그들의 독선을 뿌리째 흔들고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났으며 그분의 백성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상실되었다는 그 쓰라린 진리를 그들에게 역설하셨다. 그들의 참된 상태를 칼처럼 잘라놓는 모든 말씀이 그들 앞에 제시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수께서 처음에 그들을 고무시켰던 믿음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가난과 비천함에서 일어난 그분이 보통 인간 이상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불신은 악의(惡意)를 낳았다. 사탄이 그들을 지배하였으며 그들은 분노하고 구주를 대적하여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사명을 가지신 구주께로부터 돌아섰다. 이제 그들은 파괴자의 속성을 드러냈다. (소망, 239~240)
◎ 제자들의 기별은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께서 친히 선포하신 “천국이 가까웠”다는 기별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께서 메시아이신지에 대하여 사람들과 논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께서 행하신 것과 같은 자비를 베푸는 일을 행할 것이었다. …
최초의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은 오로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야 할 것이었다. 그들이 만일 그 즉시로 이방인들이나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면 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저들의 감화를 상실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편견을 격발시킴으로 그들은 활동 시초부터 그들을 낙담시켰을 논쟁에 휘말려 들었을 것이다. 사도들까지도 복음이 모든 나라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디 깨달았다. 그들 자신이 이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활동할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만일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기별자들로 삼으실 계획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복음을 제일 먼저 들어야 했다. (소망, 350~351)
◎ 관원들이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은 예수님을 즐겨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분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분이었다. 그들은 그분의 진지한, 자아를 부정하는 생활에 의해 규제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세상이 주는 영예를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쫓았으며, 그분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분의 입술에서 은혜롭게 흘러나오는 말씀을 만끽했다. 그분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면서도 아주 단순했기 때문에 아무리 무지한 자들이라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탄과 그의 천사들은 유대인의 눈을 멀게 하고 그들의 이해력을 흐리게 했으며, 구주의 생명을 빼앗도록 백성의 우두머리와 관원들을 부추겼다. … 나는 지도자들과 장로들 중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사탄은 그들이 그렇다고 시인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백성의 비난을 더 두려워하였다.
그와같이 이 시점에 이를 때까지 사탄의 교활한 술책과 증오도 구속의 경륜을 깨뜨릴 수 없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룰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초기, 160~161)
<8월 1일/목, 대중의 기대와 다른 메시아>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그대의 마음속에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이 와 닿을 때 그대의 대답이 불신의 반응이 되지 않게 하라. 제자들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는 구주의 분부를 들었을 때 온갖 난관이 그들의 마음에 떠올랐다. 그들은 “우리가 양식을 사러 마을에 나갈 것인가?” 하고 질문했다. 그와 같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생명의 떡에 굶주리고 있을 때 주님의 자녀들은 “우리가 멀리 있는 어떤 사람을 초청하여 와서 이들을 먹이게 할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라고 하신 후 거기에서 그들을 먹이셨다. 그와 같이 그대가 곤궁한 영혼들에게 둘려 있을 때는 그리스도가 거기 계신 줄을 알라. 그분과 더불어 교통하라. 그대의 보리떡을 예수께 가져가라.
우리가 가진 재정이 사업을 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믿음으로 전진하면 풍성한 원천이 우리 앞에 공개될 것이다. 그 사업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면 그 일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그분께서 친히 재정을 준비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분을 정직하고 단순하게 의뢰하는 자에게 보답해 주실 것이다. … 우리가 받기 위하여 믿음의 손을 내밀고 모든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분께 나아갈 때 우리는 가장 절망적인 환경 아래서도 우리의 사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남에게 생명의 떡을 주게 될 것이다. (소망, 370~371)
◎ 물론 유한한 사람의 지력(知力)을 가지고 무한하신 분의 계획을 이해한다든가 그분의 목적이 성취되는 과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별을 이해하는 일에 그토록 우둔한 것은 그들의 잘못이나 게으름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종들까지도 사람들의 견해와 유전과 거짓 교훈 때문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 밝혀 주신 큰 사건들을 부분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구주께서 세상에 계실 당시의 제자들까지도 그러했다. 그들은 메시아께서 이 세상의 임금으로 오시면 이스라엘 나라가 온 세계를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일반 사람들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받으실 고난과 죽음을 예언한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쟁투, 344-345)
◎ 시간이 짧음을 고려할 때, 우리는 한 백성으로서 깨어서 기도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우리 앞에 있는 위대한 사건을 위해 준비하는 거룩한 사업에서 곁길로 나가서는 안 된다. 시간이 명백히 연장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은 그들의 언행에 있어서 부주의하고 무관심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위험을 알지 못하며, 그들 장래의 불멸의 생명을 위한 품성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인, 은혜의 기간을 연장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매 순간은 가장 고귀한 가치가 있다.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혼인 예복 없이 발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믿음과 거룩한 소망 가운데 빠르게 성취되는 예언의 도표를 따라가며, 진리에 순종함으로 자신들의 영혼을 정결케 하려고 노력하는 한 백성을 이 땅에 가지고 계신다. (4증언, 306~307)
<8월 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언의 신 보충자료
◎ “믿음으로 만짐” (소망, 342~348).
