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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나무 밑에 심어 논 옥수수는
나무 그 늘 속에서도 크기는 하지만 성장 후 열매가 없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제대로 된 가정에서 크 지 못하면
성장후 여러면에서 남다른 장애를 보인다
나의 경우
11세에 산사로 입산 출 가 했다
서산에 붉은 피를 토하며 낙조가 지고 있었다
주변이 어두워지고 소쩍새가 울고 있었다
칠월백중 법회 그 많던 사람은 온데 간데 없고 아버지도 서울로 가시고 산사의 긴 마루에 혼자 앉아 그렇게 도 새빨간 낙조는 처음 보았다
나도 모르는 길고 긴 눈물이 두볼을 타고 흘렀다
그 눈물은 눈에서 나오는게 아니고 뼛속을 울리며 골수에서 나오는 거 같았다
낯에 법회가 끝난 빈 법당에 홀로 남아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울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이롱 모시 남방을 입고 절하는 자세로 상체를 들썩이고 우신 아버지를 보고도 덤덤했었는데 서산머리에 붉은 핏빛 노을과 차가운 공기에 밀려오는 거대한 고독감에 눈물이 솟구친 것이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울다가 큰방 에 붙어있는 지대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큰방은 판도방으로 정좌로 있어야 하지만 지대방은 누울 수 있는 방이다
큰방에는 해중암반에 앉아 계신 백의관음과 남순동자 그리고 북해용왕과 감로병에서 자라고 있는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이 그림을 의지하여 살았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간직하고 있는 첫번째 경험이고
그 후로 이 경험이 인생의 방향타에 항상 작용하고 있었는데 나는 알지 못했다
비가 언제나 낙을 이기고 있서서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은 사회생활 대인관계에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11세 어린이를 받은 그 중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 도량석 도는 일을 나에게 맡겼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니 침모 보살이 솜을 둔 모자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림책에 나오는 양반집 도련님 들이 쓰는 모자 였다
솜을 둔 벙어리 장갑과 솜을 둔 동방아도 만들어 주니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그 옷들을 입고 산사생활을 즐겁게 해 나갔다
자명종 시계가 잠을 깨워주면 정지에 들어가 상탕 중탕 하탕의 시멘트 수조가 있는데 하탕으로 떨어지는 물 줄기로 얼굴 을 씼고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문고리에 들러 붙었다
캄캄한 도량에 석유 장명등 빛에 의지해 극락전 앞에서 도량을 돌면 종송 하고 대종을 쳐야 하는데 종송은 총무스님이 하면 나는 종송을 이어 받아 대숲속에 들어 있는 대종을 28번 찬다
예불이 끝나면 노스님에게 초발심자경문을 외워 바치고 다음 문장 강의를 듣는다
어려서 이렇게 살아 온 탓에 나의 마음 깊은 곳에는 북극 동토지역이 자리하게 되었다
북극 동토지역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아 있는데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같은 개똥철학 체념철학을 사승으로 가지고 있으니 이 세상과는 물과 기름이 되었다
이 세상은 사랑과 집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대불교는 ㄱ 것을 부정한다
두번 째 경험은 무공해 청정 이속한 명산 경험이다
속리산 비로봉 상고암이 내 가슴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
솔갈비 긁어다가 장작불 아궁이에 불을 때 밥지어 먹었다
그 깨끗한 바위에 차곡 차곡 수북히 쌓여 있는 밝은 적색의 청정한 솔갈비를 긁어 모으러 큰 바위 위로 뛰어 다니던 14세 소년 의 나
감자 떡과 산당귀 차 산머루 다래 산나물 밗에 먹을게 없던 그 시절
내 또래는 없고 늘 나 혼자 산봉과 암석과 소나무를 벗삼아 놀았다
이것이 나의 정서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 한 것이다
나는 육십 중반임에도 아직도 산으로 가고자 한다
산에서 고독사 할 생각이다 이 세상이 싫다
속리산 비로봉 상고암 가던 날 법주사 입구에서
마차를 타고 황금색 마사토 신작로를 달렸다
말발굽 소리와 방울소리가 경쾌한 리듬을 타며 단풍이 절정인 숲속으로 난 길을 달렸다
비로산장 앞에서 내려 상환암 코스를 등산하여 상고암으로 왔다
다음 날 아침 상고암에서 내려다 본 산 아래는 흡사 바다 가운데 섬들이 여기저기 보이는 운해였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 산에 살았다면
그 보다 더 복 받은 노인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았어 야 했다
이따금씩 찿아오는 등산객을 부러워 하지 않아야 했다
나를 데리고 온 학산스님은 나를 왜 향천사 에서 속리산 상고암으로 데리고 왔을까?
그럴만한 이유는 지금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산이 내 가슴에 사라지지 않는 병이 된 것은 그 스님 때문이다
밀교주문을 수행 하는 그 스님은 나를 시종처럼 예산 향천사에서 속리산 비로봉 밑으로 데리고 갔지만 나는 하는 일이 없었다 온종일 산으로 놀러 다녔다
산봉우리 꼭대기에 서 보는게 나의 일상적 놀이 였다
상고암에서 아래로 운해를 바라보거나
속리산 봉우리는 모두 올라가보는 일로 매일매일을 보냈다
학산스님은 한달에 한번씩 나에게 산신제 에 필요한 돼지대가리를 사오는 임무를
부여 했는데 나는 법주사를 지나 일주문 밖에 줄지어 서 있는 상가로 가서 돼지대가리를
구입하여 바랑에 담고 다시 걸어서 비로봉 상고암으로 돌아 왔다
도중에 나와 우연히 만난 아줌마들이 나를 보고 우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너무나 창백하고 남루하고 수척해서 그랬을 것이다
오로지 채식만 하니 몸이 낙엽장 처럼 말라 있었다
산신제에 올린 돼지 대가리도 파제후 구경하지 못했다
제를 야간에 올리는지라 나는 자느라고 얻어 먹어본 적이 없었다
학산스님은 학교는 안 가도 된다고 하였다
배우면 속퇴할 수 있다는 걱정 이였다 향천사 극락전에 있는 몇백년 된 배롱나무를 베어 버리고 신도들 한테 배척되어 주지직 사임하고 다시 상고암 으로 오신 건데 나무를 벤 이유가 나무가 요사스러워 신도들이 젊은 스님들을 파계시킨다는 학산스님의 지론에 신도들이 반대한 것이다
실제로 예산은 승려들의 비구계에 비협조적인 여자들이 많았다
그냥 복이나 빌어주면 되지 비구 냐 ? 대처승이냐? 이런데 신도들은 관심이 없었다
나를 상고암으로 데리고 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이유도 학산스님 나름대로 깊은 사상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의 관상을 보고 학교공부 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보신것이 아니었을까?
