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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고후4:1-6)
갈등
1. 지난 주일에 이어서 고린도후서 말씀을 나눕니다. 고린도후서에는 다른 성경에서 볼 수 없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보입니다.‘바울에게도 이런 면이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바울은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 시리아의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요. 이전에는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라 순진하게 살았습니다. 누구보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지침에 따라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메섹까지 달려가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감옥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철저한 삶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삶의 방향성만 바뀌었을 뿐이었습니다. 전에는 율법에 철저한 바리새인의 삶이었고, 이후는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는 삶으로 대전환이 일어났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로 변신하고서도 사도 바울은 타협을 모르는 성품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완벽주의자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선교활동 초기에 바나바와의 갈등도 이런 면을 보여줍니다. 젊은 마가가 선교에 동행하였다가, 중간에 이탈하였어요. 후에 다시 마가가 동행하고자 할 때 바나바는 자기 조카이기도 하고 마음이 너그러워 마가를 용납하였어요. 하지만 바울은 마가를 용납하지 않았어요. 결국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지고 선교사역을 따로 했습니다.(바울에게 바나바가 어떤 사람인데요) 이렇게 철저했던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는 엄청 유순하게 변화되었습니다.(바울답지 않아 보이는 모습) 지난 주일에 1장을 나누며,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했습니다.
2.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지 않은 것은 고린도 교우들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지금 갔으면 여러분들을 크게 책망해야 하는데, 그러면 많은 상처를 줄 것이니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어요. 또 나는 고린도교회를 주관하는 자(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돕는 조력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이후 2-3장에서는 자신을 근심하게 한 자들이 있었는데, 복음을 따르게 하지 못하게 한 자들에게 미혹되어 교회에 분란을 일으킨 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권했습니다. 이렇게 하므로 고린도교회가 그리스도의 향기(냄새)가 되라고 했어요. 또한 너희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영으로 쓰신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다독였어요.
복음 전도와 교회를 세워가는데 늘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었어요. 거짓 사도들-거짓 교사들이었습니다. 11:13,“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그들은 교회 성도들이 복음 진리에 서지 못하게 하고, 교회의 질서를 흐리게 했어요.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이들을 향해서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1절,“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이전의 바울이라면 시시비비를 가리고 엄하게 책망하고 교회의 질서를 세워갔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대적하고 음해하는 가운데도 어떻게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갈등 심화
3.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에게서 다른 어떤 교회보다 애증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도 그렇고, 교회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목회자들도 어느 도시는 목회하기가 좀 낫고, 어느 지역은 정말 힘들다고 말을 합니다. 경상도에서는 부산이나 대구가 목회하기가 힘들다고 하고요, 포항은 상대적으로 목회하기가 좋은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충청도 출신인 제가 포항에서 평생 목회할 줄은 몰랐어요. 포항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목회를 하는데, 저도 포항에서 목회하기가 좋고 포항살이가 행복합니데이. 고린도는 부산이나 대구만큼이나 목회하기에 어려웠나 봅니다. 2:4,“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이 외롭지 않도록 귀한 가정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부업으로 한 일이 천막을 만드는 일-tent maker-이었어요. 같은 일을 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고린도에서 만나는 복을 받았어요. 물론 바울을 만난 이들 부부에게도 복이었습니다. 양자 모두에게 참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문제가 많은 고린도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세우는데 1년 6개월을 보내고, 바울은 다른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고린도교회 소식을 들으며, 편지를 통해서 그들과 교제를 계속했습니다.
