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연애를 하겠다는 건
제1장 뱀(蛇品) : 파멸의 문
(91)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때 거룩하신 스승(부
처님)은 사아밧티이(舍衛城)의 제타 숲, 고독한 사
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는 장자의 동산(祗樹給
孤獨園 = 祗園精舍)에 계시었다. 그 때 용모가 아름
다운 한 신이 밤중이 지났을 무렵, 제타 숲을 두루
비추면서 스승께 가까이 왔다. 그러더니 스승께 절
하고 한쪽에 서서 시로써 호소하는 것이었다.
"저희는 파멸하는 사람에 대해서 고오타마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파멸에 이르는 문은 어떤 것입니까? 스승께 그것
을 묻고자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92)
스승은 대답했다.
"번영하는 사람도 알아 보기 쉽고, 파멸도 알아 보
기 쉽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번영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망한다."
(93)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첫째 파
멸입니다. 스승님, 둘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
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94)
"나쁜 사람들을 사랑하고 착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
으며, 나쁜 사람이 하는 일을 즐기면, 이것은 파멸
의 문이다."
(95)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둘째 파
멸입니다.
스승님, 세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96)
"잠자는 버릇이 있고, 교제의 버릇이 있고, 분발해
서 정진하지 않고 게으르며, 걸핏하면 화 잘 내는
것으로 이름난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97)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세째 파
멸입니다. 스승님, 네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
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98)
"자기는 풍족하게 살고 있으면서 늙어 쇠약한 부모
는 돌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99)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네째 파
멸입니다. 스승님, 다섯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
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0)
"바라문이나 사문, 혹은 다른 걸식하는 이를 거짓
말로 속인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1)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여섯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2)
"엄청나게 많은 재물과 황금과 먹을 것이 있는 사람
이 혼자서 맛있는 것을 먹는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
이다."
(103)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여섯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일곱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
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4)
"혈통을 뽐내고 재산과 가문을 자랑하면서 자기네 친
척을 멸시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5)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일곱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여덟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6)
"여자에게 미치고 술과 도박에 빠져 버는 족족 잃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7)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여덟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아홉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8)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9)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아홉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열번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10)
"한창때를 지난 남자가 틴발 열매처럼 불룩한 유방
을 가진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
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11)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열번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열 한번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
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12)
"술과 고기 맛에 빠져 재물을 헤프게 쓰는 여자나
남자에게,집안 일의 실권을 맡긴다면,이것은 파멸
의 문이다."
(113)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열 한번
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열 두번째 것을 말씀해 주
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14)
"크샤트리야(武士)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 권세는 작
은데 욕망만 커서, 이 세상에서 왕위를 얻고자 한다
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15)
세상에는 이러한 파멸이 있다는 것을 잘 살펴서, 성
현들은 진리를 보고 행복한 세계에 이른다."
- <숫타니파타>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였다.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어머니가 일꾼들에게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하였다.
그런데 유대 사람의 정결 예법을 따라, 거기에는 돌로 만든 물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물 두세 동이들이 항아리였다.
예수께서 일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그래서 그들은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시니,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
잔치를 맡은 이는, 포도주로 변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온 일꾼들은 알았다. 그래서 잔치를 맡은 이는 신랑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구려!" 하였다.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징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니,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예수께서는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내려가셔서, 거기에 며칠 동안 머물러 계셨다.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
그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증언도 필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까지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요한복음 2장)
오늘 <숫타니파타>에서 “세상에는 이러한 파멸이 있다는 것을 잘 살펴서, 성
현들은 진리를 보고 행복한 세계에 이른다."를 보자.
석가모니가 살던 시대는 생존지수가 낮아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그래서 도둑질과 폭력과 살인이 생존력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을 텐데, 더 큰 살인이라는 정복 전쟁도 미화되어 있었을 텐데, 그러한 시대에 이처럼 윤리적인 문제를 말했다는 것, 실천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석가모니는 존경받아야 할 인물이 된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를 보자.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한 게 기이하게 들린다.
<꽃의 제국>에 나오는 글이다.
[서로 돕고 사는 공생관계는 정직하게 이득을 주고받는 규칙이 지켜질 때에만 유지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을 매우 이기적으로 이용해서 번식하는 대표적인 식물이 난초이다. 속씨식물에서 두 번째로 종이 많은 과가 난초과이며 이들은 대개 강한 좌우대칭의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난초 가운데 절반은 꿀을 생산하지만 절반 정도의 난초는 꿀과 꽃가루에 의존해서 매개자를 유인하지는 않는다. 어떤 난초는 향기를 보상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반짝이는 초록색 등을 가진 유글로신 수벌은 이 향기를 뒷다리의 주머니에 모았다가 암펄을 유인하기 위해 이용한다. 꿀도 향기도 만들지 않는 난초들은 꿀이 있는 다른 난초와 꼭 닮은 꽃을 피워 꿀이 있는 척 사기를 친다. 경험이 적은 순진한 매개자들이 이런 난초에 찾아와 꿀을 찾아 헤매면서 꽃가루받이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영원히 순진한 매개자는 없을 터이므로 이런 사기는 꿀이 있는 난초가 꿀이 없는 사기꾼 난초보다 많은 곳에서만 성공적이다.]