실지로 이제 늙어버린 내가 스스로 나의 관상이나 사주팔자를 보아도 평생 일사무성임을 알 수 있다
중간에 업력을 이기지 못해 속퇴를 하여 우왕좌왕 할 때
나는 검정고시로 고졸을 해야 했다 한의대 준비를 하다가 법무사 와 변호사 사법시험도 공부 했으나 낮에는 건축현장 잡부일을 하고 밤에 공부를 하였다
자식을 두었으면 자식 부양 하나만 해도 훌륭한 일임을 알지 못하고 부질없는 헛꿈을 꾸었던 것이다
화이트 칼라로 살면서 남는 시간에 도를 닦아 보겠다는 아주 허랑한 생각에 잡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정신이 잘못된게 아닌가? 생각한다
속퇴하기전 서울에서 부전살이로 있을 때 능혜스님을 만난 적 있었다
아들 둘을 두었다는 말을 들은 능혜스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능혜스님은 오십대 에 접어 들고 있는 나이 인데 부러워 하는 표정이 보였다
능혜스님이 미국으로 쉬러 간다는 말을 하였을 때
나는 진심으로 ,,, 복도 많으십니다,,,, 하였더니
능혜스님은 약간 화를 내면서 ,,,, 복은 아들 을 둘이나 둔 사람이 많은 거지 내가 무슨 복이 많아 ,,,, 하셨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처한 입장에 괴로움을 말하고자 했는데 듣는 사람들은 젊은 애송이 비구승의 어울리지 않는 처자식 고민을 무시하고 표현은 하지 않지만 부러워 하는거 같았다
그럴 때 내가 깨달아야 했는데 나는 초발심자경문 사상에 오염되어 마치 공산당 세뇌교육을 받은 초등생 같았던 것이다
사십줄에 처자식 부양하며 검정고시를 하면서도 학교교육을 안시키고 나를 절에 서 늙어 죽게 할 생각이었던 그 중들을 나는 원망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교육 대신 여러가지 잡다한 것을 중들한테 배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고전 한문과 전통의학과 역술 작명 그리고 범패 서예 등을 배웠는데 그것은 나를 자만하게 만들었고 신교육에 관심 없게 만들었다
그 중들은 중노리 하는데에는 학교 다닐 필요 없다는 것 이였고
견성성불하는데는 불입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고 하여
승가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는 것도 불필요한 일이라고 하였지만
나는 본사 승가대학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입학을 하였다
승가대학으로 해인사를 정하고 나선 길에 청주시 수동84 번지 고향마을이 궁금하여 들렀다가 청주역까지 걸어 가는데 엄청난 눈보라를 만나 편도선염에 걸렸다
높은 신열을 참으면서 해인사 객실 에서 입방을 기다리다가 부득이 대구 포교당으로 가서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때 나를 걱정하여 대구포교당 까지 나를 데려다 준 스님은 같이 입방을 기다리던 지금 구룡사 회주 정우스님 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음력 시월초에 그런 눈보라는 없는 것이다
이 역시 일부함원 오월비상이라고 밗에 할 수 없는 현상이다 청주 고향집에서 나를 괴롭히던 그 여귀의 심술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해인사를 포기하고 나는 다음해 봄 우룡스님이 강주로 계시는 법주사 승가대학에 입학하였다 청주에서 느닷없는 눈보라로 고생하였으면 그것을 계기로 승가대학을 포기하였더라면 쓸데 없는 세월낭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술축미 생들이 미련 한 고집이 있어서 고생을 사서 하는데 내가 그랬던 것이다
나와 같은반 법우들이 모두 사십대였는데 나만 십대였다
그들 모두 공부에 관심 없었다 경전문장을 토론 할 때도 일방적으로 내 견해 나의 주장을 만장일치로 추종할 뿐 경전 문구에 관심 없었다 승가대학에 입학하기 전 이미 초발심자경문을 배웠고 치문은 자운스님이 주석하시던 정능 보국사에서 정토종 기도와 치문을 세민스님에게 배웠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진리라고 인식되어 나의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모두 내가 나이가 어려 백치 였고 순진 했기 때문이다
범어사 승가대학을 1975년에 졸업 했는데 그 후로 대흥사로 가 운기강백을 모시고 전강 연수를 2년간 밟았다
당시 법우들 모두 경남 경북 지역에서 큰 절 주지승을 하고 있지만
나 혼자만이 경전문구에 서 배운대로 시주은혜를 무겁게 알고 인과응보를 무섭게 알다보니
빈한하고 존재감 없는 야인 승려가 되고 말았다
나이 오십 후반이 되어 숨겨 놓은 역사를 배우고 연구하고 나서야
본사 승가대학의 교재에 담긴 철학이 불교가 아니고 그레코 철학 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혼자 번뇌망상 괴로운 업에 휩쓸려 쓸데없는 공부를 하느라 인생을 소비한 것이다
학산스님도 아무것도 나에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무념 청정한 마음으로 속리산 상고암에서 구름과 비와 산봉들과 소나무를 벗하여
소년에서 노년 까지 살기를 바랐던 것 일 것이다
그게 가능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
눈보라가 흩날리어 아무도 찿는 이 없는 적막한 길고 긴 겨울을
알지 못할 향수병으로 지새고 다음 해 봄이 오고 여름이 시작 될 무렵
나는 문장대에 올라 그 길로 상주 쪽으로 내려 갔다
문경 가은을 지나 어디였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서울행 버스를 타고 서울 봉천동을 찾아갔다
상고암에서 나를 걱정하고 찾을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떻게 봉천동 까지 갈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에 대한 전생의 빛을 갚으라고 나의 업식이 나를 그렇게 시킨 것 이였다
집에 돌아온 나에게 부모님은 기술을 배우라는 차원에서 가내공장에 나를 취직시켰다
나는 2년 내지 3년을 가내공장 을 다녀서 받은 돈을 어머니께 드렸다
국졸도 뭇한 나에게 검정고시라도 공부해야 한다는 말은 부모님도 하지 않으셨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면서기 도 하시고 경찰 직에도 계신 분인데도 단 한마디도 검정고시 학교 공부 말씀은 없었다
모든 어른들이 나에게 도움 되는 한마디 조언을 나는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고 나의 도움을 받으려고만 하였다 정말 아쉬운 것은 여자의 사랑이 사자의 먹잇감 사랑이고 고양이의 쥐 사랑이라고 말해준 어른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계초심학인문에 ,,,, 재색지화는 심어독사 ,,,, 라는 말은 배웠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미율의) 에서 ,,,,, 남착여식 ,,,, 이라는 말도 배웠지만 . 그 때는 그게 무슨말인지 그 책에서 나오지 않아 배울 수 없었는데 남자는 상사뱀이 되어 여자의 그곳에 뱀 꼬리를 대고 뱀대가리는 여자의 유방에 붙어있는게 남착이고 여자는 호랑이가 되어 사랑의 한이 되었된 남자를 씹어 먹는다는 말 이 여식 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나혼자 공연히 사랑이라는 환상에 속은 것이다
화두선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고 세상의 출세 고위직이 지연 학연 혈연 에서 나오는 불공정한 사기 부정부패라는 것도 모두 내가 인생을 다 소비하며 하나 씩 터득한 것이지 성현도 말해 주지 않았고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를 약간 모자라는 사람으로 알고 계셨던거 같다
나는 어려서 부터 또래와 어울리지 않고 무슨 환상속에 빠져 살은거 같다
내가 기억하는것은 내가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6,,7세 때 부터 그런 기억이 있다