거라사에서 서쪽 해안에 돌아오신 예수께서는 그분을 영접하려고 모여 있는 군중을 보셨다. 그들은 그분을 기쁨으로 맞이하였다. 그분께서는 바닷가에서 얼마 동안 머무르면서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다가 연회석에서 세리들을 만나기 위하여 레위 마태의 집으로 향하셨다. 회당장 야이로가 여기에서 그분을 만났다.
이 유대인 장로는 심히 슬퍼하며 예수님께 나아와 발아래 엎드려 부르짖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예수께서는 즉시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을 향하여 출발하셨다. 제자들은 그분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일을 매우 많이 보았지만 오만한 “랍비”의 간원에 응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 주를 따랐고 사람들도 열심과 기대를 가지고 뒤따랐다.
회당장의 집은 멀지 않았으나 군중이 사방에서 그를 압박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그분의 동료들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걱정이 되는 아버지는 지체되는 것이 조마조마했으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께서는 때때로 멈추어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마음에 근심하는 자를 안위하셨다.
그들이 아직도 길을 가는 도중에 한 사자가 군중을 뚫고 나와서 야이로에게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였으므로 이제 주께 더 염려를 끼쳐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야이로는 군중을 밀치고 구주 곁에 더 바싹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급히 발을 옮겼다. 벌써 그곳엔 곡하는 사람들과 피리 부는 사람들이 와 있어서 그들의 떠드는 소리가 공중에 사무쳤다. 무리가 모여 있는 것과 떠드는 소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거슬리게 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을 잠잠하게 하려고 하셨다. 그들은 이 외인의 말에 성이 났다. 그들은 아이가 죽는 것을 보았으므로 그분을 멸시하고 조롱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집에서 떠나도록 요구하신 후에 소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를 데리시고 시체가 있는 방으로 함께 들어가셨다.
예수께서는 침대 곁에 가까이 가셔서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소녀의 집에서 흔히 쓰는 말로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의식이 없는 몸에 즉시 가느다란 움직임이 지나갔다. 생명의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하였다. 입술은 미소와 함께 열렸다. 소녀는 마치 잠에서 깬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소녀는 일어났다. 그의 부모는 팔로 딸을 꼭 껴안고 기쁨의 울음을 터뜨렸다.
예수께서는 야이로의 집으로 오는 도중에 십이 년 동안 질병 때문에 괴로운 생애를 살아온 불쌍한 여인을 군중 가운데서 만나셨다. 그 여자는 모든 재산을 치료하느라 의사에게 다 바쳤으나 불치라는 선고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치료의 소식을 듣자 그 여자의 소망은 되살아났다. 그 여자는 그분께 갈 수만 있다면 고침을 받으리라고 확신하였다. 그 여자는 허약하고 괴로운 중에도 그분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해변에 나와서 군중을 뚫고 들어가려고 노력하였으나 허사였다. 그 여자는 다시 레위 마태의 집에서 예수님을 따랐으나 여전히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다. 그 여자가 거의 절망하게 되었을 때 그분께서 무리를 헤치고 그 여자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셨다.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 여자는 드디어 크신 의원이신 앞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혼란 속에서 그분의 모습을 잠깐 스쳐보았을 뿐 그분에게 말할 수도 없었고 그분을 붙들 수도 없었다. 구조될 유일의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서 그 여자는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혼잣말로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라고 하였다. 그 여자는 그분께서 지나실 때 앞으로 나아가서 그분의 옷자락을 간신히 만지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여자는 자기가 나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한 번의 만짐에 그 여자의 일생의 믿음이 집중되었고 그 즉시 그 여자의 고통과 쇠약함은 완전한 건강의 활력으로 바뀌었다.
그 여자는 감사한 마음으로 군중 가운데서 물러 나오려고 하였다. 그때 예수께서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셨다. 따라오던 사람들도 그분과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예수께서 몸을 돌이켜 주위를 둘러보면서 군중 속에서도 똑똑히 들리는 음성으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셨다. 사람들은 이 물음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분께서는 사방으로 난폭하게 떠밀리셨으므로 그렇게 질문하시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언제든지 말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베드로가 “주여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고 말하였다. 이에 예수께서는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구주께서는 믿음으로 만지는 것과 무관심한 군중의 우연한 접촉을 구별하셨다. 이런 믿음을 아무런 언급 없이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미천한 여자에게 기쁨의 샘이 될 안위의 말씀, 세상 끝 날 때까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축복이 될 말씀을 하기를 원하셨다.
