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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이우관(聊以愚管)
오로지 어리석은 소견으로 견해를 밝힌다는 뜻으로, 학문하는 사람은 그 주장을 할 때도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주장이 사리에 맞고 근거가 충분하지를 따져야 한다. 이는 학자로서의 겸손함을 밝힌 것이다.
聊 : 귀 울 요(耳/5)
以 : 써 이(人/3)
愚 : 어리석을 우(心/7)
管 : 대롱 관(𥫗/8)
중국 남북조 시대에 송나라 사람 배인(裵駰)이 사마천이 쓴 사기의 해설서인 '사기집해(史記集解)를 썼다. 그는 그 서문에 자신의 사기집해(史記集解)가 서광의 '사기음의'를 풀어 더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견해가 어리석은 견해임을 밝혔다. 이는 학자로서의 겸손함을 밝힌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은 그 주장을 할 때도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주장이 사리에 맞고 근거가 충분하지를 따져야 한다. 그것은 학자의 기본자세다. 배인은 그런 학자의 자세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학자라 하는 일부 사람들은 겸손을 잃고 근거가 미약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마구 펴기도 한다. 특히 학자들이 정치와 결탁이 되면 학자적 겸손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1. 겸손을 잃은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
성경에 이르기를 "겸손을 배우면 영광이 뒤따른다(구약성서 잠언 15:33)",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업신여기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다(구약성서 잠언 3: 34)"고 하면서 겸손을 마음과 몸에 익힐 것을 강조하였다. 겸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미덕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를 보면 그 아름다운 미덕인 겸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겸손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팽개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정치인들과 그 추종자들은 그 겸손의 미덕을 아예 헌신짝처럼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이 더 혼란스러운 것 같다.
우리 정치계에 막말 논란은 항상 문제가 되어 왔다. 총선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은 각 정당에서 지지표 이탈을 우려하여 막말을 단속하고 있지만 그래도 막말은 난무한다. 그 막말의 저변에는 겸손을 버린 오만이 절정에 다다른 모습이다.
정치인들이 그런 막말을 하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의 잘못된 이미지의 부각을 통해 자기의 이름을 알리고 또 그런 사람을 유권자인 국민 중 일부가 '속히 후련하다'는 식으로 동조하면서 지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상당수는 정치에 관계하면 겸손의 미덕을 버리고 악마화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이번 총선에 나온 사람 중 일부의 막말 부각되고 있다. 어느 후보는 그동안 대학교수를 한 사람이라 하기에는 무색할 정도로 막말을 해 왔다. 그가 한 말은 이대생 성 성납 문제니 어떤 이를 연산군에 비유하는 등 논리도 부족하고 근거도 없는 주장을 펴 사람들에게 공분을 사고 있지만 그는 당당하게 선거운동을 하고 있으며 일부에선 당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그것은 한쪽에선 날선 비판을 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지하는 사람들은 도덕성과 논리보다는 정치적 감정에 치우친 사람들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뿐이 아니다 상당한 후보자들은 자기를 과대평가하면서 대중에게 알리고 상대를 깎아내리고 흠집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선거운동에 있어서 겸손의 미덕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들이 그렇게 겸손의 미덕을 내팽개친 상당한 이유는 유권자인 국민이 그들의 그런 정치적 발언을 지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겸손을 잃은 사람들이 판을 치는 것은 굳이 정치인들만 아니라 어떤 유튜버는 아예 '겸손은 힘들다'로 하면서 겸손을 내팽개쳤음을 당당하게 겉으로 내세우는데도 그쪽의 지지 정치 그룹들은 그에게 열광하고 있다.
또 다른 상당수의 정치적 유튜버도 겸손을 아예 팽개치고 특정의 정치적 입장에서 근거도 미약하고 불투명한 이야기를 이슈화하며 대중을 현혹하고 있다.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이 어리석은 소견으로 세상을 논하고 있지만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하기보다는 오만하게 자랑하고 있으며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상당수의 대중은 그들의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며 춤을 추듯 동조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서 사회는 점점 양극화되어 가고 국민의 정치의식 또한 양분되어 가고 있다. 겸손을 잃어버린 사회임이 분명하며 그 대가는 국민이 톡톡하게 치를 것이다.