나는 잠자는 동안에 악귀의 괴롭힘을 받은 적이 있다
부모님은 이거 때문에 나를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른다
나는 여귀의 소름돋는 원성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심력으로 만들어 내는 그 소리는 낮은 소리였지만 들을 때 이가 갈리는거 같았다
그만큼 전달력이 강하고 증오하는 파워가 얼음처럼 압축된 음성이었다
그 당시 나는 하단전에서 중단전 심장 까지 기호흡 승강을 하고 있었고 타심통을 하고 있었다
악귀가 나의 몸을 신통력으로 잡아 당기면 열로 펄펄 끓는 나의 몸이 미끄러지듯 끌려가다가 문지방에 걸렸다
끌려가면서 나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워 악귀에 대항하였다
누가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도 나는 생이지지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11세 입산 당시에도 나는 천수경 법성계 반야심경 무상계 보문품을 외우고 그 뜻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보는 불자지송을 나는 아주 진지한 흥미를 가지고 보았다
11세에 향천사로 입산한 그 다음날 부터 도량석을 돌며 그런 것들을 큰소리로 외웠다
아침공양이 끝나 정지에 설거지를 하러 들어가면 소임보살들이 내가 옥구슬이 쟁반에 구르는 목소리라며 칭찬 들을 하였다
향천사 의 모든 식구 들이 나를 행자님이라고 부르면서 11세의 나에게 높임말을 썼다
그 바람에 나는 승려로서의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하게 성장하였다
이런 나를 이해 못하는 부모님은 나를 비정상으로 보셨을 것이다
나는 중간에 아내와 헤어진 후 어린 자식들 때문에 어머니와 같이 산 적이 있었다
자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린 아들을 고생시키는 나 자신이 미웠고 아버지 가 살았던 발자취를 내가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에 뜨거운 눈물을 삼키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이복형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악담과 저주를 퍼 부으며 아버지와 헤어진 후 육이오 난리 통에 행방불명 이 되었는데 그 때 퍼부은 악담이 아버지 와 우리 어머니 나의 형제들에 대한 저주였다고 나에게 들려주셨다
어머니로 부터 그런 말을 듣고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요즈음에 지난 날을 회상하니
그 여귀는 이복형의 어머니 원혼이 였고 그 원혼의 훼방은 우리형제들에게 극도의 생활고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사시는 곳마다 이웃에게 작은 빚을 지고 빚을 못갚아 여러번 이사 다니었다
나는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그 현장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주변인들에게 돈 꾸는 재주도 그 여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어머니가 들려준 또 하나 이상한 이야기는 내가 어렸을때 아버지에게 개새끼라고 욕을 자주했다는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 아마도 내가 여귀에 의해 영혼이 점령 당해 있을 때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속리산 상고암에서 지금은 없어진 서울역 앞의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시내버스를 타고 한밤중에 봉천동 에 내려 산 꼭대기에 있는 집을 찿아 올라갔다
골목길에는 불빛도 없이 캄캄했지만 나는 감각으로 움직였고 기어코 집을 찿을 수 있었다
모두 한방에서 같은 이불 을 덮고 자고 아침에 보니
6남매에서 맏누이는 집에 없었고 이복 형과 동생들 그리고 부모님이 봉천동 꼭대기에서
극한의 빈민 으로 살고 있었다
부부간에 극악한 싸움을 반복하고 가출하셨던 어머니도 집으로 돌아 와 계셨다
몆년전에 부모가 단칸방에서 악랄하게 몸싸움 할 때 는 남동생과 두여동생은
방구석으로 피신해 절망감과 공포심으로 몸을 떨며 울었다
형과 누나는 외출하여 없고 동생들은 울부짖고 나는 어린마음이지만 분노를 참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복형의 존재를 모르고 속은 결혼을 하셔서 부부간의 싸움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생각한다
우리형제들은 어찌하여 자식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도 없는 부모에게 줄줄이 찾아 왔을까?
그런 부모를 만나 고생시킨 저승시왕님의 뜻과
우리형제들과 부모님의 과거 숙세 업이 얼마나 악연악업이길래 그러하였나 ?
나는 그 과거생을 보고 싶어 호흡명상을 배운다
언제나 숙명통이 열릴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따금씩 언듯언듯 깨달음이 오지만 나의 망상 추측인지 숙명통인지 확신은 없다
나의 부친은 왜정 때 황해도 해주 면서기를 하다가 월남하여 경찰이 되었지만 실수로 인해 구금 되었다가 계급이 강등 된 상태로 다시 복직하여 내가 일곱살 되 는 무렵 청주 경찰서에 근무하였다 일곱살 내가 도시락을 가져다 드렸을 때 경찰서 안은 ㄷ귿자 형태로 앉아서 회의 중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5 16 군사 쿠데타 때문에 열린 것이다
나의 기억으로는 5,, 16 군사 쿠데타 때 한낮인데 아버지는 청주 집에서 소리내어 열심히 기도를 하였다
마루 다락에는 칼빈 소총과 실탄을 넣어 두고 기도를 하였다
내가 그 때 6세나 7세 되었는데 나는 실탄 하나를 빼어 내 밖으로 가지고 나가 돌맹이 위에다 세게 내리쳤다 총알이 터지는 것을 보려고 한 짓인데 실탄 하나를 손가락으로 뽑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6,,7세 어린이가 그것을 뽑아 돌맹이 위에 딱지치듯 힘껏 내리치는 일을 어떻게 알아 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실탄은 큰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날아가 찿을 수 없었다
엄청 위험한 짓을 했는데 이도 내가 내정신으로 한 것은 아니지 싶다
그 후로 아버지는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경찰복을 벗고
회사의 경비로 다니시면서 인생을 우앙좌왕 하시며 고생하시다가
말년에는 광릉 봉선사 절에서 승려 복을 입고 사시다가 입적하셨는데 입적하시는 그 때까지 막걸리로 폐인이 된 이복형과 두명의 어린 손녀 그리고 다리를 저는 며느리를 마을 월세방에 데려다 놓고 부양하셨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막걸리를 분석한 내가 막걸리 방부제와 감미료로 아스팜탐이 들어있고 그것은 간경화 와 치매를 유발 한다고 알려주고 있지만 그 당시는 막걸리 먹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까마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절에서 얻어지는 푼돈으로 이복형 가솔들을 부양하느라 당신몸을 돌 볼 새도 없어 피골이 상접하셨다
당시에 나는 파계를 한 몸으로 자식을 두고 도 절에 있었고 속퇴를 위한 자격시험 때문에 지 정신이 아니였다
봉선사에 들러 아버지 안부를 확인하면서 이복형에게 신경쓰지 마시고 마을에 나가시면 곰탕 같은거를 사서 드시라고 권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 입장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복형의 어머니에 게 한 행위 의 인과응보를 혹독하게 받으시고
절에서 비참한 말년을 보내시다 돌아가셨다
이복형을 먼저 저승으로 보낸 아버지는 급작히 노쇠해 갔다
