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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종교 암흑시대의 도래(주후 1200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함
여러 세기 동안 수 만 명의 크리스챤들이 순교를 당했으나, 신앙과 기독교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순교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면 흘릴 수록 더 많은 크리스챤들이 생겨났다.
핍박과 고문과 죽음은 그리스도교를 없앨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을 피로 인쳤고, 그것으로 인하여 복음은 더 널리 전파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핍박의 시대가 지나가고 겉으로 볼 때 크리스챤들에게 평화스러운 듯이 보이는 시대가 도래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주후 312년경, 콘스탄틴이 로마의 황제로 등극하여 사용한 로마의 융화정책으로 온 변화 때문이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이교도들과 크리스챤들을 모두 수용하여 국가를 통합하려는 정책으로 그 자신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던 토요일 안식일을 이교도들이 태양신을 경배하던 일요일로 바꾸어 그 날을 공식적인 국가의 예배일로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명인 넷째 계명이 사람의 권한으로 바뀌어지는 일이 생겼다. 이런 일들과 함께 기독교에는 많은 이교의 가르침과 예배 형식이 스며들었고, 핍박을 받을 때는 순결하던 하나님의 교회는 세속과 타협하게 되었다.
또한 이 일은 사도 바울의 예언한 것처럼 법왕권의 일어남과 그것이 초래할 큰 배도에 대한 길을 열어주었고, 또 교회 안에 스며 들어온 오류들로 법왕권의 가르침이 더욱 확립되도록 만들었다. 일찍이 바울은 법왕권과 적그리스도에 관하여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살후 2:3,4)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계속하여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살후 2:7)다고 형제들에게 경고하였다.
이교의 관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양보와 순응주의적 정신은 교회가 이교 아래서 견뎌낸 맹렬한 박해로 말미암아 한동안 방지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박해가 그치고 그리스도교가 왕궁 안으로 들어가게 되자,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겸손한 단순성을 버리고 이교의 제사장이나 방백들의 교만과 허식을 따르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의 이론과 유전으로 대체시켰다. “불법의 비밀”은 처음에는 조금씩 비밀리에 진전되었으나, 나중에는 세력이 커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더욱 공공연하게 기만적이요, 참람된 교리를 진척시켰다.
로마 천주교의 등장과 세력
크리스챤들의 교회는 벌써 오래 전에 이교도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교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교리가 적당히 섞여진 채로 로마는 기독교 국가처럼 행세하였고, 고대제국의 영역 안에서 거의 모든 세계는 로마를 신앙의 지상도성으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6세기에 법왕권은 확고하게 확립되었다. 그의 권좌는 로마에 위치하게 되었고, 로마의 감독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공포되었다. 그들은 교황을 하늘의 가시적 중재자로 보았다. 이교는 그의 지위를 법왕에게 넘겨 주었다. 곧 용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계 13:2)를 준 것이다. 이리하여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예언된 1260 년간의 법왕권의 박해가 시작되었다(단 7:25; 계 13:5-7 참조). 이제 교회와교회의 의식, 감독, 성직자들을 위하여 세워진 듯한 로마는 크리스챤들을 다스리는 거대한 힘을 강화시켰으며, 교회는 교황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과 가장 높은 교회의 공직을 차지한 사람들을 폭군으로 만듦으로써 그 사명의 끝을 맺었다. 어느새 교황의 힘과 그가 임명한 사람들의 힘은 절대적이 되었고, 그들이 세운 교회의 법이나 의식을 항거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은 한치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성경적이고 본질적인 신앙을 지키는 크리스챤들은 억압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의 전권적 율형에 대항하여 감히 그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자마자 “이단”이 되었다.
교황권이 하나님의 법을 변경시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였던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면서 기독교회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는데, 이것을 기점으로 해서 수많은 정치인들과 이교도들이 황제의 뒤를 따라 그리스도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기독교회로 새로 개종한 황제는 이교도들의 반발을 막기 위하여 그들의 풍습과 전통인 우상을 만들어서 신전에 세우는 관습과, 그들이 태양신에게 예배 드리는 날을 기독교회가 수용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교황권의 지도자들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을 변경시킴으로써 황제의 요구를 수락하였던 것이다.
