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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연기의 보편적 원리와 특성
-전재성-
3. 연기의 특성
2) 연기의 여실성
2) 연기의 여실성 연기의 객관성 연기는 여실한 것(tathata:여법이)이다. 이것은 연기의 객관성을 지적한 것이다. 현대에서의 허무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집단들은 인과적 연관이라는 개념을 ‘ 미신의 대상, 유추적 허구, 미신, 신화 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붕게에 따르면 “인과적 설명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설명을 거부하고 기술을 선호하는 현상론자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구체적 사건들 사이의 특히 발생적 연결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은 모든 주관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상응편아함에서 분명히 그러한 주관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인과 법칙의 객관적 명증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나는 것으로,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도리는 정해져 잇으며, 법으로 확립되어 있으며, 법으로 결정되어 있으며, 이것은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것을 잘 깨닫고 이해하며, 잘깨닫고 이해하고 나서, 설명하고, 가르치고, 시설하고, 앞에 두고, 열어 보이고 분별하고, 명확히해서 ‘너희들은 보라’ 고 말한다.” 여기서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도리는 정해져 있다’ 라는 것은 곧 인과율의 보편타당성을 의미하며 ‘법으로 확립되어 있으며 법으로 결정되어 있다’ 는 의미는 인과적 결정론을 언명하고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인과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붓다고싸는 주석서에서 tathata를 “많지도 적지도 않게, 이러 저러한 조건들만이 이러 저러한 법을 생기하는 것이 tathata 이다” 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깔루빠하나에 의하면 붓다고싸가 완전히 잘못 파악한 것으로, 이러한 진술은 단순히 인과적 계열의 규칙성이나 연쇄의 선형성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히려 갈릴레오가 정의한 인과법칙의 규칙적 조건부에 대한 진술로 바단따 스리라바와 맥락을 같이하는 전체성의 인과를 포함하는 인과의 법칙성에 대한 유위법적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또한 여기서 ‘이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 는 사실적 세계의 실제적 특성을 반영한다는 것으로 단순히 인과관계가 관념들 사이의 관계가 아님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과관계가 사실적 세계의 실제적 특성에 대응하는 연관과 결정의 범주인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연기적 인과관계는 객관적 형식을 갖는 존재론적인 지위를 갖는다. 그리고 인과관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식론적인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여래는 그것을 잘 깨닫고 이해한다(tam tatha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여기서 잘 깨닫는다는 것은 붓다고싸에 따르면, “지혜로써 깨닫는다(nanena abhisambujjhati)” 라는 의미이며, 이해한다(abhisameti)는 뜻은 “손에 넣다, 실감하다, 현관하다” 라는 뜻으로 이 문귀가 포함되어 있는 상응편아함의 인연경 마지막 귀절 가운데의 “있는 그대로를 지혜로서 잘 관찰한 것(yathabhutam sammapannaya sudittho)”을 뜻한다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대로를 실감한다, 체험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사실적 세계에 대응하는 연기론적인 연관과 결정은 인식의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 알려진 것’으로 결코 존재론적으로 허구가 아니며 따라서 인식론적으로 효과적인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인 토대위에 여래는 “설명하고, 드러내고, 시설하는” 개념의 지평 위에서의 연기론을 재구성하여 이론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개념적 구성은 다시 경험에 의해 검증가능한 원리로 천명되고 있다: “ 앞에 두고, 열어 보이고, 분별하고, 명확히 해서 ‘너희들은 보라’” 이러한 경험적 진술은 연기의 실천적 원리로서 검증가능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데 검증가능의 원리는 과학적으로는 법칙에 의한 실제적 적용에서의 예측가능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예측가능성의 원리가 “예측은 틀릴 수도 있고 완전해 질 수도 있는 인간의 능력” 에 의존하듯이 연기의 실제적 적용에서의 검증가능의 원리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논의한 붓다의 연기에 관한 객관적 진술은 현대과학이 추구하는 존재론적이나 인식론적으로 그리고 경험론적으로 타당한 여러 조건들을 만족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기의 존재상의 계기성 연기가 사실적 세계의 실제적 연관을 나타내는 존재론적 속성을 지닌다면, 인과의 관계는 존재론적 계기의 관계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과관계가 시간적 계기가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 초기 경전에서는 분명히 연기법의 무시간성이 언급되어 있다: “ 세존께서 선설하신 법은 현실적인 것으로 무시간적이고 와서 보라는 것이며,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이며, 현자에게 스스로 알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붓다가 선설하신 법은 무시간적인 것(akalika)이란 사실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다른 경전에서는 생성과 소멸의 사제적인 연기법이 곧 무시간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 수행승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와 같이 늙고 죽음을 알고, 이와 같이 늙고 죽음의 발생을 알고, 이와 같이 늙고 죽음의 소멸을 알고, 이와 같이 늙고 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잘 안다면 이것이 그의 법에 대한 지식이다. 