이복형은 간경화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아침에 이를 발견한 형수는 쇼크로 파킨슨씨 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복형은 심장을 두드리는 듯한 자세로 굳어 있었다 나는 그 팔을 주물러 반듯하게 폈다
우리와 달리 이복형은 이목구비 와 얼굴 형태가 귀인형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아버지는 이복형의 어머니와 헤어졌는지 모른다
이복형의 어머니는 죽어서 원귀가 되었다고 나는 믿지만 원귀가 되려면 저승사자를 이길 정도거나 저승사자가 모를 경우에만 가능하다
이복형의 장례는 아버지가 종친회 에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한 공이 있는지라 사촌형들 까지 참석하였다
화장장에 화부가 시신은 우리가 알아서 잘 화장하여 벽제 화장장 정원에 뿌려 줄테니 안심하고 돌아가라 하였다 형의 시신을 의대생들 해부용으로 제공하겠다는 말로 눈치를 잡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허락하였다
남에게 의존하는 의존벽이 있었던 이복형이 마지막으로 복을 짓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날 당일로 어떤 산에가서 뿌려야 할 판인 것이다
이복형의 의타심도 유아기 때 친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로 나는 차가운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먼 후일 형의 모습이 생전처럼 꿈에 보일 때
나는 형의 사십구재도 지내지 않고 있음을 의식하여 사십구재를 지냈다
그 당시 사촌 여동생이 무속차원의 절을 가지고 있어서 그 곳에 돈을 주고 형제들 보고 참석하라고 연락 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고 남동생만 재가 끝나고 사람들 공양도 끝난 시점에 홀로 왔다 갔다
나는 수원 변두리 기흥에다 사람이 안사는 농가집 폐가를 월세 얻어 형수와 조카여식 그리고 우 리 애들 이렇게 여섯명이 비참한 극빈 생활을 하다가 다시 귀사하여 낙산사 포교사로 들어갔다
배운 도적질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카와 형수까지 떠 맡은 것은 내가 인정이 많아서 그런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떨어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였다
나외에 어떤 형제도 나보다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 때는 없었다
형수는 자기 뜻이 아닌데도 급작히 팔을 휘두르는 병에 걸렸다
그래도 예산 만월사에서 형수를 청소하는 사람으로 받아 주어 어린 조카여식을 만월사에 맡기고 나는 낙산사로 가서 포교사 월급을 타 중학생이 된 아들 둘을 수원시 인계동 현대식 주택으로 옮겼다
반지하 에 방둘 욕실 거실이 있는 방이였다 그 때는 학생들이 본드흡입하는 사고가 뉴스에 많이 나오는 때였다 나는 걱정이 되어 집주인 여자에게 애들이 무엇을 하는지 화재가 염려 되니 수고 스럽지만 챙겨 봐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아들 둘은 자기들 끼리 살은 것이다
어떠케 밥해 먹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두 아들도 못할 고생을 어려서 부터 한 것이다
만월사에 화재가 나 형수와 조카여식은 만월사에서도 있지 못하게 되자 나는 강릉자비 보육원에 조카여식들을 입소시키고 형수는 양양 중증 장애인 시설에 입소시켰다
만월사로 내가 형수식구들을 양양으로 실어나르러 갔을 때 형수는 법당이 불 붙어 타오를때 큰애가 좋아하며 박수를 치며 큰소리로 마구 웃었다고 나한테 말해주었는데 이는 어린애가 법당 때문에 괴로움을 받았다는 말로 이해되고 절집은 어린이가 어린이로 보이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형수는 양양 중증장애인 시설에 입소하여 그곳에서 죽었는데 그 어중간에 피골이 상접해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그 근처에 살고 있었지만 나를 보면 병이 더 심해지는거 같아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조카여식들 어려서 형수가 죽었는데 사십구재는 자비원법당에서 내가 직접 지내 주었다
온다 하던 나의 형제들은 어린 조카들과 같이 치룬 화장터 그리고 자비원 법당에서 원생들과 같이 봉행한 사십구재에도 아무도 오지 않았고 형수 친정이 전라도 보성인데 그곳에서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집이나 우리집이나 춥기가 시베리아 같았다
그 조카여식이 지금은 사십나이에 가까울 텐데 연락두절이다
나는 한때 형수의 원혼도 자기들 이산가족 만든것을 원통히 여겨 나를 괴롭힌다고 의심을 했었지만 그것은 택도 없는 말이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나를 괴롭힌 것은 이복형의 어머니 원혼이다
나의 주변세계는 그것은 지옥세계나 마찬가지였다
부모나 형이 모두 짐이 되는 존재들이고 처가도 극빈하여 말은 안하지만 나로 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바라는 상황이었다
친조부는 북한에 계시니 얼굴도 못 보았고 외조부에 관하여서는 월북했다고 들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외할머니가 영등포에서 밀주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으셨다는 것은 5 6,7세인 나를 데리고 어머니가 친정집을 찿을 때 가보았기에 알고 있다
집뒤에 영등포역 이 있어서 시커먼 증기기관 기차를 보면 굉장히 흥분되었고
여의도는 공군기들이 이착륙 하는데 그것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당시에는 한강이 오늘날 처럼 넓고 크질 않고 노량진 쪽에 붙어서 좁은 강폭이 새파란 물빛으로 정지한듯 흐르고 있었고 주변일대는 모두 백사장이었다
지금 한강을 보면 그물이 모두 어디서 난건지 이해가 안된다
어머니가 위암으로 세상을 버릴 무렵 남동생을 찾아달래서 내가 광명시 철산동 산동네 하꼬방을 뒤져 외삼촌을 찾았으나 외삼촌 역시 이복형 처럼 술에 폐인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외삼촌은 술 취하면 사람에게 시비걸고 싸우는 괴벽이 있었다
아버지의 말년 사찰 생활이 비참했다는 것을 나는 늙어버린 지금에 와서 그것을 감지하고 있다
오늘날 요양원은 옛날 절간의 열반당과 같지만
절간 열반당은 돌봄이 없다 모두 남남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빨리 죽는다
오늘날 요양원 이 고통속에 노인들을 연명시키는거 보다는 차라리 절간 열반당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어머니만 그런게 아니라 이복형도 부모형제에게 돈을 빌려 막걸리를 사먹었고 그러다가 폐인이 된 것이다
이것 역시 여귀의 심술작난으로 이복형을 폐인으로 만들어 아버지에게 복수한것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가출을 반복하여 그럴 때마다 우리 형제들은 간장물을 탄 수제비 국을 만들어 먹는 상황이 계속되다가 내가 향천사로 가게 된 것이다
최근에 공장 간장이 염산으로 대두박을 녹여서 만든다는 것을 알았는데 내가 어려서 위장이 안 좋아 고생한 것도 그 때 먹은 염산간장 때문일것이다
절에 들어가서 몆년 살으니 위장이 다시 좋아졌다
나의 세번째 경험은 마납의를 입고 가부좌 자세로 수행하는 선배들이었다
칠월 백중 과 원보산 큰스님의 사십구일재가 지나자
향천사 천불전에서 가부좌 틀던 수좌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아무도 남지 않았지만
그들의 그런 모습을 나는 11세에 보았고 그것은 충격으로 기억속에 남아있다
숲속 나무에 기대서서 허탈한 표정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던
그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을까?
