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 깨달은 사람이 들어가는 산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2. 15.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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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 깨달은 사람이 들어가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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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1. 01:13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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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깨달은 사람이 들어가는 산
지리산에 사는 한 도인은 “깨달은 사람은 들어올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들어오지 못한다. 먼저 들어온 사람은 올라가고, 알맞게 들어온 사람은 흉하고, 늦게 온 사람은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지만, 지리산은 우리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한국적인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지리산의 서쪽에는 연기조사가 세운 화엄사가 있고, 구례군 토지면에는 연곡사가 있다. 섬진강을 따라 내려간 곳에 있는 화개장터에는 신응사와 쌍계사가 있는데, 절에는 신라 때 사람 고운 최치원이 쓴 사산비문 중의 하나가 쓰인 진감선사대공탑비가 세워져 있으며, 시냇가 석벽에는 고운이 쓴 글씨가 많이 새겨져 있다. 세상에 전해오기로는 고운이 도를 통하여 지금도 가야산과 지리산 사이를 왕래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선조 신미년에 중이 바윗돌 사이에서 종이 하나를 주웠는데 “동쪽 나라 화개동은 항아리 속의 별다른 천지여라, 선인이 옥 베개를 밀치며 잠을 깨니, 세대는 벌써 천년이 지났는가”라는 절구 한 수가 적혀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금방 쓴 듯하고 필법은 세상에 전해오는 고운의 필체와 같았다고 한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에 지리산에는 만수동과 청학동 1) 이 있다고 한다. 만수동은 오늘날의 구품대이고, 청학동은 현재의 매계(梅溪)로 근래에 비로소 인적이 조금씩 통한다.
이는 『택리지』의 기록이다. 청학동에 대한 기록은 선조 때의 문인 조여적의 『청학집(靑鶴集)』의 신선에 대한 기록에서 비롯하였다. 고려 때의 문인인 이인로는 그의 저서 『파한집』에서 청학동을 찾아 나섰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지리산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히 죽 이어져 대방군에 와서는 수천 리를 서려 맺혔는데, 10여 개의 고을이 산을 두르고 있다. 한 달이 넘게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그러므로 늙은이들이 서로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 안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며 엎드려서 몇 리를 지나면 넓게 트인 지역에 들어가게 된다. 사방이 모두 기름진 땅이어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푸른 학이 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청학동’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속세를 피해 간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과 부서진 해자가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오래전에 나는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은둔 생활로 일생을 보낼 뜻이 있어서 정승 최 아무개와 함께 청학동을 찾기로 하였다. 소 두세 필에 죽릉을 가득 싣고 들어가 속세와의 연락을 끊으려고 하였다. 드디어 화엄사를 지나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서 묵었다. 지나는 곳마다 선경 아닌 곳이 없었다. 일천 바위가 다투어서 솟았고, 온갖 골짜기엔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며 대나무 울타리와 떼를 입힌 집들이 복숭아꽃, 살구꽃에 어리어 정말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하였다. 그러나 청학동이라고 불리는 마을을 끝내 찾지 못하고 바윗돌에 시를 남겨놓고 돌아오고야 말았다.
이인로가 바위에 남긴 시는 다음과 같다.
두류산은 높고 석양의 구름은 낮은데
일만 봉우리 일천 바위는 회계산(중국 남방의 산)과 비슷하다
막대를 짚고 청학동을 찾아가고자 하는데
건너편 숲 속에 가려 흰 원숭이 울음소리만 들린다
다락은 아득하고 삼산(신선이 사는 산)은 멀고
이끼 낀 네 자의 글자만 희미하다
‘도원이 어디냐’ 물으려 했더니
낙화유수만 사람을 어지럽게 할 뿐이다
이인로가 청학동을 찾고자 했다가 되돌아나온 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 산을 올랐던 김일손은 “들길을 올라 벼랑을 옆으로 두고 몇 리를 가니 골짜기 하나가 나오는데, 제법 넓고 평탄하여 농사를 지을 만하니 세상에서 이곳을 청학동이라 한다. 생각해보니, 우리들도 여기까지 왔는데 신선을 찾아 이곳을 찾은 미수 이인로는 왜 이 골짜기를 찾지 못했던가. 미수가 이곳까지 오고도 청학동인 줄 모르고 기록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청학동이란 본래 없는 것을 세상에 있다고 전해오는 것일까?”라고 하였다. 그 뒤 청학동에 관해 쓴 글이 유성룡의 형인 유운룡의 『겸암일기(謙庵日記)』에 나온다.