박해의 시초 - 믿는 자가 믿는 자를 핍박함
프랑스의 왈도파 : 이 사람들이 역사에서 가지게 된 “왈도파”라는 이름은 그들의 지도자 피터 왈도에게서 유래한다. 왈도는 리옹의 부한 상인이었는데, 그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복음은 이렇게 전해져야겠다고 생각한 대로, 즉 가장 성서적이고 그리스도의 원래의 가르침에 맞는 복음대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왈도에게는 많은 추종자들이 생겼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사용하기 위하여 신약성서를 프랑스어로 옮기었다. 그와 그의 설교자들은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삶을 살도록 권면하였고 그들을 성직자에게 데려오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으로 인도하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성서로 돌아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로마에 그 말이 전해지자 교황은 어떤 사람도 자기에게 먼저 그 특권을 받지 않고는 설교할 수 없다고 금지하는 명령을 보냈다. 그러나 왈도는 “나는 사람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복종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는 곧 출교당해 “이단자”가 되었고,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범법자로 여겨졌다. 로마 교황은 그런 무리들을 파괴하고 없애는 것은 크리스챤 교회가 전체적으로 나서서 협조할 의무라고 공포하고, 그들을 괴롭히고 박해하기 위해 여러가지 규정들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가 계속해서 증가하자, 그는 더 나아가 가지각색의 파문과 법규와 율령을 선포하였으므로 왈도파는 그 정부하에서는 어디에서고 안전을 기약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땅은 빼앗겼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를 당했으며 죽은 자들의 시체까지도 장례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가려고 하면 그들을 발견되는 대로 죽이라고 했다.
최초의 종교 재판관들
로마교회가 최초로 종교재판관들을 임명한 것은 왈도파와 그의 추종자들의 설교 때문이었다. 교황 이노쎈트 3세는 자신의 영향권 내에서는 사람들의 신앙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어떤 수도사들을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하여 이단의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하고 유죄 선고를 내리도록 하였다. 종교재판관들은 모든 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그들의 세력은 제한을 받지 않았고, 그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고소자들이 아무리 파렴치하여도 그들의 고소를 들었고, 가장 사랑스러운 친구나 친척도 종교 때문에 투옥된 사람은 이유없이 죽음과 고통을 당하여야 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왈도파나 또는 로마교회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성경을 그대로 따르는 독자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과 연관이 있다고 알려지면 그의 목숨과 재산은 끝장이었다.
종교재판소에서 일반적으로 집행되는 고문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 그곳에는 늘 무시무시한 살인도구들이 있었고 죄수들의 뼈와 사지를 늘어뜨려 어긋나게 하는데 쓰여지는 도르래와 밧줄, 뺀찌 등등 무서운 기구들이 있었는데, 몇 주일이고 고문을 하다가 결국에는 산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역사에 보면 스페인 세빌레 시에 세워진 종교재판소 소장으로 죽을 때까지 18년간 봉사한 토르크마다라는 성직자는 그의 임기 동안 10,220명이나 되는 사람을 산채로 불에 태워 죽였고, 97,322명의 재산을 몰수, 투옥시켰으며, 1808년 종교재판소가 파괴될 때까지 희생자의 수는 산채로 불에타죽은 사람이 31,912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웃지 못할 사실은, 그들이 이단자들을 이렇게 고문을 한 이유는 그들이 소위 말하는 이단(성경대로 믿는 기독교 신앙)을 믿는 사람들에게 고문을 가하여, 그들이 이단을 믿는 것을 포기하게 하여야 지옥이나 연옥에 가서 받을 형벌이 감해진다고 믿었으므로 그 고문이 이단자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피드몬트의 왈도파
A. 진리의 보전자들 ; 로마 천주교가 장기간에 걸쳐서 최상권을 잡고 있는 동안 이 세상은 암흑으로 덮여 있었지마는, 진리의 빛은 아주 소멸되지 않았다. 로마의 관할 밖에 있는 나라들에는 여러 세기 동안 법왕교의 부패에 전혀 감염되지 아니한 그리스도인 단체들이 있었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증인들,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이심을 확실히 믿고, 성경을 인생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고, 참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는 증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단자로 낙인이 찍히고, 그들의 동기는 비난을 받고, 그들의 품성은 중상을 받고, 그들의 저서들은 압수당하고 오전(誤傳)되고 삭제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굳게 서서 오는 세대를 위한 신성한 유업으로써 그들의 순결한 믿음을 대대로 물려가며 간직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표준으로 생각하고 성경에 있는 진리의 대부분을 고수해 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믿고 십계명 중의 넷째 계명인 참 안식일을 지켰다.