화두선을 배운 나는 그들도 그 때 화두선을 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대발인을 하고 가부좌를 한 자세로 하는 것은 호흡선이다
사실 화두선은 밭일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화두를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챙겨 시비분별을 일으키면 안 된다고 하니
사찰경제를 위한 농사일 땔감해 오는 일에 화두선을을 하게 되면
일 시키는 입장에서는 그 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일 꾼이 꾀도 부리지 않고 불평불만도 하지 않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화두선에 속아 넘어가야 화두선을 하게 되는데
평생을 하다가 명을 다해 죽으면 다음생이 없는 열반이 된다고 하지만
이는 에네르기 불멸법칙인 윤회전생 이치에 어긋난다
나는 화두선 평생하고 죽으면 다음생에 자폐아로 태어나는 것이지 화두가 열반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만난 그 어떤스님도 나에게 화두선을 권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 해인사 분위기에 휩쓸려 장경각 불당에서 삼천배 하고 백련암에 올라가 성철스님에게 화두를 받아 왔지만 타심통도 못하신 분인지 평소에 의심이 안들어 공부가 안되던 (시심마 )화두를 성철스님은 나에게 주셨던 것이다
선요)라는 화두선 입문서를 보면 화두는 대의단 대신심 대용맹심으로 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시심마 화두는 대의단이 생기지 않았다
조주무자 화두를 많이 한다고 들었다
조주 인심도무 ㅡㅡ 조주는 무엇 때문에 없다고 했을까?
차이나식 한자로 인심도무 이고 조선식한자로 하면 하이고 왈무 라고 한다
좌우당간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했는데 조주스님은 왜 개새끼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나
이점을 의단하라고 하니
어떤 아주머니는 개도 하나님이 만든 것이니 불성은 당연히 없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대의단이 생기지 않아 화두공부 는 파탄난다
대의단 이전에 대신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화두선을 하게 된 동기도
미끼를 탐하여 낛시바늘에 꿰이는 물고기 처럼 나 역시 어리석어서 화두선을 한 것이고 그 당시 선방에는 호흡선하는 수좌들도 있었겠지만 겉으로는 알 수 없었고 그 누구도 화두선과 호흡선을 비교하여 설명해준 선배들도 없었다
부모불효하고 인간노릇 못하며 입산수도 하였으면
최소한 타심통 숙명통 천안통 정도는 해야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화두선으로 도통을 하겠다고 해인사 퇴설당에서 철야정진을 하였다
기와장도 갈고 닦으면 거울이 되는가?
잠을 안자고 가행정진을 하니 우울증 이 심하게 찾아왔다
슬퍼지고 눈물이 쏟아졌다
주변에서는 비마가 들었다고 했다
겨울 동안거 석달 동안 나는 비마를 잠시 앓았고 선배수좌들은 광마에 잡히어 기괴한 언행을 보이며 법거량 하러 간다고 설치는 사람도 생겨 났다
광마는 할이나 봉을 휘두르고 기괴한 퍼포먼스 행위를 보이는 것인데
화두선 도량에서 자주 일어난다
이런 기괴한 언행을 깨달았다고 인정해주는 경우가 전통이었다
한마디로 어불성설 비상식적 인 언행을 언어도단 심행처멸 의 경지라고 하며 인정 해주는데 마음이 부처라고 하다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해도 되며 진흙소가 물위를 간다하고 불속에서 연꽃이 핀다고 한다
전통호흡선을 하여 얻어지는 육신통을 이들은 구두선 말장난으로 다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인 사카무니가 늘 했다고 하는 사선 사념처 사무색정 육묘문 안나반나 등이 호흡선이다
호흡에 의식을 붙여 일호일흡이 태식 상태가 되면 극기가 되는데 극기란 페로 호흡 하는것을 극복하고 피부로 호흡하는 것을 말한다
이 상태가 되면 호흡이 없는거 같이 되며 과거 미래가 일념으로 축소되어 법성게에 나오는 구세십세 호상즉이되고 몸의 내외가 하나가 되므로 육근이 호용되어 사념처에 이르며 타심통이 이루어지고 타심통으로 자기 몸속을 보고 숙명통을 이루며 숙명통으로 천안통에 도달하며 이 세가지 삼명을 회광반조하여 마음을 보아 견성성불한다
타심통이 정미로와지면 숙명통이 되고 숙명통을 심화하여 천안통 이 된다
화두선 수좌들은 이런 북방호흡선은 하지않고 화두선을 하는데 화두일념에 강하게 집착하므로 강박에 의한 정신분열 이 일어나 정신이 미치광이가 되고 미치광이의 언행을 언어도단 심행처멸 이라고 하여 도통했다고 인정하여 사찰의 책임자를 제수 해주니
송나라 왕실이 밀어주는 바보들의 집합장소에는 수천명 씩 모였다고 한다
이중에서 정신 멀쩡한 놈은 아직 멀었다고 하고 해괴한 언행을 하는 반 미치광이가 되면 인정하여 책임자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송나라 왕실은 화두선 선종이 무술을 하는 승병들이기에 적극지원 하였고
화두선은 송나라 대신들과 선종승병들을 순치하는데 좋은 방편이 되었다
어려서 어머니 품을 모르고 소년기를 속리산에서 보내고
사춘기에 잠시 이삼년간 양친 부모와 살았다
가내 수공업 하는 공장을 다니며 가정경제에 이바지 하였지만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회의감이 들자
다시 향천사로 돌아와 사미계를 받고 해인사 선방으로 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화두선이 직지인심 견성성불 하는 길도 아닌데
화두선하는 조계종 원노들이 유명 관광지 명산 대찰을 빼앗아 차지하여 사자좌에 높이 앉아
이런 훌륭한 말들을 악용하며 후학들을 속이니 하릴없이 기망 당한 것이다
직지인심은 수 많은 교리 철학을 배우지 않고 자기 마음만 깨달으는 것이니 마음 성품자리를 보아 성불 하는 것이 견성성불 인데 달마대사의 가르침이라고 알려졌다
달마는 안으로 마음이 헐떡이지 않고 밗으로 모든 인연이 그치면 도에 들어 갈 수있다고 했다
화두선은 화두삼매 화두일념이므로 마음이 의문심으로 헐떡 대는 것이지 내심무천 심여 명경지수 상태는 아니다 그러므로 화두선은 달마선이 아니다
그런데도 달마에게 갖다 붙이고 달마를 중국선의 초조라고 한다
달마가 스스로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임제종 의 대혜파 경산묘고는 송나라 황제 세조에게 자기들 화두선이
선은 부천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천님의 말씀이라면서
화두선이 달마가 전해준 직지인심 견성성불하는 법이라고
과장 망언을 하여 송 황제의 지원을 받아냈다
당시에 교종승려들이 선종에 반대가 심하여 송나라 세조황제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선종 교종 대 토론 대결 자리를 마련 했는데 경산 묘고가 이런 활약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종스님들이 부천님 마음이라는 선에 대해서 질문하니
경산묘고가 두팔로 허공에 원을 만들었다
이 때부터 임제종 종사들이 이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임제스님은 기합소리 할을 잘했다 덕산스님은 몽둥이 봉을 잘 했다
모두 무술불교라서 그렇다 임제종과 조동종 그리고 일본은 원래 중국 땅에 있었다
임제종 조둥종 은 사무라이 를 시자 (하급기관 ) 로 거느린 무술 승병불교이다
속 전등록) 에 나오는 양지방회는 창고관리를 하면서 초원을 스승을 모셨는데 법거량을 하려고 하면 스승은 창고 일이 많으니 나중에 하라고 하였다
비내리는 어느날 호젓한 산길을 산책하는 스승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이렇게 법거량을 했다
,,,, 이 늙은이야 ! 오늘 법거량을 안 받아 주면 때려주고 갈 것이다 ,,,,, 라고 하니
스승이 ,,,,, 감사도 이런 일을 아는가 ? 지금 바로 쉬어라!,,,,,
감사는 절내외를 감시 하는 소임이다
초원이 양지 방회에게 이런 일을 아는가? 하고 물었는데
법거량이란게 도를 깨달아 그것을 주고 받는게 아니다