하동의 화개천 등촌에서 사흘 먹을 양식을 마련해 노숙을 하면서 사흘 가면 석문에 이른다. 지금 쌍계사 입구의 석문이다. 이곳에서 40리 길을 올라가면, 1000석의 논과 몇 섬지기 밭곡식을 낼 만한 평원에 이르는데, 그곳에는 1000호쯤 살 만하다. 그곳에 한 돌샘이 있는데 그 돌에는 20여 년간 속세와 단절하고 살았다던 고려 때 거사 이청연의 비기가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은 “이곳은 병화(兵火)가 이르지 못하고 공경(公卿)ㆍ영재(英才)ㆍ현사(賢士)가 많이 태어날 풍수혈이지만, 이(李)ㆍ정(鄭)ㆍ유(柳)ㆍ장(張)ㆍ강(姜)씨의 각기 다른 5성이 함께 살아야만 발복을 한다”라고 하였다.
유운룡이 말한 지역을 유추해보면 지금의 세석평전인 듯하다. 현재 청학동이라고 알려진 마을은 지리산 삼신봉(三神峰)의 동쪽 기슭 해발 800미터에 있다. 행정구역상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의 학동마을인 이곳은 예로부터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청학이 서식하는 승경(勝景)의 하나로 꼽혀왔고, 주민 전체가 갱정유도(更定儒道)를 믿는데, 그들이 이곳에 들어온 것은 오래전 일이 아니다. 전라도 순창과 남원 일대에서 이 도를 믿던 사람들이 입암산과 변산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전라북도 순창에서 출생한 강대성이 1945년에 창시한 갱정유도교는 일명 ‘일심교(一心敎)’라고도 하는데, 이 신흥 종교의 정식 이름은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대도대명다경대길유도갱정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이라는 긴 이름이다. 집단생활을 하는 이들의 가옥은 한국 전래의 초가집 형태를 띠며, 의생활도 전통 한복 차림을 고수한다. 미성년 남녀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게 땋아 늘어뜨리며, 성인 남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마을 서당에 보내는 것도 특이하다. 마을 사람들은 농업 외에 약초ㆍ산나물 채취와 양봉ㆍ가축 사육 등으로 생계를 꾸려 나간다.
그러다가 청학동이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청학서당이 몇 개인지도 모를 만큼 무수히 생겨났으며 자꾸만 관광지화해가고 있다.
한편 『어우야담』을 지은 유몽인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내원(內院)에 이르렀다. 두 줄기 시냇물이 합쳐지고 꽃과 나무가 산을 이룬 곳에 절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수를 놓은 비단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 머리 허연 늙은 선사(禪師)가 승복을 갖추어 입고 앉아 불경을 펴놓고 있었다. 그의 생애가 맑고 깨끗하리라 여겨졌다. 이에 머무는 대신 시를 지어놓고 떠났다. (······) 드디어 지팡이를 내저으며 천왕봉에 올랐다. (······)
아, 이 세상에 사는 덧없는 사람이 가련하구나. 항아리 속에서 태어났다 죽는 초파리 떼는 다 긁어모아도 한 움큼도 되지 않는다. 인생도 이와 같거늘, 조잘조잘 자기만 내세우며 옳으니 그르니 기쁘니 슬프니 하며 떠벌리니, 어찌 크게 웃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오늘 본 것으로 치면, 천지도 하나하나 다 가리키며 알 수 있으리라. 하물며 이 봉우리는 하늘 아래 하나의 작은 물건이니, 이곳에 올라 높다고 하는 것이 어찌 거듭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유몽인이 올랐던 천왕봉을 오르는 사람들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데 그 당시 천왕봉 정상에는 성모사(聖母祠)라는 사당이 있었다. 1489년 4월 22일 정여창과 함께 중산리 법계사 코스로 해서 천왕봉에 오른 김일손은 성모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을 쌓은 담벽이 있고, 담 안의 너와집에 부인의 석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천왕(天王)이라 부른다. 여기저기에 신에게 바치는 종이돈[지전(紙錢)]이 요란하게 걸려 있다.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는 천왕봉에 있는 석상은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고려 사람들이 옛날 중국에서 들어온 신선 사상에서 유래된 선도성모(仙桃聖母)설을 믿어 이것을 고려 임금의 혈통으로 삼고자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하였다. 전해오는 또 다른 얘기로는 성모상은 태초에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지리산을 수호하러 왔던 지리산의 주신(主神)인 마야부인이라는 설도 있는데, 성모상은 우여곡절 끝에 현재 중산리의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지리산이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꼽으라면 첫손에 꼽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 바로 섬진강이다.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지리산 남부의 협곡을 끼고 도는 섬진강은 곡성에서 구례, 하동, 광양에 이르기까지 지리산 자락을 둘러싸고 흐른다. 섬진강을 따라가며 나타나는 각양각색의 지리산 풍경은 말이 필요 없을 만큼 그윽하고 깊다. 이렇듯 강과 산은 오랜 세월 형과 동생처럼 조우하면서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삶을 빚어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깨달은 사람이 들어가는 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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