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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야 채워집니다.
마가복음 14:66~72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지만, 하나님처럼 완벽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제하기 위한 존재로 만드셨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치가 돋보이게 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에 반응할 때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에 대하여 ‘완전한 사랑’에서 이뤄진다고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으며, 완전한 사랑으로 인하여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점차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함께 나눈 말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기서 그친다면 베드로는 불행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언한 것이 자기에게 이뤄진 것을 보고 통곡하며 회개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Happy Ending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한 모습으로 반응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죄로 인하여 얼룩진 마음에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막 8:34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꿔서 설명하자면 내 것을 비우고 주님이 베푸시는 십자가를 지고 따를 때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참사랑을 누릴 수 있고 변화가 일어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비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채움의 은혜는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고 온전한 사랑의 결실에 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비움의 의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에 대해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자기 죽음과 부활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 없었던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큰소리를 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의 답변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못 박아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가신 죽음의 길을 함께 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하여 요한복음 21장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21장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실 때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장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 이름을 게바라고 지하였는데 이는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였던 3년 동안 내내 베드로라고 부르시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다시 베드로의 옛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깊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네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옛사람의 성품으로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이후에 그에게 임할 성령으로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따를 수 있음을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기에 신앙의 성장도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거둘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비결은 오직 나를 비우고 성령으로 채워야 합니다.
베드로 역시 자기를 비워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과정을 통하여 자기를 비운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는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을 멀찍이 따랐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잡아 결박한 후,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습니다. 멀찍이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 곁에는 또 다른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문 지키는 여종에게 말해서, 베드로도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당시 두 사람의 집은 한 울타리 안에 있었습니다. 큰 뜰을 가운데 두고, 각자의 집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들어간 곳은 안나스의 집 뜰이면서도, 가야바의 집 뜰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갔습니다. 깊은 밤중이라 날씨가 추워졌기에 대제사장의 종들과 성전의 경비대원들이 불을 피우고서 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그들 사이에 어울려서 함께 불을 쬐고 있었을 때 예기치 않은 일이 그에게 발생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본문 67절에서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그 여종은 어두워서 베드로를 자세히 보지를 못 했습니다. 그러나 왠지 그 여종에게 베드로의 얼굴은 낯설지 않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는 늘 예수님과 함께하던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았습니다. 여종은 베드로를 향하여 이처럼 말했습니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름 앞에 그 사람의 출신지를 덧붙여서 서로 간에 구분하여 불렀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아보는 여종의 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입니다. 마침 종들과 성전의 경비대원들이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막 14:68절에서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여종이 이런저런 말을 했던 것처럼, 이 경우 베드로도 여러 말로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에 대하여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눅22:57에서는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그리고 요18:17에서 “나는 아니라.”고 하였던 것으로 미뤄 베드로는 여러 다른 말을 하면서 힘써 부인했을 것입니다. 막 14: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나중에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하며 많은 기적을 경험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그는 두려움과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분에게는 어떤 허점도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임을 입증하여 주셨습니다.
그런 주님이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으로 대제사장의 집 뜰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실망감과 두려움에 의한 혼돈 속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비루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배후에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셨던 사랑을 인식하고 있었더라면 그렇게 쉽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머물지 않으면 나는 세상의 풍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을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이겨보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을 비워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을 죄를 회개하는 것이 비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 길을 인도하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우시는 것을 믿지 못하고 내 계획과 내 뜻을 앞세우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 비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채움의 은혜는 무엇인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비움과 채움이 필요합니다. 비움이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면 채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담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베드로가 자기가 맹세하여 고백한 것이 하나둘씩 무너지는 과정을 함께 나눴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공회에서 사형판결을 받으시고, 감옥으로 끌려가시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철렁하게 무너질 수 있게 만든 것은 막 14:64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극도의 분을 참지 못하는 대제사장의 노기 어린 호통과 무리가 한결같이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고 외쳤을 때 베드로도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막 14: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수치가 자기에게로 클로즈업(Closeup)되어 소스라치듯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공회원들이 주먹으로 치고, 하인들이 손바닥으로 쳤기에 멍들고 부어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공회원들이 뱉은 침으로 얼룩져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나선 길에 감당해야 할 것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죽음에 이르고 사람들에게 모욕과 수치를 당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제자임을 밝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싫었습니다.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십자가가 날마다 있습니다. 이것을 거부하고 도망치고 싶은 십자가 말입니다.
언젠가 병원에 갔다가 주차를 해놓은 차를 빼려고 하다 옆 차량을 살짝 긁히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슬쩍 빠져나오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긁힌 차량에 제 전화번호를 남기고 수리한 후에 연락해주면 보상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차주에게서 연락이 와서 몇십만 원을 변상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믿고 따를 때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자기 부인으로 자기의 욕심과 생각을 버리고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 십자가로 채우는 것이 성령충만이고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노예 생활하다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해방되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여정에서 사흘 길을 걸으며 물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물은 생존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게다가 애굽에서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광야에서 지내기에 필요한 것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낮의 뜨거운 태양열과 밤에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는 그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두렵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마라에 이르렀을 때 샘을 발견하였으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그 마음을 드렸고 그분께 해결책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의 부르짖음은 허공을 치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개역개정에는 ‘부르짖었더니’라는 단어가 영어에서는 ‘cried out’라고 하였고 히브리어로는 ‘차아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절박한 환경에서 도움을 청하는 외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하였는데 의외의 반응이 등장합니다.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한 나무’는 크고 웅장한 나무가 아닙니다. 흔히 광야에서 자라는 보잘것없는 작은 나무에 불과합니다. 이 보잘것없는 나뭇가지가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는 나무를 쓴 물에 던졌더니 물이 달아졌고 모든 백성과 가축이 마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로 채우면 신기하게 진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하여 7년 만에 건축하였고 거기서 또 8년을 목회하면서 많은 부흥을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문제가 불거져 교회를 내려놓고 떠나야 할 지경에 놓였습니다. 어쩌면 목회마저 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저는 위기감을 벗어날 여러 방법을 떠올리며 강단에 올라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을 때 주님이 제 오른편에 등을 보이시며 서 계신 것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영감으로 예수님도 머리를 숙이시고 울고 계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음성이 제 마음에 세미하게 들려왔습니다. “종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왜 우느냐? 나 하나로 만족할 수 없더냐? 모든 것을 잃었다고 탄식하지 말고 나로 인하여 기뻐할 수 없더냐?” 그때 주님의 음성이 분명하게 제게 들려지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 십자가를 내 안에 채웠을 때 제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보내주신 큰 사랑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장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길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아픔입니다.
십자가는 수치입니다.
십자가는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 안에 채워지는 순간 예수님의 피흘림의 사랑이 와닿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염려와 근심 장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나를 부인하십시오! 내 생각과 판단을 비우고 오직 십자가로 채움을 받으십시오! 나를 비워야 채움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버릴 것은 속히 버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채움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