그는 보여진 것이고 알려진 것이고 무시간적으로 성취되는 심오한 이 법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에 관해서 동일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S.N. 2) 연기법은 감각적 지각이나 초감각적 지각에 의해 보여진 것이고 알려진 것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만큼 경험적인 사실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보여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에 의해 보여지거나 알려진 것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방법을 취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보여지거나 알려진 것은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변의 유나 무를 인정하지 않는 차원에서 중도적이고 인과원리와 관계된다는 측면에서 연생적 존재론을 뜻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차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연기의 특징이 그것의 무시간성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상대적인 과거, 현재, 미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의 의미에서의 보편적 시간의 무를 뜻하는 것이다.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가능하다면 더욱 중요한 철학적 귀결을 갖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시공으로 대체한 것을 실체의 범주를 예전보다 더욱 적용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예전에 실체의 본질은 시간을 통해 지속했지만 이제는 보편적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기법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나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적용된다는 의미 이상의 중대한 인과관계의 본질적 특성을 함축하고 있다. 인과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언제나 시간지연이 존재한다는 관점이 일반화되어 있다. 흄과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인과문제에 관심을 갖는 많은 학자들은 원인이 시간적으로 결과보다 앞서는 것은 인과성의 본질이라고 말해왔다. 또한 러셀은 “만일 원인과 결과가 있다면, 그것들은 유한한 시간간격으로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르트만은 “인과성이란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나중에 일어난 것은 앞에 일어난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약유차즉유피와 약생차즉생피의 원리를 검토해보면, 거기에는 실제로 원인의 시간적 우선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것들은 결과가 일어나려면, 원인이 있어야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그것들이 시간상의 계기를 수반하지는 않는다. 인과성은 공간상의 어던 특정한 점에서든지 아니면 공간상의 서로 다른 지역에 위치한 계들 사이에서든 상관없이 동시적 연결과 모순되지 않는다. 아무런 시간시연을 포함하지 않는 원격작용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웨띠무니는 “현실적이고 무시간적인” 연기를 ‘즉시 볼 수 있고 시간을 포함하지 않는’ 연기롤 해석한 것은 이러한 시간지연을 포함하지 않는 동시적 인과관계를 함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듯이 그것이 ‘지금 여기(here and now)’ 의 인과관계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인과관계에는 일반적으로 시간지연이 포함되며 공간상의 원격작용이 배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지연을 포함하는 시간상의 계기에 대한 고전적 관념에 대한 변화가 특수상대성 원리에 의해 도입되었다. 시간계열들은 상대적이다. 즉 시간계열들은 반드시 관찰자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무한한 수의 좌표계들 가운데 하나인 좌표계에 좌우된다. 따라서 특정한 좌표계에서 1, 2 의 순서로 도착하는 두개의 빛 신호들은 다른 좌표계에서 2, 1로 도착될 수 있다. 이것은 인과적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 두 사건 사이에 시간계열은 역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곧 원인들의 시간순서는 좌표계에 따라 상대적이며, 그 순서가 역전될 때에는 공통의 기원을 갖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과적 연관은 불변인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시간적인 계기를 함축하는 지연작용의 원리는 인과율과는 독립적인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과적 작용은 무시간적이다. 그러나 시간성과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초기 불교를 연구한 최근의 학자들은 시간은 존재의 범주가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시간이란 그 자체로서는 없고, 연속이 다소간 잘 조절된 연속적인 업들과 불연속적 업들이다.” 