오늘날 겸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정치적 집단을 중심으로 판을 치면서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은 정치 사회적인 병리 현상이다. 그런 병리 현상에 물든 사회는 도덕과 인간성 상실이 도사리고 정치적 이전투구만 판을 친다.
겸손을 잃어버린 사회는 각박해지고 범죄가 늘어나며 염치를 상실한다. 염치를 상실하였기에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 등등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할 지경에 놓은 것이 아닌가?
이런 즈음에 옛날 학자와 인격자들이 항상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으면서 자기의 소신에 의한 주장을 펴면서도 겸손을 잃지 않았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대학자였던 배인이 사마천의 사기에 대한 해설서인 '사기집해(史記集解)'를 쓰면서도 오로지 어리석은 소견으로(聊以愚管) 자기의 견해를 밝힌다는 겸손한 자세를 보인 것을 돌이켜 본다.
2. 배인(裵駰)이 말하는 요이우관(聊以愚管)
배인(裵駰)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송나라 사람이다. 자는 용구(龍駒)이며 하동(河東)사람이다. 송나라의 중랑외병참군(中郎外兵參軍)의 벼슬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배송지(裴松之)이며 태중대부(太中大夫)의 벼슬을 지냈다.
배인은 구경(九經: 중국의 고전인 아홉 가지 경서로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주역, 시경, 서경, 또는 주역, 시경, 서경, 예기, 춘추, 효경, 논어, 맹자, 주례의 아홉 가지 경서를 말한다)과 여러 사서를 탐독하고 '한서음의(漢書音義)와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사마천이 쓴 사기의 해설서인 '사기집해(史記集解)'를 썼다. 그는 그 서문에 자신의 사기집해(史記集解)가 "서광의 '사기음의'를 풀어 더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견해가 어리석은 견해임을 밝혔다. 이는 학자로서의 겸손함을 밝힌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은 그 주장을 할 때도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주장이 사리에 맞고 근거가 충분하지를 따져야 한다. 그것은 학자의 기본자세다. 배인은 그런 학자의 자세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학자라 하는 일부 사람들은 겸손을 잃고 근거가 미약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마구 펴기도 한다. 특히 학자들이 정치와 결탁이 되면 학자적 겸손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오히려 자기의 왜곡된 주장을 자랑하며 힘주어 강조하기도 한다. 겸손함을 잃은 오만의 극치이며 학자적 양심을 버린 행위다.
인류의 대학자나 스승들은 항상 겸손하였으며, 자신의 견해가 언제나 틀릴 수 있음을 전제로 귀를 열어두었다. 배인 또한 대학자였기에 자신의 견해가 틀릴 수 있음을 전제로 자기의 어리석은 견해로 사리를 해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음을 밝혀 두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어리석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가 어리석고 좁음을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많지를 않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랬다. 그러나 진실을 추구하는 학자는 늘 세상을 좀 더 바르게 볼 것을 권하고 항상 겸손할 것을 권하였다. 따라서 배인이 말한 요이우관(聊以愚管)은 우리에게 자기의 주의 주장을 펼 때 겸손할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는 그 의미를 살필 필요가 있다.
3. 요이우관(聊以愚管), 겸손을 실천하는 세상
사람들이 겸손을 실천하는 세상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 평화와 화합이 깃든다. 무리한 주장을 펴면서 상대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건출한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다. 너 자신의 무엇을 알라는 것인가?
이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하지만 그중 하나는 '너는 지금 잘났다고 똑똑하다고 주장을 하지만 진리를 모르고 있음을 알라'는 것이다. '똑똑하다고 떠드는 너 자신이 결국은 무식하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사실 똑똑하다고 날뛰던 아테네 사람들은 그 정치적 편견으로 소크라테스를 고발하여 독배를 마시고 죽게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자기들이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후회하면서 소크라테스의 흉상을 만들고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인간의 이러한 편견과 오만함을 소크라테스는 '동굴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 동굴의 비유는 단순한 도덕적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이데아의 세계 등 고차원적인 세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단순화한다.