사기인가, 그저 살려는 난초의 삶인가? 즉 태생적으로 꿀을 만들지 못하는 난초는 아니었을까?
<나무처럼 생각하기>에 나오는 글이다.
[나무의 속도는 느리지 않다. 속도는 시간을 재서 수치화하고 그것을 평가하는 개념일 뿐이다. 생물마다 나름의 속도가 있듯이 나무도 자유롭게 자신의 속도에 맞춘다. 나무는 우주를 관장하는 시간의 주기에 따라 자란다. 이 고요한 존재는 느리게 출현하고 끈기 있게 성장하면서 세상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다. 앞서지 않고 뒤처지지도 않으면서 순응한다. 계절의 변화와 빛의 일상적인 변화에 예민한 나무는 살아 있는 클렙시드라(clepsydra, 고대 그리스의 물시계. 밑바닥에 몇 개의 작은 구멍이 있는 항아리로 원래는 물을 긷는 용도로 쓰였다. 이후 물의 유출량을 참고하여 법정에서의 변론 시간이나 초병의 교대 시각 측정에 사용하였다.)로 구현된 우주의 시간성을 따른다.]
위 글에서 “나무는 우주를 관장하는 시간의 주기에 따라 자란다.”를 보자.
이런 게 진짜 있을까? 궁금하다.
<나를 부르는 숲>에 나오는 글이다.
[숲은 여느 공간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입체적이다. 나무들은 당신을 에워싸고 위에서 짓누르며 모든 방향에서 압박한다. 경치를 가로막고 당신이 어디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도록 한다. 당신을 왜소하고 혼란스럽고 취약하게 만들어놓은 다음, 마치 낯선 사람들의 무수한 다리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사막이나 초원에 서면 광활한 공간 속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지만, 숲 속에 서면 당신은 오직 그것을 감지하는 것이 고작이다. 숲은 거대하면서도 특징 없는, 게다가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 있다.]
처음부터 숲이 좋다는 서술과 달라 기록해 둔다. 원시의 숲은 분명 이럴 것이다. 산을 거의 혼자서 다니는데, 처음 가보는 곳에서 혼자 갈 때 분명 숲은 공포가 흐르는 공간이다. 그걸 뛰어넘으면 즉 그곳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면 숲은 아늑해지겠지만 그럴 마음의 여유, 갖기 쉽지 않다. 만일 죽음이 임박하면 그럴 수도 있다. 내 경험이다. 산에서 다리가 부러진 경험.
스탕달의 <연애론>에 나오는 글이다.
[제2장 사랑의 발생에 대하여
1. 감탄
2. “저 사람에게 키스를 하고, 키스를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3. 희망
상대방의 미점(美點)을 여러 모로 검토한다. 최대의 쾌락을 맛보기 위해 여자가 몸을 내맡기는 시기는 이때일 것이다. 쾌락은 예리함을 수반하므로, 아무리 얌전한 여자라도 희망이 보이면 핏발이 서고 정열이 불타며, 언뜻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4. 사랑의 탄생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가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모든 감각을 가지고 되도록 가까이 접촉하며 보고 만지고 느끼는 데서 쾌락을 맛보는 일이다.
5. 첫 번째 결정 작용이 시작된다
사람은 분명히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여자를, 여러 가지 미점으로 감싸려고 한다. 끝없는 기쁨으로 자기의 온갖 행복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그것이 자기 것임에 틀림이 없는 확실한 소유물을 과장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머리를 24시간 동안 줄곧 돌아가게 하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겨울이 되어 잘츠부르크의 소금광산에 나뭇가지를 깊숙이 집어넣어 두었다가 2~3개월이 지난 후에 꺼내보며, 그것은 반짝이는 결정체로 덮혀 있다. 참새의 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가느다란 가지가 반짝이는 무수한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본래의 나뭇가지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결정 작용이라고 부르는 것은,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의 새로운 미점을 발견하는 정신작용이다.
여행자가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에, 제노아 바닷가의 오렌지 숲의 서늘함을 이야기한다고 하자. 그는 ‘그녀와 함께 그 서늘함을 맛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당신의 친구가 사냥을 가서 발을 삐었다고 하자. 그가 사랑하는 여자의 간호를 받는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언제나 그녀와 함께 웃으면서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고통도 축복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친구가 발을 삗 데서 비롯하여, 천사와 같은 애인의 우아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미점을 애인에게서 발견하기 위해서는, 다만 그러한 미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만 g도 족한 것이다.