과거, 현재, 미레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설일체유부의 이론은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언어사용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세가지의 분명한 언어적 관습, 단어의 사용, 용어의 선택이 있다. 그것들은 과거에 분명했고 현재에 분명하고 미래에 분명할 것이며, 현명한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비난받지 않는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어떠한 물질이건 지나가 버리고 소멸하고 변해버려 ‘그것은 있었다’ 라고 불리우고, ‘그것은 있었다’ 라고 명명되고, ‘그것은 있었다’ 라고 서술되면, ‘그것은 있다’ 라든가, ‘그것은 있을 것이다’ 라고 불리우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건 생겨나지 않고 나타나지 않아서 ‘그것은 있을 것이다’ 라고 불리우고, ‘그것은 있을 것이다’ 라고 명명되고, ‘그것은 있을 것이다’ 라고 서술되면, ‘그것은 있다’ 라든가 ‘그것은 있었다’ 라고 불리우지 않는다. 어떠한 물질이건 생겨나고 나타나서, ‘그것은 있다’ 라고 불리우고 ‘그것은 있다’ 라고 명명되고 ‘그것은 있다’ 라고 서술되며 ‘그것은 있었다’ 라든가 ‘그것을 있을 것이다’ 라고 불리우지 않는다.’ 이러한 진술은 분명히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해 궁극적인 실재를 주장하는 잘못을 경계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있었다’ , ‘있다’, ‘있을 것이다’ 라는 언어사용에 붙여진 명칭에 불과하다. 붕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변화는 근본적인 것이고 시간은 파생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흄과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옹호된 인과관계에 대한 시간이론은 거꾸로 된 것이며, 시간에 대한 인과이론이 확립된다. 이러한 조치를 취하자마자 경험주의의 주춧돌은 치워지게 된다. 그러한 조치가 저명한 경험주의자들에 의해 취해졌을 때, 그것은 현대 경험주의의 심각한 위기의 신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있었다’ 는 약멸차즉멸피의 원리에 따라 소멸된 것에 대한 명칭이고, ‘있다’ 는 약생차즉생피의 원리에 따라 생겨난 것에 대한 명칭이다. 이들은 존재론적 기반을 갖는다. 그러나 ‘잇을 것이다’ 는 약생차즉생피나 약멸차즉멸피의 원리에 따른 인식론적 기반을 갖는 인과의 예측 가능성을 의미한다. 초기 불교에서 이러한 예측가능성은 실제적인 인과의 법칙에 대한 지식인 법지(法智: dhamma nana)와 추론적인 검증과 예측에 대한 지식인 유지(類智: anvaye nana)에 토대를 두고 있다. 법지란 무시간적인 현재적 인과성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며, 유지란 이 법지를 통해서 과거에 관한 검증과 미래에 관한 예측을 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와 같이 늙고 죽음을 알고, 이와 같이 늙고 죽음의 원인을 잘 알고, 이와 같이 늙고 죽음의 소멸을 잘 알고, 이와 같이 늙고 죽음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잘 안다면 이것이 그의 법지(法智)이다. 그가 보고 알고 무시간적으로 도달해서 깊이 들어간 이 법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낸다. 어떠한 수행자 성직자들이라도 과거에 늙고 죽음을 파악했고, 늙고 죽음의 원인을 파악했고, 늙고 죽음의 소멸을 파악했고, 늙고 죽음의 소멸로 이르는 길을 파악했다면, 이들 모두는 내가 지금 그러하듯이 같은 방법으로 이와 같이 파악했던 것이다. 어떠한 수행자 성직자들이라도 미래에 늙고 죽음을 파악할 것이고, 늙고 죽음의 원인을 파악할 것이다. 늙고 죽음의 소멸을 파악할 것이고, 늙고 죽음의 소멸로 이르는 길을 파악할 것이라면, 이들 모두는 내가 지금 그러하듯이 같은 방법으로 이같이 파악할 것이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유지(類智)이다.” 이러한 유지에서 과거에 대한 검증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숙명통의 초월지로서, 타인에 관해서는 천안통의 초월지로서 기억에 관해 직접 지각함으로서 알려지고 그 인과적 관계는 법지에 바탕을 두고 유지에 의해 검증된다. 이러한 검증을 바탕으로 인과적 원리는 미래에도 적용될 수 잇는 예측가능성이 확립된다. 그러나 인과적 필연성이 곧 예측가능성은 아니다. 인과적 필연성이 결여되면 예측가능성도 결여되지만, 예측가능성의 결여는 인과적 필연성의 결여를 수반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측가능성의 바탕이 되는 인과적 필연성이 무조건적 결정론이거나 무조건적 비결정론이 아닌 것을 의미한다. 카르납은 인과관계를 예측가능성을 의미한다고 규정했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예측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그 이전의 모든 상황이 알려졌더라면, 그 사건은 예측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의 예측가능성을 뜻한다” 고 했다. 이러한 예측가능성은 단일한 사건에 대해 모든 원인을 알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 좌우되는 유위법적인 것이다. 그러나 단일한 사건이라도 모든 원인을 소급해서 안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철학적으로 불합리한 것으로 그것은 직접적인 지각의 체험을 통한 추론이나 확대되거나 정제된 감각적인 지각의 체험의 한계내에서만 알려질 수 있다. 초기 불교에 의하면 감각적 지각 체험의 한계는 수행을 통한 감각적 지각의 영역을 확대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지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예측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현실에 대한 지각체험과 기억에 대한 초감각적 지각에 의한 인과적 검증을 바탕으로 한 귀납적 추론이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적 사건에 대한 직접지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전에는 미래에 관해 직접적인 초감각적인 지각은 있을 수 없으므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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