동굴 안에 불이 활활 피어오르고 그 불빛 때문에 동굴 안은 어둡지 않고 주변을 볼 수 있고 서로를 알아볼 수도 있다. 불을 지나면 좌우로 길이 나 있고 길을 따라 나지막한 담이 세워져 있다. 담 밑에서는 공연자들이 각종 도구와 모형을 들면 불빛에 의해 동굴 벽면을 비춘다. 동굴에서는 죄수들이 동굴 벽면에 비추어진 영상(그림자)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다리와 목이 쇠사슬에 묶여 평생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그들은 벽면에서 보는 것을 실물로 알고 있으며 감옥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벽면의 그림자가 내는 소리로 알고 있다.
그들 중의 한 명이 쇠사슬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불빛 쪽으로 온다. 그는 눈이 부셔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차츰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안다. 그는 태양이 비추는 곳에 오면 더욱 고통스러워 하겠지만 점차 태양 아래서 사물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플라톤 국가 제7권)
어쩌면 자기 확신과 확증 편향의 세계, 오만한 자기주장에 갇힌 세상 모든 사람은 인식에 있어서 동굴에 갇힌 죄수와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그들은 자기가 동굴에 갇힌 죄수임을 잊고 자기가 본 세상 자기의 인식이 확실한 것이라고 우길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불빛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실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특히 정치적 편견에 빠진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오늘날 정치적 확증 편향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은 동굴에 갇힌 죄수인지도모른다.
그러나 쇠사슬이 풀린 한 죄수가 불빛 쪽으로 갔을 때 눈이 부셔 보기 힘들다. 그래도 애써 불빛을 보면 지금까지 보았던 것들이 실체가 아닌 그림자였음을 깨닫는다. 그는 점차 태양을 바라보며 세상을 온전하게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눈부심을 참고 이겨내야 하는 고통의 감수가 따른다. 그것은 그동안의 편견과 오만을 이겨내고 진리를 바로 보려는 용기다.
편견과 오만, 확증 편향에 빠진 사람이 실체와 진리를 보면 눈이 부시고 두려워진다.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빛으로 나와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확증 편향에 빠져 오만하게 자기의 주장만 되풀이하는 사람들은 사실 인식에 있어서 진리와 진실을 보려는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리와 진실을 보려는 겸손함을 잃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정치적 확증 편향에 빠져 특정 정치 집단에 광적으로 지지하면서 팬덤을 이루고 다른 성향의 정치 집단을 공격하는 것은 그들이 소크라테스의 동굴의 비유처럼 '인식의 동굴에 갇힌 죄수'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의 주장이 틀렸음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기의 주장과 맞지 않는 주장과 견해는 무조건 틀렸다고 비판하고 공격한다. 그들은 자기가 얼마나 실체를 보지 못하고 그림자만 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래서 더욱 오만해진다.
그들은 '내가 잘못 보았을 수도 있다'는 겸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함은 진리를 향한 용기의 부족이다. 그들은 죄수가 불빛을 볼 때, 그리고 태양을 볼 때 겪는 눈부심을 극복하려는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의 동굴의 비유는 우리에게 진리를 보고 알기 위해서는 겸손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인식에 언제나 틀릴 수 있으며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본 것처럼 말하는 인식의 오류를 누구나 범할 수 있다. 그러기에 주장을 펴면서도 또 어떤 사물과 문장을 해석하면서도 자기의 견해가 어리석은 소견일 수 있음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요이우관(聊以愚管)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여기에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빛을 볼 때 눈부심을 이겨내는 것과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 겸손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한 용기다. 스스로 어리석음을 밝히는 것은 더 큰 용기다. 송나라 사람 배인(裵駰)이 사마천이 쓴 사기의 해설서인 사기집해(史記集解)를 쓰면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요이우관(聊以愚管: 오로지 어리석은 소견으로 견해를 밝힌다)고 했듯이 모든 사람이 스스로 어리석은 견해를 밝히고 있음을 내세우는 겸손함과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나를 돌아본다. 그동안 진리를 대함에 겸손하지 못하였던 적은 없었는가? 진리를 향한 일에 용기를 잃지 않은 적은 없었던가? 세상 사람들이 요이우관(聊以愚管)의 교훈으로 겸손을 실천하는 용기를 가지기를 바란다.