예수께서는 여자를 바라보면서 누가 자기를 만졌는지 꼭 알려고 하셨다. 숨길 수 없음을 알자, 그 여자는 떨면서 앞으로 나와 그분의 발아래 엎드렸다. 그 여자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고통당한 이야기와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가를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부드럽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옷을 만지는 행위만으로도 치유하는 능력이 나온다고 주장하는 미신이 생겨날 기회를 허용하지 않으셨다. 치료가 이루어진 것은 그분과의 외적인 접촉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그분의 거룩하신 능력을 붙잡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주위에 가까이 밀려다니며 경탄하던 군중은 생명의 능력에 접근해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그 여인은 고침을 받으리라고 믿고 손을 내밀어 그분을 만졌을 때 치유의 능력을 체험하였다. 영적 사물도 그와 같다. 신앙에 관하여 경박하게 말하거나 주린 심령과 산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를 단순히 세상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믿음은 결코 심령에 치유(治癒)를 가져올 수 없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진리에 대한 단순한 지식인 동의가 아니다. 온갖 것을 알기까지 믿음을 활용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유일한 믿음은 곧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것, 곧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 믿음이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한 의견으로 여긴다. 구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언약 관계를 통하여 자신들을 하나님과 결합시키는 거래이다. 진정한 믿음은 생명이다. 산 믿음은 활력의 증가, 의지하는 신뢰를 의미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혼은 정복하는 능력자가 된다.
여인을 고치신 후에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자신이 받은 축복을 고백하기를 원하셨다. 복음이 가져다주는 선물은 몰래 보존하거나 은밀히 즐겨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이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고백하라고 요구하신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43:12).
그분의 미쁘심을 우리가 선전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하늘이 선택한 수단이다. 우리는 옛날의 성인들을 통하여 알려진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효력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 대한 증언이다. 우리는 자신 속에 있는 하늘 능력의 역사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증인들이다. 각 개인은 모든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생애를 살며 본질적으로 그들과는 다른 경험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개성으로 특징지어진 찬송을 그분께 상달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가 밑받침이 될 때 하나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귀중한 고백은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는 강력한 능력이 된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기 위하여 예수께 나왔을 때 그분께서는 가서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명령하셨다. 그들은 가는 도중에 고침을 받았으나 그중에 오직 한 사람만 돌아와서 그분께 영광을 돌렸다. 다른 문둥병자들은 그들을 낫게 하여 주신 그분을 잊어버리고 저희 갈 길을 가 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직도 이와 똑같은 일을 행하고 있는가! 주께서는 인류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신다. 그분은 늘 그분의 은사를 제공하고 계신다. 그분은 병상에서 신음하는 병자를 일으키며 그들이 보지 못하는 위험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하늘의 천사들에게는 저들을 재난에서 건지고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시 91:6)에서 보호하라고 분부하시건만 저들의 마음은 감명받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모든 부요를 주셨건만 그들은 그분의 크신 사랑에 무관심하다. 배은망덕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마음을 닫는다. 그들의 심령은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사람들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한다.
하나님의 모든 선물을 우리 기억에 생생하게 보존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그리하여 믿음은 더욱더 많이 요구하고 받아들이도록 강화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믿음과 경험에 대해서 읽을 수 있는 모든 기사 가운데서 보다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받은 가장 적은 축복 가운데서 더 많은 격려를 얻는다.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사람은 물 댄 정원과 같다. 그의 치료는 급속할 것이며 그의 빛은 흑암 중에서 빛날 것이며 주의 영광이 그에게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자비와 그 많은 긍휼을 기억하도록 하자. 이스라엘 백성처럼 증거의 돌비를 세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귀한 이야기를 그 돌에 새기자. 그리하여 주께서 우리의 순례길에서 우리를 취급하신 일들을 돌아보고 감사함이 충만한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 116:12~14)라고 말하자.
◎ “화평하게” (오늘 나의 삶, 336).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우리는 해협을 가로질러 덴마크의 해변으로 데려다 줄 작은 배에 올라탔다. 소파 두 개가 놓여 있고 무거운 커튼이 쳐진 객실이 제공되었는 데, 여섯 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당일 여행에는 거의 필요 없는 편의 시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싹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 육지에 닿기 전에 벌어졌다. 첫 한 시간 동안은 쾌적하고 편리하게 꾸며 놓은 갑판 위의 여성 전용 선실에 있었다. 날씨도 쾌청하고 바다도 잔잔해 즐거운 여행이 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얼마 뒤 선장이 선실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거센 물결이 다가오니 즉시 아래로 내려가 누워 있으라고 충고했다. 우리는 마지못해 그의 말을 따랐다. 잠시 후 배는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고 우리는 소파 위에서 거의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나는 몸 상태가 나빠져 마치 무서운 질병과 싸우는 사람처럼 땀을 비 오듯 흘렸고 죽을 것 같은 뱃멀미가 곧 몰려왔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듯했다. 하지만 예수님을 굳게 믿고 그분의 손에 매달리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를 쥐락펴락하시는 그분은 폭풍에서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집채만 한 파도라도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라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순종한다. 맹렬한 갈릴리 바다를 잔잔케 하시면서 제자들의 두려움을 진정시키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에게 할 일을 맡기신 분이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믿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분을 믿었더니 마음이 완전히 평화로워졌다.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매우 귀한 교훈을 얻었다. 살면서 겪는 시련마다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고 신뢰하도록 새로운 교훈을 가르쳐 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믿어도 좋다. 그리고 시련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전능하신 분의 손을 굳게 붙들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