4. 편지는 네 차례, 방문은 세 차례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울을 공격한 것은 사도권 문제를 시작해서, 방문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 글은 잘 쓰는데 말이 좀 시원찮다고, 외모가 볼품없고 지병까지 앓고 있다고(안질, 말라리아, 풍토병, 간질), 사례비를 받지 않고 텐트 메이커가 된 것, 예루살렘을 위한 구제헌금을 꼭 해야 하는지-사익을 취하려는 것은 아닌지 등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이런 대적자들에게 동조한 이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어요. 이렇게 온갖 중상모략에 시달리며, 또 등을 돌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보면서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3자인 우리도 짐작할 수 있는 스트레스-고통인데, 사도 바울 자신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해본적이 있으신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2:6-7,“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보통 사람이 감내하기 힘든 상황 가운데도 바울은 어떻게 그들을 용서하고-온유와 관용으로 대하고, 또 위로하라고 하고, 자신은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실마리
5. 바울이 사도권에 시비에 연루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직접 부르시고 동행했던 자들로 기적을 행하는 등의 요건이 필요했어요.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부르셨고 기적을 행하는 등 사역에서는 문제가 없었어요. 문제는 대적자들이 이것은 개인적 체험이지 공증이 될 수 없다고 공격을 했어요. 열두 제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는데요.(바나바와 아나니아 등이 증인이 되어서) 바울에게는 이 문제로 피로도가 쌓였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공증되었음을 강조합니다. 1:21,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기름을 부으셨다고. 구약의 선지자같이.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은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아니었고, 외부로부터 온 거짓 사도들과 교사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3:1-2,“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여러분과 나 사이에, 내가 사도임을 자천하거나 누구로부터 추천서가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여러분은 우리의 편지라고 했어요. 내가 사도인 것은 고린도교회 여러분이 추천서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펜으로 쓴 추천서가 아니라 마음에 쓴 편지이고,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6. 바울은 사도라는 말 대신에‘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3:6,“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자신과 동역자들은 생명력이 없는 율법 조문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는 영,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다고 선언했어요.(구약의 직분과 구별) 바울은 직분을 말하면서 만족이라는 말을 썼어요.(3:5-6) 직분은 하나님이 만족하셔야 한다고 했어요. 직분자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시고 만족하실만한 일꾼이 되어야 해요. 바울은 이 직분의 영광이 모세의 영광(얼굴)보다 영광이 더욱 넘친다고 말합니다.(3:9)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지 이렇게 잘 알았기에, 낙심하지(기죽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가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3-4절,“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복음을 가리고 불신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게 하여 망하게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이 세상의 신-사탄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우상들이 신처럼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의 신-사탄이 역사하는 것이에요. 각 종교가 신비성이 없으니 신비를 나타내기 위해 샤머니즘(무속)과 결탁합니다. 불교가 대표적이죠. 신비를 위해 귀신의 도움을 받습니다. 기독교에만 신비가 있느냐고 도전합니다.
7. 사탄은 부지런히 사람들의 마음의 눈을 가립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해요.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려고 다메섹을 향하던 그 날, 길을 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고,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찬란한 빛 가운데서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바울을 가리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는 순간이었어요. 너무나도 강렬한 이 체험이 전광석화처럼 바울을 변화시켰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바울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영광의 광채를 보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도의 직분을 생각할 때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을 결코 멈출 수 없었습니다. 과거 자기처럼 수건에 가려져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이 가는 곳마다 너무 많았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일을 위해 택함받은 그릇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언제나 잊지 않았어요. 어떠한 위협과 시련이 와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데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어요. 조금도 기가 죽거나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 5절,“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바울의 자기 정체성은 자기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였어요. 고린도교회와의 관계에서도,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종임을 밝혔어요. 이런 정체성을 갖고 살 때, 그에게는 언제나 낙심이 사라졌습니다.
복음
8. 복음은 우리 삶에 최고 보화입니다. 이보다 귀한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 예수 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찬양) 6절,“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창조 때 선포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 빛이 창조되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실 때만 가능하다는 메시지에요.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은 어떤 수양이나 수련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공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아직 이 경험이 없는 분들 모두가 이 은혜를 받고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대
9. 우리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선물)로 말미암아(엡2:8) 복음을 알고 누립니다. 사도 바울은 본인이 이 큰 은혜를 직접 경험했고, 다른 사람들도 이 은혜를 누리도록 세상 모든 직분을 내려놓았습니다. 오직 복음 전하는 것 외에 소망이 없는 인생을 경주했어요. 그는 사도로서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살았어요. 우리도 바울을 본받아 이 가치관을 좇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2절,“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바울은 우리가 버릴 것과 나타낼 것을 전해줍니다.
우리가 버릴 것은 숨은 부끄러움의 일이고 속임으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고 순수하고 순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타낼 것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 것이에요. 혼잡하게 하는 것은 올무에 걸려 타락하게 하는 것이에요.(말씀을 왜곡하게 해서) 교회는 사람을 살리고 세워주는 곳입니다. 우리 빛내리교회에 오는 분들은 생명을 얻고(영생), 더욱 믿음에 굳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굳게 서도록 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양육과 훈련을 통해서) 마음 문만 열면 됩니다. 금주 화요일은 3.1절, 103주년이 됩니다. 일제로부터 해방의 소망이 없는 가운데도 우리 조상들은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고요.(동경에서 유학생들이 2월8일에 먼저)
10.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본질은 자유적 존재입니다. 죄나 어느 권세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 하지만 코로나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무당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기독교인들 중에서도 23%, 지난 주중 목회 데이터 연구소가 보내준 자료)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이에요. 죄의 노예로 살고, 사탄의 노예로 사는 자들입니다.(사주 팔자 운명에 사로잡힘-여기서 해방되도록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데...) 코로나가 끝나기 전에 이것에 벗어나야, 우리가 겪고 있는 지금 시즌이 의미가 있어요.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자유를 누리도록 한 것을 기억합시다. 오늘 우리도 이 자유를 누리도록 사람들을 초청하고, 또 그들에게 달려가는 복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다 같이 일어나서 찬양하며 기도합니다.(오늘 찬양: 어느 민족 누구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