▶️ 聊(애오라지 료/요)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귀 이(耳; 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卯(묘, 료)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聊(료/요)는 ①애오라지(부족하나마 그대로) ②어조사(語助辭) ③귀가 울다(이명나다) ④힘입다 ⑤편안하다 ⑥즐기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의뢰할 뢰(賴)이다. 용례로는 구차한 모양을 요이(聊爾), 남에게 의지하거나 의뢰하여 살아 감을 요뢰(聊賴), 어울리지 아니하여 탐탁한 맛이 없음을 무료(無聊), 즐길만한 일이 없고 불평이 있다는 뜻으로 마음에 맞는 일이 없어 무료하고 그 끝에 남는 것이 불평이라는 말을 무료불평(無聊不平) 등에 쓰인다.
▶️ 以(써 이)는 ❶회의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람이 연장을 사용하여 밭을 갈 수 있다는 데서 ~로써, 까닭을 뜻한다. 상형문자일 경우는 쟁기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❷회의문자로 以자는 '~로써'나 '~에 따라'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以자는 人(사람 인)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以자의 갑골문을 보면 마치 수저와 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을 두고 밭을 가는 도구이거나 또는 탯줄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하고는 있지만, 아직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무엇을 그렸던 것인지의 유래와는 관계없이 '~로써'나 '~에 따라', '~부터'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그래서 以(이)는 ①~써, ~로, ~를 가지고, ~를 근거(根據)로 ②~에 따라, ~에 의해서, ~대로 ③~때문에, ~까닭에, ~로 인하여 ④~부터 ⑤~하여, ~함으로써, ~하기 위하여 ⑥~을 ~로 하다 ⑦~에게 ~을 주다 ⑧~라 여기다 ⑨말다 ⑩거느리다 ⑪닮다 ⑫이유(理由), 까닭 ⑬시간, 장소, 방향, 수량의 한계(限界)를 나타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일정한 때로부터 그 뒤를 이후(以後), 위치나 차례로 보아 어느 기준보다 위를 이상(以上), 오래 전이나 그 전을 이전(以前),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그 뒤로나 그러한 뒤로를 이래(以來), 어떤 범위 밖을 이외(以外), 일정한 범위의 안을 이내(以內), 어떤 한계로부터의 남쪽을 이남(以南), 어떤 한계로부터 동쪽을 이동(以東), ~이어야 또는 ~이야를 이사(以沙), 그 동안이나 이전을 이왕(以往), 까닭으로 일이 생기게 된 원인이나 조건을 소이(所以), ~으로 또는 ~으로써를 을이(乙以), 어떠한 목적으로나 어찌할 소용으로를 조이(條以), ~할 양으로나 ~모양으로를 양이(樣以), 석가와 가섭이 마음으로 마음에 전한다는 뜻으로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뜻은 마음으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는 말 또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말을 하지 않아도 의사가 전달됨을 이르는 말을 이심전심(以心傳心),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뜻으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당해 내려는 어리석은 짓을 일컫는 말을 이란투석(以卵投石), 대롱을 통해 하늘을 봄이란 뜻으로 우물안 개구리를 일컫는 말을 이관규천(以管窺天), 귀중한 구슬로 새를 쏜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손해 보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이주탄작(以珠彈雀), 독으로써 독을 친다는 뜻으로 악을 누르는 데 다른 악을 이용함을 이르는 말을 이독공독(以毒攻毒), 열은 열로써 다스린다는 뜻으로 힘에는 힘으로 또는 강한 것에는 강한 것으로 상대함을 이르는 말을 이열치열(以熱治熱), 옛것을 오늘의 거울로 삼는다는 뜻으로 옛 성현의 말씀을 거울로 삼아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이고위감(以古爲鑑), 새우로 잉어를 낚는다는 뜻으로 적은 밑천을 들여 큰 이익을 얻음을 일컫는 말을 이하조리(以蝦釣鯉), 손가락을 가지고 바다의 깊이를 잰다는 뜻으로 양을 헤아릴 줄 모르는 어리석음을 이르는 말을 이지측해(以指測海),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이식위천(以食爲天),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댄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기만하고 권세를 휘두름을 이르는 말을 이록위마(以鹿爲馬), 하나로써 