화두선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어 다스리기 쉽게 하는 비밀방법임을 깨달으면
그것을 법거량으로 이심전심 인정해주고 자기 부하로 삼는 행위이다
초원의,,,,, 변휴,,,, 하라는 말에 양지방회는 즉시 진흙땅 위에서 절을 하였다
변휴)는 중국 남방의 구어인데 ,,,,. 변은 ㅡ 알았다 곧장 바로 빨리 ㅡ 라는 뜻이다
이렇듯 화두선은 반 미치광이가 되어 스승의 시각으로 볼 때 거두어 쓰는데 위험요소가 없을 때 인정해 주는 것이고 이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자기들 생각이 이심전심 으로 의기투합하면 인정해주고 인정받은 것인데 이는
달을 만지러 산 꼭대기에 올라 보거나 달을 잡으러 물속에 뛰어들어가 본 어리석음을 깨달은 사람끼리 서로 인정해 주고 카르텔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의 카르텔과 부동산 아파트 투기하는 속칭 떳다방 의 카르텔이 같은 것이다
같은 수법을 공유하며 같은 이익을 노리는 이들도 그 내막을 아는 사람끼리만 정보를 주고 받고 같은 선수들끼리 커무니케를 하지 이런 도리를 모르는 부류에게는 일체함구한다
이런 도리를 모르는 부류는 그들의 먹이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원이 양지방회에게 ,,, 감사도 이런 일을 아는가!? ,,,, 하고 입실을 허락한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경산묘고는 언계광문을 섬기었는데 어느날 광문이 시중하기를
,,, 소가 빈틀을 지나가는데 대가리 와 뿔 그리고 네다리가 모두 지나갔으나 무엇 때문에 꼬리는 지나가지 못하는가? ,,,... 하니
묘고가 거량하기를 ,,,, 고래 가 바다물을 다 삼키었는데 산호가지가 드러났다 ,,,, 하였다
이것이 도통한 경지인가? 이것은 그냥 말장난이다
이것은 석존의 사선 과 사념처 도 아니고 인도의 사무색정 도 아니다 또한
원시불교의 선정을 집대성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소승불교의 멸진정 구차제정도 아니다
달마의 외지제연 내심무천 심여장벽 가이입도 도 아니며 오직 중국 무술불교 선종에서 독특하게 발생한 말장난 말재주 가풍에 지나지 않는다
해인사 동안거를 보내고 나는 다시 오대산 상원사에서 여름 안거를 보냈는데
당시 상원사 주지승은 능혜스님 이였다
이 스님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강남 봉은사 땅을 이후락에게 평당 7백원에 넘긴 일당중에 한분이였다
나는 이런 일을 알고 상원사로 간 것은 아니지만 능혜스님은 참선하러 온 수좌들에게 인심 좋게 대하였다 자기가 한 일을 미안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 당시는 이런 양심이 살아있는 불교였다
조계종이 권력에 굴복하여 팔아 먹은 강남 땅이 어마어마 하니 지금의 강남 한전 위치도 그 때 넘어간 땅이다
바랑진 행각승의 구도 목표는 무엇인가?
해제가 되면 유랑만행하다가 다음 결제를 한다
바랑지고 대중교통과 도보로 이동하는 선객들
그들은 왜 집시처럼 떠도는가?
향천사 마당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행각승이 읍내에서 부터 바랑을 지고
힘겹게 경사를 올 라오는게 보인다
주지스님이 나에게 내린 명령은 달려 내려가 바랑 받아 지고 객스님을 객실로 모시고 공양상 차려드리는 일이다
그리고 사흘 후 떠나실 때 여비 봉투 드리는 일이다
나는 이 일을 많이 했는데 주지스님은 이 일로 인해 전국적으로 큰 스님이 되었다
선객들을 이판이라 하고 주지승을 비롯한 삼직승 을 사판이라 한다
사판승들은 주승들이다
큰방인 판도방에서 이판들이 앉는 줄을 백운좌라 하고 사판들이 앉는 줄을 청산좌라 한다
이판사판 공사판이라는 말도 이판 과 사판간에 갈등을 큰방 판도방에서 토의토론으로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청산좌 스님들은 소임을 짤 때 대중스님들의 합의하에 주지 총무 재무 교무를 뽑는다
뽑힌 사람들은 기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구도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부득이 하게 맡기는 하여도 한철 대중시봉하여 복짓는다는 심정으로 소임을 맡았다
지금처럼 사심 욕심으로 주지 총무 재무 교무를 서로 하려고 욕심 내지 않았다
어려서 부터 인생 쓴 맛을 많이 본 나는 생사를 괴로워하는 열반불교의 고해관에 쉽게 동의하고 세상일을 멀리하며 나그네가 낮선 마을에 하룻 밤 자고 간다는 인생관 과 세속을 고해로 보는 염세주의에 깊게 빠졌다
때문에 선방수좌 들은 모두 나와 같은 사상을 가진 멸업열반 불교 인 줄 알고 있었다
신라의 이차돈이 들여 온 자이나교의 멸업 열반 사상이 원래 불교라고 생각 했다
편단우견하지 않은 왕즉불 불교는 아예 알 수 없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는 칠불통계이다
화두선과 무관한 전통고불교 참선 법이다 이 수행을 하면 육바라밀 십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 되어 육신성불 법신성불이 되고 전륜성왕이 되거나 부천님이 된다
이 말은 육신성불로 무량대복을 완성하고 법신성불로 대지혜를 구족하여 복혜쌍전한 왕즉불
왕이 곧 부처 이니 말하자면 전륜성왕으로 삼십이상 팔십종호의 대인상을 받아 난다는 뜻이다
이런 수행을 위해 해제를 하면 다음 안거를 위해 쌀동냥 탁발을 하든지 짚신을 짜서 팔든지 머슴을 살든지 하여 다음 안거비용을 마련 했는데 이런 행위는 비구계목에서 파계행위에 해당한다
그런 사람들은 비구가 아니였다
수덕사의 경허큰스님도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그 집이 옛날 총각시절의 애인 이 시집가서 사는 대가집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소승비구들의 관점에서 보면 비난 받을 일이지만 경허스님 당시에는 비구란게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은 해제하면 해제비를 받아 절을 나오지만 예전에는 자기 식량 자기가 내놔야 했다
행자가 끼니 때마다 각자각자 스님들에게 일일이 쌀 을 받아와 밥을 지었다 한다
너홉쌀을 내주는데 한홉은 다른 함지박에 담아준다 이 쌀은 사찰 운영비이고 서홉쌀은 자기 밥이다
이른바 서홉밥 먹고 서말 잔소리를 듣는다는 속담은 사찰 대중방에서 공양후 벌어지는 연석회의 대중공사 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전통불교의 이런 문화는 비구계에서 걸식하라는 계목을 위반 한 것이다
나는 그런 비구계를 받고 비구계 에 맞지 앉는 한국에서 갈등과 모순을 겪으며 승려생활하느라 심한 심적 괴로움을 겪었다
버스 출발 하려고 하는 상황에서도 뛰어가면 안 되었고 호화스러운 옷을 입어도 안 되었다
돈을 요구하는 말도 하면 안 된다
추운 겨울 날 손발이 시리도록 장례염불 시달림을 하여도 돈 챙겨주는 따듯한 신도가 없으면
삼일장 염불수고비도 받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승려에 대해 잘아는 속인들이 이런 점을 악용하여 승려의 시달림 비용을 안 주는 경우가 있는데 시달림다니라 왕복 택시비도 못건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승복차림으로 입영하러 갔는데 입대장정들을 좌우로 굴러를 시키는데 나도 그 속에 섞여 누비 두루막을 입은 채로 좌우로 구른 일이다
승려 망신 을 다 시키고 다닌 것이다
비구는 어떠한 경우에도 불살생 불사음을 제일의 계목으로 지킨다
그런데 군사교육 이라니.! 아내를 둔 사실도 비밀로 해야하고 이런 갈등을 겪느라 나는 뼈만 남아 있었다
한번은 승복차림으로 네살 짜리 아들과 아내를 대로에서 만난적이 있었다
대전 영복선원에서 부전살이 를 하며 영어 학원에 다닐 때 였다
아들이 아빠 하고 크게 부르면서 뛰어 오는데 번쩍 안아 주면서
반갑기도 하면서 주변이 신경쓰였던 일이다
아내는 나의 이런 의중을 모른다
그냥 내가 보고 싶어 찾아왔고 나는 택시로 약속장소로 갔는데 택시에서 내리는 나를 보고 네살 짜리 아들이 아빠라고 소리치며 뛰어 온 것이다
시내에 있는 화장실에 들러 옷을 바꾸어 입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젊디 젊은 애송이 스님이 아빠라니 ? 승려는 독신아닌가 ?