B. 암흑의 세력에 대항한 왈덴스인들 ; 이렇게 신실하게 신앙을 고수하며 법왕권의 침입을 저항한 사람들 중에서 왈도파 - “왈덴스인” (Waldenses)들이 최선봉에 섰다. 수백 년 동안 그들은 알프스 산맥 동부에 위치한 험한 산골짜기에서 피난처를 찾고 거기서 살았다. 그들은 법왕의 지위가 확립되어 있는 나라에 살면서도 그 허위와 부패를 꿋꿋이 저항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그들의 믿음의 순결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깊은 산골짜기나 험준한 산 속으로 피해 가서 거기서 자유로이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왈덴스”교도들이 몇 세기 동안 가르쳐 온 신앙은 로마로부터 나온 허위의 교리와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들의 종교적 신조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되었다. 세상과 차단된 궁벽한 곳에서 날마다 양떼를 치며 포도원을 가꾸는 매일의 고역에 시달리고 있는 비천한 그 농부들은 배교한 교회의 교리와 이설(異設)에 반대되는 진리를 자기들 스스로가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종교적 신조는 그들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C. 왈덴스인들의 신앙생활 ; 첩첩이 싸인 알프스 산악의 높은 성채들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박해를 받고 압박을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이 곳에서 중세기의 암흑을 뚫고 진리의 횃불이 계속하여 타올랐다. 후에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말틴 루터도 왈덴스인들의 가르침과 성경을 통하여 진리를 깨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 머리 위에 높이 솟아 불변의 위엄을 지니고 있는 산들을 자녀들에게 가리키면서 언제나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또는 그 말씀이 영구히 서 있는 묏부리처럼 영원하신 이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고생스러운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았고, 궁벽한 산중에 외로이 있으면서도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분노와 강포를 피할 수 있는 한 피난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경배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하였다. 때때로 원수들의 추격을 받았지만 험준한 그 산들이 견고한 산성이 되었다. 그들은 높은 절벽 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으나 로마의 군대들은 그들의 감사의 찬미를 침묵시킬 수 없었다.
D. 왈덴스인들의 교육사업 ; 왈덴스인들은 진리의 원칙을 집이나 토지나 친구나 친척이나, 심지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그뿐만 아니라 그 원칙들을 젊은이의 마음에 철저히 새겨 주기 위하여 학교를 세웠고, 그들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성경으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율법의 명령을 신성하게 여기도록 교육을 시켰다. 당시에는 성경의 사본이 매우 귀하였으므로 그들은 그 가운데 있는 귀중한 말씀들을 외웠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구약 성경의 여러 곳을 반복하여 암송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 중에 목사를 세워 젊은이들을 목사에게서 교육을 받게 했다. 그들은 일반적인 학문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중요한 과목으로 배웠다. 그들은 또한 성경을 복사하여 기록하는 일도 하였다. 그들은 불굴의 노력으로, 때로는 어둡고 깊은 동굴 속에서 횃불의 희미한 불빛 아래 한절 두절, 또 한장 두장 성경을 베끼어 나아갔다.
어떤 청년들은 그 산간의 학교로부터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도시들에 있는 교육 기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어느 학교로 가든지 함부로 비밀을 드러내는 그런 벗을 사귀지 않았다. 그들의 의복은 가장 귀중한 보물인 성경 사본(聖經寫本)을 감출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수고하여 필기한 성경 사본을 가지고 다니면서 기회가 있는 대로 의심을 받지 않을 만큼 주의하면서 진리를 갈망하는 자로 인정되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부분을 보여주었다. 참된 신앙으로 회개한 사람들이 이러한 학교 안에 생겨났으므로 이따금 믿음의 원칙이 온 학교에 보급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법왕교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세밀하게 조사를 할지라도 소위 부패케 하는 이단의 근원(根源)은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E. 왈덴스인들의 전도 ; 왈덴스인들은 유럽의 여러 백성들 중에서 최초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수백 년 전에 벌써 자국어로 필사(筆寫)한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더욱 증오와 박해의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로마교회를 요한계시록에 있는 타락한 바벨론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암흑과 배교의 전 기간을 통하여 로마교의 최상권을 부인하고 성상(聖像) 숭배를 우상 숭배로 보고 거부하고 참 안식일을 지켰다. 그들은 가장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그들의 믿음을 유지하였다. 비록 창에 찔리고 로마의 화형주(火刑柱)에 타 죽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두려움 없이 굳게 섰다.