백을 경계하게 한다는 뜻으로 한 명을 벌하여 백 명을 경계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이일경백(以一警百), 털만으로 말의 좋고 나쁨을 가린다는 뜻으로 겉만 알고 깊은 속은 모름을 이르는 말을 이모상마(以毛相馬), 남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자신을 경계함을 이르는 말을 이인위감(以人爲鑑), 백성을 생각하기를 하늘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백성을 소중히 여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음을 일컫는 말을 이민위천(以民爲天), 피로써 피를 씻으면 더욱 더러워진다는 뜻으로 나쁜 일을 다스리려다 더욱 악을 범함을 이르는 말을 이혈세혈(以血洗血), 양으로 소와 바꾼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 대신으로 쓰는 일을 이르는 말을 이양역우(以羊易牛), 과거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미래를 미루어 짐작한다는 말을 이왕찰래(以往察來), 불로써 불을 구한다는 뜻으로 폐해를 구해 준다는 것이 도리어 폐해를 조장함을 이르는 말을 이화구화(以火救火) 등에 쓰인다.
▶️ 愚(어리석을 우)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마음심(心=忄;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에둘러 번거롭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禺(옹, 우)로 이루어졌다. 마음의 움직임이 느림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愚자는 '어리석다'나 '고지식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愚자는 禺(원숭이 옹)자와 心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禺자의 사전적 의미는 '꼬리가 긴 원숭이'이다. 원숭이는 사람과 닮았지만, 사람처럼 지능이 뛰어나지는 못하다. 그래서 愚자는 원숭이처럼 머리가 나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어리석다'를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愚(우)는 ①어리석다 ②우직하다 ③고지식하다 ④어리석게 하다 ⑤나(자기의 겸칭) ⑥어리석은 사람 ⑦어리석은 마음 ⑧자기(自己)에 관계되는 사물에 붙이는 겸칭,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리석을 당(戇),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슬기 지(智), 어질 현(賢)이다. 용례로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놀림을 우롱(愚弄), 어리석고 둔함을 우둔(愚鈍), 어리석고 고지식함을 우직(愚直), 어리석고 몽매함을 우매(愚昧), 아주 어리석은 남자를 우물(愚物), 어리석은 남자를 우부(愚夫), 어리석은 사람을 우인(愚人), 어리석은 사람을 우자(愚者), 자기 아들의 겸칭을 우식(愚息), 어리석은 생각을 우견(愚見), 어리석은 백성을 우민(愚民), 어리석은 질문을 우문(愚問), 무지하고 포악함을 우악(愚惡), 매우 못나고 어리석음을 우애(愚騃),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음을 암우(暗愚),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범우(凡愚), 어짊과 어리석음을 현우(賢愚), 엄청난 바보를 상우(上愚), 아주 어리석고 못남 또는 그 사람을 하우(下愚), 크게 어리석음 또는 그러한 사람을 대우(大愚),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중우(衆愚),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석음을 혼우(昏愚),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남이 보기엔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언젠가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을 우공이산(愚公移山), 어리석은 남자와 어리석은 여자라는 말을 우부우부(愚夫愚婦), 어리석은 질문에 어리석은 대답이라는 말을 우문우답(愚問愚答),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대답이라는 말을 우문현답(愚問賢答), 어리석은 자도 한 가지 득은 있다는 뜻으로 어리석은 자라도 수많은 생각을 하다보면 하나쯤 쓸모 있는 생각도 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우자일득(愚者一得),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서로 속인다는 말을 우지상기(愚知相欺), 적고 어리석어 몽매함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우몽등초(愚蒙等誚), 어리석고 못난 사람의 버릇은 고치지 못한다는 말을 하우불이(下愚不移) 등에 쓰인다.