주변에서 모두 우리를 주시하고 의아해 하는거 같았다
파계를 하고 음행을 하여 자식을 두었으면 마땅히 환속하는게 조계종 법이다
이걸 숨기고 비겁하게 살며 식당에가서 밥을 먹어도 육식은 하지 못하는 나 와 조계종 승려들 !
육식을 안 하고 어찌 살며 인구의 절반이 여자인데 음행에 안 걸리고 어찌 살 수 있을까 ?
이러한 비현실적 비구계 때문에 나의 젊은 날은 엄청난 자괴감 때문에 비참하였다
한국의 전통사찰들이 서세 정권에 의해 변질 되지 않고 전통을 유지했다면 무술불교 승병불교 국사불교
남사당불교 등을 유지하여 정치 군사 예술 문화적으로 태산 같은 세력을 견지하고 승려들은 오늘날 처럼 지키지도 못할 계율을 수지하여 낮에는 새 밤에는 쥐로 사는 위선자 사기꾼 노릇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구계가 아니라 칠불통계를 계정혜 삼학으로 수행하여 육신성불 법신성불 하는 도리를
내가 퇴속하기 전에 알았다면 나는 퇴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배운 현대불교에서 배운 불타관은 여래장 사상이다 원각경이나 능엄경에서는 대각이 부처인데 허공이 대각중에서 태어난 것이 바다에서 물방울 하나가 생긴것과 같고 먼지같은 유루미진국들은 모두 허공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부처가 그런 존재인데 어떠게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된들 무엇하겠는가?
어떠케 길고 긴 앞날 을 내 인생을 무얼하며 살아야 하나 ?
막막한 심정과 청춘의 절대고독감에 사로잡혔다가 악마를 만나 아들을 두게 되었다
아들을 낳아 주었으면 부천님을 낳아 준거와 같은 공덕인데 어찌하여 악마라고 하는가?
자식을 낳아 남편을 소모품으로 소비할 생각을 가진 여인들이 있다
암거미 처럼 새끼를 낳으면 남편거미를 식량으로 삼는다
비구를 파계시켜 남편으로 만들고 절재산을 도적질하고 남편의 모든 소유는 자기소유로 아는 여인들이 비구승 처소에 드나드는 일이 많다
이른바 비구승에게는 천적이며 사찰 도량 입장에서는 악마인 것이다
비구승은 이 들의 정체를 숨겨야 하고 이세가 태어나면 자기호적에 올리고는 조계종에 있을 수 없으니 다른 형제의 호적에 자기 소생을 올리게 되는데 이런 사실들이 자식들 정서교육에 불리하게 된다
절 법당안에 있는 법상을 사자좌라고 한다
사자는 신령한 존재가 아니고 그저 조폭동물에 불과하다
신성한 법당에 법좌를 사자좌라고 한다면 불교를 모욕하는 것이 된다
과거 승병불교에서 승병을 사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승병은 신라의 화랑이나 백제 일본의 사무라이인데 이들은 모두 도를 수련 하는 현자로서 사자에 비교 할 수는 없다
쫒겨난 떠돌이 사자는 언제나 암컷을 거느린 수사자를 죽일 생각만 한다
일단 성공하면 다른 수사자의 새끼들 중 수놈은 다 물어 죽인다
그래야 암사자들이 복종하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에서는 왕조의 생리가 사자와 같다
쫒겨나 밀림을 방랑한 사자는 다른 수놈을 용서 할수 없기 때문이다
암사자들은 수사자를 씨 받을 때 사용하고 그 다음에는 배척 한다
여자도 덩치가 좀 있는 여자들은 암사자와 같은 패턴을 보인다
암사자는 부하의 숫자가 부족하면 수사자를 찾아가 식구를 늘린 후 그 무리들을 지배한다
쓸만한 중하나 색으로 정복한 후 처옥자쇄 를 만든 후
절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여자들 대부분이 암사자 처럼 덩치가 좋은 편이다
절도량이 이런 사기꾼들의 먹이가 되면 안된다
내가 향천사에서 정월달 독불공 할 때 하루종일 각 전각 마다 마지 와 예산 국광사과 를 올리고 들기름 발라 잿불에 구운 김 그리고 무나물 콩나물 을 신중단에 올리고 코피를 쏟으며 뛰어 다녔지만 월급은 없었다
사십구재 때 마다 받는 봉투 금일봉 이 유일하었다
그 때는 재를 올리면 공양주 부목처사 까지 금일봉을 받았다
나는 모아놓은 이 돈을 갖고 봉천동 산 꼭대기에서 홀아비로 사시는 아버지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리움 때문에 몰래 도망쳐 간 것이다
역전에서 총무스님에게 잡혔지만 마음 착한 총무스님은 느슨하게 나를 잡고 계시다가 나를 놓치셨다
한 밤중에 봉천동에 도착한 나는 형제들을 데리고 고생하시는 아버지에게
그 돈을 드리고 싶었지만
시주돈을 수행 하는 일 외에 사사롭게 사용하면 빈궁보를 받는다고 하여 드리지 못하고 돌아 왔다 이 일온 늙어버린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후회이다
사실 시주돈이기는 해도 그 돈은 나의 심부름 값 발품 고생 값이었는데 나는 너무 어리석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런 생각조차 없다
이들은 모두 불법을 파괴하는 악마들이 다
나와 나의 은사도 두 마리의 암사자 들로 부터 색 공격을 받고 불가에서 패가망신 하였다
돈 욕심 내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상좌들을 월급 없이 봉사 시킨 은사스님은 꽤나 많은 돈을 모으셨지만 암사자에게 몽땅 빼았겼다
두마리 암사자는 하나는 은사스님을 맡고 하나는 은사스님을 경호하는 나를 공략 한 것이다
당시 나와 은사스님은 조계종에서 명성이 높았지만 조개에게 허망하게 무너져 일패도지 패가망신 한 것이다
모두 내가 멍청해서 생긴 일이다
은사스님의 상좌가 여러명 있었지만 중심에 내가 있었는데 모두 내가 못나서 생긴 일이었다
그 과보를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부친을 절에서 혼자 임종하게 한 죄 은사스님을 암사자로 부터 지켜드리지 못한 죄 은사스님이 병든 몸으로 이절 저절 떠돌다 임종하였는데 임종을 지키지 못 한 죄