내가 결정 작용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우리에게 쾌락을 맛보라고 명령하며 피를 뇌로 보내는 본성과, 쾌락은 사랑하는 자의 미점과 함께 증대된다는 의식과 또는 그녀는 내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야만인은 한 발짝 이상 앞으로 더 전진할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한다. 그들에게도 쾌락은 있으나 그들의 뇌의 작용은 숲 속을 도망치는 사슴을 쫓는 데 모조리 소비된다. 그 고기를 먹고 빨리 체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적의 도끼에 맞아 쓰러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극도로 문명이 발달된 곳에서는, 애정이 두터운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곁에서가 아니면 쾌락을 찾아볼 수 없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것은 야만인과는 정반대이다. 문명국에서는 여자가 여가를 갖지만, 야만인의 남자는 일에 쫓기므로 암컷을 짐승처럼 취급할 수밖에 없다. 많은 동물의 암컷이 인간의 여자보다 행복한 것은 수컷의 생활이 훨씬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숲을 떠나 파리로 되돌아가자. 정열에 사로잡힌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온갖 미점을 발견하다. 그러나 주의력이 산만해지는 때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든 단조로운 것에 싫증을 느끼고, 완전한 행복에 대해서도 권태를 느끼기 때문이다.
6. 의혹이 생긴다.
상대방의 열 번에서 열두 번에 걸친 눈길이나, 한순간이나 또는 며칠에 걸쳐 보여준 일련의 행동에서 우선 희망을 얻고, 이어서 그것이 헛되지 않을까 하고 불안해 하지만, 이윽고 남자는 최초의 놀라움에서 깨어나 그 행복이 만성이 되고 혹은 흔해빠진 변덕스러운 여자에게나 적용되는 이론에 이끌려 확실한 보증을 요구하며 더욱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남자가 너무 방심한 태도를 보이면, 상대방은 무관심과 냉담과 분노로 응수한다. 프랑스에서라면 “꽤 자신이 만만하시군요.” 하고 비꼬는 것이다. 여자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한때의 도취에서 깨어난 수치심에 억눌렸기 때문이거나, 또는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한 것이 걱정스럽거나 혹은 단순한 조심 내지 교태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는 지금까지 기대하던 행복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고 생각한 희망의 근거에 대해 엄격해진다.
그는 인생의 다른 쾌락을 맛보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 데도 없다. 무서운 불행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그를 사로잡으면 깊은 주의력이 생긴다.
7. 제2의 결정 작용
여기서 제 2의 결정 작용이 시작되어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굳힌다.
의혹이 생기던 날 밤, 무서운 불행의 한 순간이 지나면서 사랑을 하는 남자는 15분마다 중얼거린다. “그녀는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하여 결정 작용은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또다시 매서운 눈초리를 한 의혹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갑자기 그를 멈춰서게 한다. 그는 숨이 막힐 것 같다. 그는 중얼거린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이처럼 비통한 심정과 감미로운 심정에 교대로 사로잡히면서 가련한 애인은 분명히 느낀다. “그녀가 나에게 주는 쾌락은 그녀 외에 아무도 주지 않는다.”
그 진리의 확실성, 한 손은 완전한 행복을 느끼면서 더듬는 이 무서운 절벽 길-이것이야말로 첫 번째 결정 작용보다 두 번째 결정 작용을 훨씬 강력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사랑하는 남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생각 사이를 헤매게 된다.
1. 그녀는 모든 미점을 갖추고 있다.
2.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3. 그녀로부터 가장 큰 사랑의 증거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랑이 싹틀 무렵의 가장 비통한 순간은, 그가 잘못된 추측을 했다는 것을 알고, 하나의 결정을 파괴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이다.
그는 결정 작용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
스탕달이 말하는 사랑의 탄생 과정을 식물과의 사랑에 도입해 보면 어떤 문장이 만들어질까 궁금해 필사를 해놓는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경이로운 잠에서 깨어난 뒤의 이 찬란한 시간, 온몸이 온통 옴으로 충만된 이 순간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자기의 눈에 보인 모든 것을 다 사랑하는 것, 자기의 눈에 보인 모든 것을 다 기쁨이 넘치는 사랑의 감정으로 대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잠을 자는 동안 옴의 작용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매혹적인 현상의 본질인 것이다. 이제 돌이켜보니, 예전에는 마음이 너무나 병들어 있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이건 사물이건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탕달의 문장과 비교를 해보니 헤세는 절대 관념에 치우쳐 있는 것 같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나무와 연애를 하겠다는 건
사람이 싫어서일까?
사람은 감정의 언어를 통해
사랑도 주고 기쁨도 주고 슬픔도 주고 상처도 주고
그래서 말이 없는 나무와 연애를 하면
평온한 마음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
나무와 연애를 하는 걸까?
그러다가 나무와 뜨거워지면
나무들을 속속들이 알면
그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질까?
그러면 사람들을 종속적인 관계로 만들어
사람에게서 받았던 상처가 회복이 될까?
결국 나무와 연애를 하겠다는 건
사람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위작의 고통스러운 행진일까?
옴 샨티 샨티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