▶️ 管(대롱 관/주관할 관)은 ❶형성문자로 筦(관)과 동자(同字)이다. 竹(대나무 죽)과 官(벼슬 관)을 합쳐 대롱을 나타낸 글자이다. 후에 관악기, 맡다의 뜻으로도 쓰였다. 음(音)을 나타내는 官(관)은 위에서 보면 둥글다는 것이고, 또 貫(관)과 음(音)이 같고 속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고, 官(관)은 여섯개의 구멍이 있는 대나무로 만든 퉁소를, 또 붓대 따위 관 모양의 것을 말한다. ❷형성문자로 管자는 ‘대롱’이나 ‘주관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管자는 竹(대나무 죽)자와 官(벼슬 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官자는 높은 곳에 지어진 관사를 그린 것으로 ‘벼슬’이라는 뜻이 있다. 管자는 본래 육공악기(六孔樂器)로 불리던 악기의 일종을 뜻했었다. 대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竹(대나무 죽)자가 의미요소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管자는 이렇게 피리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지만 지금은 주로 ‘맡다’나 ‘주관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발음요소로 쓰인 官자의 의미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管(관)은 (1)속이 비고 둥글며 기름하게 된 것. 대롱 (2)아악기(雅樂器)의 한 가지로서 오죽(烏竹)으로 만든 피리. 한쪽 편을 베어서 두 개를 맞대어 붙임. 길이가 한 자 남짓하며 다섯 쌍의 구멍이 있음 등의 뜻으로 ①대롱, 관 ②피리(악기의 하나) ③붓대, 붓자루 ④가늘고 긴 대 ⑤고동(기계 장치), 추요(樞要) ⑥열쇠 ⑦집, 저택(邸宅) ⑧맡다, 다스리다 ⑨주관(主管)하다 ⑩불다, 취주(吹奏)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람을 통제하고 지휘 감독하는 것을 관리(管理), 권한에 의하여 지배함을 관할(管轄), 차지하여 맡아봄을 관장(管掌), 관리하는 구역 안을 관내(管內), 관리하는 지역 밖을 관외(管外), 관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을 관악(管樂), 대롱 구멍으로 표범을 보면 그 가죽의 얼룩점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에서 견식이 좁음을 이르는 말을 관규(管窺), 거느리어 다스림을 관제(管制), 관형으로 된 우물을 관정(管井), 모습을 살펴 봄을 관형(管形), 물건을 어느 곳에 안전하게 두는 것을 보관(保管), 책임을 지고 맡아 관리함을 주관(主管), 관할을 옮김을 이관(移管), 혈액을 체내의 각부로 보내는 관을 혈관(血管), 맡아 관리하거나 관할하는 바 또는 그 범위를 소관(所管), 전체를 총괄 관리함을 총관(總管), 물이나 김 등을 통하게 하는 관을 도관(導管), 호흡기의 일부분을 기관(氣管), 두 가지 일을 겸하여 주선함을 겸관(兼管), 연기를 뽑기 위하여 만든 관을 연통관(煙通管), 배전선을 넣으려고 쇠붙이나 플래스티크 따위로 만든 대롱을 전선관(電線管),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에 공기를 보내기 위한 관을 통풍관(通風管), 관중과 포숙처럼 친구 사이가 다정함을 이르는 말로 친구 사이의 매우 다정하고 허물없는 교제 또는 우정이 아주 돈독한 친구 관계나 허물없는 친구 사이를 이르는 말을 관포지교(管鮑之交), 대롱 구멍으로 표범을 보면 표범의 얼룩점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시야가 매우 좁음을 이르는 말을 관중규표(管中窺豹),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본다는 뜻으로 소견이 좁은 것을 이르는 말을 관중지천(管中之天), 대롱으로 엿보고 송곳이 가리키는 곳을 살핀다는 뜻으로 작은 소견이나 자기 견해를 겸손하게 말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을 관규추지(管窺錐指), 대롱을 통해 하늘을 봄이란 뜻으로 우물안 개구리를 일컫는 말을 이관규천(以管窺天), 대롱을 통해 하늘을 살핀다는 뜻으로 소견이나 견문이 좁음을 이르는 말을 용관규천(用管窺天)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