그 죗값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역천 대불효 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화두선만 배워 조금해보니 그건 길이 아닌것임을 알겠고 승가대학에 들어가니 그 때는 몰랐지만 전통고불교 가 아니라 신라 때 들어온 그레코불교 = 자이나교리에다 육조대사 이후에 발생한 중국 화두선 사상 을 가르치고 있었다
전통고불교 와 진정한 동양역사를 오십대 중반에 알았고 그리스 철학 그레코 불교는 60대 초반에 비로소 알았으니 이미 때는 늦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을 속가에서 제대로 할 능력이 되지 못하여 사찰의 포교사 내지 승가대학 강사 부전 등을 하면서 혼인신고가 되어 승적이 무효되고 반승반속으로 살다보니 죽도 못되고 밥도 되지 못하였다
그나마 시간 틈틈이 숨겨 놓은 역사와 호흡선 불교 관련서적을 볼 수 는 있었다
주석
그레코 불교 ㅡ 대승불교 를 말한다
월지족이 신장성에서 오스만에게 밀려 박트리아 로 축출 되어 살다가 쿠산왕조 시대에 그리스 알렉산더의 침략으로 동서철학 이 만나 탄생사킨 불교 철학 이 그레코 불교이다 금강경 공사상 뿐 만 아니라 정토종 아미타불도 여기서 나왔음
구차제정 ㅡ 내용이 많으므로 (김동화 저) 선종사상사를 참조
경산묘고 ㅡ 1293년생 복주 장계사람 남송 세조의 신하이며 선종승려
복주는 오늘날 복건성 일것임 ( 주해 최남석 )
불립문자ㅡ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교외별전 ㅡ 교리 밖에 별도로 전하다
직지인심 ㅡ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르치다
견성성불 ㅡ 마음을 보아 부처를 이루다 견성은 마음을 보는 것인데 성이라는 한자가 가진 의미는 마음이 생긴다는 뜻으로 심방부 옆에 날생자로 만들어 졌다 마음은 십이연기로 생겨난다는 것을 사념처 신념처 심념처 법념처로 보면 이것을 견성이라고 한다
한자로 성은 이런 의미인데 지금은 남녀의 생식기로 쓰고 있으니 한심한 세상이다 ( 주소 최남석)
내심무천 ㅡ 마음속에 파동이 없는것
외지제연 ㅡ 밖으로 모든 인연이 그쳐진것
심여장벽 ㅡ 마음이 담벽 같다
가이입도 ㅡ 도에 들어갈 수 있다
대발인 ㅡ 왼손을 오른손 위에 포개고 엄지 손가락을 세워 맞대어 하단전에 붙이고 호흡선을 한다
사선 ㅡ 초선에서 이생희락=이욕의 청정락을 감수하고
이선에서 몸이 가볍고 편안한 신락을 감수
삼선에서 선정에서 나오는 정생희락을 감수하고
사선에서 불고 불락의 사념청정락을 감수 하며 해탈지견을 얻어 무루아라한 경지에 오르는 것
김동화 박사의 (선종사상사)에서는 사선의 각 단계 마다 각과 관을 수행한다 하였다
각 과 관은 지관인데 지라고 하지 않고 각이라고 한 이유는 사선에서 각은 지관 동시구족한 정혜쌍수 이기에 각이라고 한다 ㅡ 최남석 주소 ㅡ
ㅡ 사무색정 ㅡ
공무변처정 ㅡ 마음이 허공과 일치된것
식무변처정 ㅡ 허공과 일치하였지만 견문각지의 성품은 변하지 않은것
무소유처정 ㅡ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것
비상비비상 처정 ㅡ 생각은 아니지만 생각아닌것도 아닌것
양지방회 ㅡ 1049년생 원주 선춘사람 원주는 오늘날 어디인지 미상
멸진정 ㅡ 사선의 경지와 같지만 멸진정은 후유신을 받지 않음이 다르다
즉심즉불 비심비불 ㅡ 부대사와 마조도일선사 발언이다
마조도일은 709 ㅡ 788 년 대 사천성 한주 사람이다
한주는 나한사라는 절이 있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부처가 무엇이냐? 라고 질문을 받으면 즉심즉불이라고 하다가 어떤 때는 비심비불이라고 했는데 대매법상스님이 마조도일의 즉심즉불을 집착하자 ,,, 즉심즉불이 아니라 비심비불이라 ,,,,, 하니 대매법상이 이 말을 전해 듣고 말하기를 ,,, 그 늙은이 변덕이 죽 끓듯 하지만 그래도 나는 즉심즉불이니라 ,,, 했다
자운스님 ㅡ 조계종 비구계 율사로서 태국승려들의 복색을 하고 다녔슴
세민 스님 과 동대총장을 역임한 지관스님등이 자운스님 상좌이다 태국스님들의 복색을 승복위에 더 입고 다닌분이 자운스님이고 윤고암 스님은 오늘날 행자들이 입는 붉은색으로 승복을 지어 입으셨다
1973년도 해인사 주지이던 윤고암스님과 자운스님등 율사스님이 범어사에 와서 우리들에게 비구계를 주셨는데 나도 그 때 비구계를 수지하고 나중에 계목을 찬찬이 읽어 보았는데 그것은 그냥 하나의 이상이라고 생각 되었지 내가 그것을 현실적으로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타심통 ㅡ 외지제연 내심무천이 되면 나와너가 통일 되므로인간 동물 금수 뿐 만 아니라 식물하고도 마음이 통하여 지각을 같이 한다 이능력으로 내몸을 보면 몸속 모든 일이 보이는데 이것이 신념처이다
육근호용 ㅡ 눈으로 보는 것만 하는게 아니라 눈으로 촉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몸의 내외가 통일 되어 코의 능력인 냄새로도 형체를 보게 된다
수념처 ㅡ 고수 락수 사수 라는 감각작용이 십이연기에 의해 일념이 되는 것을 보는것
심념처 ㅡ 간에는 혼 과 노가 있고 폐에는 백과 비가 있고 비장에는 지와 락이 있고 신장에는 기억력 과 공포심이 있고 심장에는 이해력과 희가 있음을 체달하는 것을 심념처라한다
법념처 ㅡ 나와 너 내외 원근 삼세가 사방 과 삼세로 이루어지고 그것이 일심소작임을 깨달아 아는것
신념처 ㅡ 호흡의 극기로 인해 수행자의 마음이 안으로 회광반조 되어 몸속이 보이는 것
수념처 까지 회광반조하면 견성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