또한 왈덴스인들은 그들이 밤새워 베껴 손수 만든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러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먼 길을 가곤 했다. 그들은 그 당시에 먼 곳에 있는 시장에 가지 않으면 쉽사리 얻을 수 없는 비단과 보석과 그 밖의 물품들을 가지고 다녔는데, 선교사로서 가면 추방당할 곳이라도 행상인으로 갔으므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세밀히 필사한 성경의 전부 혹은 일부분을 가지고 다니면서 기회를 얻을 때는 언제나 그것을 끄집어 내어 그들의 고객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자 하는 흥미가 일깨워졌으며 성경의 사본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어떤 부분을 즐거운 마음으로 주었다. 이런 활동으로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교회가 생기고, 순교자들의 피가 진리를 증거하게 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참된 복음을 몰랐고, 구원을 받기 위하여 자기들의 선행을 의지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들의 죄 많은 상태와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자신들을 보고 심신(心身)을 괴롭게 하였으나 마음의 평안은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양심적인 사람들은 로마교의 교리에 얽매이게 되었고 그들은 죄의식으로 압박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시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감으로 늘 번뇌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왈덴스인들은 이처럼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을 나누어 주고,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는 평안의 기쁨을 알려 주고, 그들의 유일한 구원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었다. 이리하여 진리의 빛은 암흑에 쌓여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추어지고, 어두운 구름은 사라져 버리고, 마침내 치료하는 광선을 가진 의의 태양이 그들의 마음에 떠오르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로마교의 주장이 그릇된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죄인을 위하여 사람이나 천사의 중보가 참으로 무익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구주의 사랑의 보증을 받고 그처럼 큰 안도감과 밝은 빛을 받게 되었으므로 마치 천국으로 옮겨진 듯이 생각되었다.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이 없어졌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구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감옥이나 화형주도 달게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복음을 깨달은 그들은 소리쳤다. “이제는 먼 길의 순례가 쓸데 없다. 이 이상 더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죄 많고 불결한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겠다. 아아! 그분께서는 나의 죄, 나의 죄까지도 사하여 주신다!” 거룩한 기쁨의 물결이 마음을 채우고, 찬미와 감사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자, 기쁨으로 충만해진 그들은 진리와 생명의 길 되신 예수님을 찾은 새로운 체험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받은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친구들을 찾아갔다.
그런 후에 진리의 사자(왈덴스 인들)는 가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가 혹시 천사가 아니었던가 하고 의심하기도 하였다. 많은 경우에 사자는 한 번 보이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다른 나라로 갔거나, 혹은 어떤 미지의 감옥에서 고생을 하고 있거나 자기가 진리를 증거한 그 곳에서 이미 생명을 잃고 백골만을 남겨놓은 신세가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렇게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증거한 왈덴스인들로 말미암아 진리의 빛은 꺼지지 않고 암흑시대 동안에도 활활 타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 로마 천주교의 성경과 달리하는 교리
다니엘서의 예언을 보면 법왕권(작은 뿔로 표상됨: 살아남는 이들 월간지 33, 52호 참조할것) 이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단 7:25)라고 되어있다. 성경의 어떤 진리들을 변경시켰는지를 살펴보자.
1. 교황권은 교황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거나 동등시하는 주장을 한다;
“교황은 너무 존엄하고 높기 때문에 단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천주교회 백과사전에 기록된 “교황”에 대한 정의(교황 레오 13세의 말 중에서 발췌)
“교황들은 이 지구상에서 전능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다.” 1894년 6월20일 교서 중에서
“교황은 하늘의 왕, 지상의 왕, 연옥의 왕으로서 삼층 면류관을 쓴다.” Feraris저, Prompta Bibliotheca 제 6권, p. 26 (바티칸에서 발행한 공식 서적)
“성경에서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모든 명칭들과 그분의 최상권에 관한 모든 내용은 모두 다 교황에게도 적용된다.” Bellarmin, Authority of Councils, 2권 17장
“우리(주: 교황들)는 이 땅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Pope Leo XIII, Encyclical Letter, 7/20, 1894.
“교황은 너무나 위엄이 있고 지고하기 때문에 그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인 동시에 하나님의 대리자이시다. 교황은 지상의 하나님이시며, 왕중의 왕이시고,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 Prompta Bibliotheca, vol. VI, p. 25-29.
2. 교황권은 자신들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참람된 주장을 한다;
“하나님 자신도 신부들이 용서해 주거나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사제들의 판단에 따라서 행하시며, 신부들의 선언이 선제한 후에야 하나님께서 그것에 의해 판단하신다.” 신부의 존엄성과 의무들, 12권, p. 27
“교황은 그의 권세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수정할 수 있고 땅 위의 대리자로서 그는 그의 양들을 매고 푸는 가장 큰 권세를 가지고 행동한다.” Ford, p.151
“용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주 신부들에게 죄를 고백해야만 하는 것이다.” 1984년 12월 11일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137페이지에서
3. 교황권은 종교 암흑 시대 동안에 십계명을 변경시켰다;
카톨릭 교회는 자신들의 교리문답과 교리책에서 두번째 계명을 삭제하였는데, 그 이유는 십계명에 기록되어 있는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두번째 계명은 그들이 숭배하는 마리아 상이나 각종 성자들의 상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계명을 빼버리는 대신에 열번째 계명을 둘로 나눔으로써, 10개의 계명을 가진 십계명의 형태를 유지시켰다.
또한 네번째 계명인 제칠일 안식일(토요일)을 제일일(일요일)로 변경하여 준수하도록 하게 하였다. “카톨릭교회는 안식일을 주일 중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서 첫째 날인 일요일로 변경시킨 후, 십계명의 네째 계명을 고쳐서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라고 명하였다” 카톨릭 사전 4권,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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