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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11,1-10>
그날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4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5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15,4-9>
형제 여러분,
4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5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6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8 나는 단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조상들이 받은 약속을 확인하시고,
9 다른 민족들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칩니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3,1-12>
1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3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오늘은 대림 2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주일이고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대림 1주일에 ‘그분이 오시니, 기뻐하고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다가온 주님을 맞이할 채비를 서둘러라 하십니다.
곧 그분을 맞이하는 데 합당한 자가 되라 하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주님의 영이 머무르는 분”(이사 1,2)으로 소개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오신 그분이 “할례 받은 이들의 종”(로마 15,8)이 되셨음을 말합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분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태 3,11)
첫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사실 '뒤'가 아닌, '지금' 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뒤'지만, 시점으로는 '지금'입니다.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분이 ‘드디어 오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막 오고 계신다’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줍니다.
곧 그분께서 미래가 아닌, ‘지금’ 오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우리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지금 오시는 분’에게로 집중시킵니다.
자신은 단지 그분의 ‘길을 닦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 일입니다.
자신을 주변으로 밀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 바로 여기에 우리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둘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곧 '종'될 자격마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인격을 만납니다.
사실 타인을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이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어리고 후배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종’의 자격마저도 없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영웅적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깨달은 데서 나오는 겸손입니다.
그래서 셋째 증언에서 요한은 그분께서는 당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곧 ‘신원의 차이’와 ‘사명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은 그분께서 ‘용서할 수 있는 분이요,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그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대림 제2주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세례 때 이미 받은 '새로운 생명'과 '용서'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는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준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곧 이 세상과 이 시대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외침입니다.
이를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시편 72,7 참조)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마태 3,3)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회개의 영을 불어 넣으시어 굽은 데를 곧게 하소서.
낮아지고 작아지고 무력해지고 가난해지는 당신의 길을 걷게 하소서.
당신을 위하여 걷고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본능대로 살지 아니하고 영성으로 살아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태초부터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흔들렸지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시간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당신의 숨, 영을 불어넣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우리는 본능으로 살지 아니하고 이성으로 삽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갖고 한 차원 더 나아가 영성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보면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쩌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이사 11,6-7)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사자나 늑대는 사나운 이빨을 가지고 있고 난폭합니다.
양과 염소, 송아지는 그들의 먹이가 됩니다.
더군다나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사자나 늑대가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지만, 제 본능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난폭한 습성을 버리고 오히려 양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 이루어졌느냐 하면,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다음 수백 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신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삶이 변했습니다.
몸을 파는 창녀가 제 습성대로 살지 않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을 때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둘 다 떠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는 더러운 습성을 버리고 주님의 자비를 입었습니다.
은총이 충만했습니다.
사납게 굴던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한마디로 온순하게 되었고, 남을 등쳐먹던 세리 자캐오가 자기 습성이나 본능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네 곱절로 갚았습니다.
서로 미워서 등진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죽었던 나자로가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고 때로는 기적을 행하시며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은총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능이나 습성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놔두고 그야말로 삶의 터전을 떠나 기꺼이 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능적으로 살았을 때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가 “나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새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매달린 강도도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0)하고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본능대로 살지 않고, 악습대로 살지 아니하며, 잘못된 것을 버리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음 보따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얘기를 하면 그래도 봐 줄 수 있는데 남 얘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남이야 상처를 받건 말건, 상대방을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것을 다 떠벌립니다.
그것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진실성은 사라지고 자기 본능대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요.
평상시에는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하고 꽁무니를 빼던 사람도 남을 흉볼 때는 어찌나 그리 말을 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주님을 영접하려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자와 늑대, 표범이 사나운 입을 다물고 새끼염소나 송아지와 함께 지내듯 사나운 입을 다물고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아직도 뒷담화를 하십니까?” 묻습니다.
“험담은 무엇입니까?
남의 잘못된 점이나 흉을 들추어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험담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며,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험담은 단 하나 상처만 깊게 남길 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저 신부님께서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들으셨기에 저런 말씀을 하실까? 누굴 두고 하는 말씀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누굴 두고 하는 얘기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자기 영혼의 상태를 비추어 보고 고칠 것을 고치면 되는데, 남에게 먼저 관심을 두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면 나는 쏙 빼놓고 다른 사람만이 죄인인 줄 생각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비를 청하면 되는 것인데 왜 그리 힘이 든지요?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폭음과 폭식을 하고는 탈이 나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요,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파하는 사람도 있고, 시기와 질투로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보다 더 넓은 땅을 사면 됩니다.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분노, 적개심...
혹시라도 이런 마음이 있다면 오늘 그 본능적인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성령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회개한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사도 26,20)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나의 좋지 않은 습관, 삶의 태도를 한 가지라도 바꿀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 3장 10절에는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 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도끼가 뿌리에 닿아있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지금 좋은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선을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좋은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하셨으니, 여러분은 부디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곳간을 차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두 번째 대림초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만큼 밝아졌기를 희망하고 준비된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을 낳아드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콜로새서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함으로써 언제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온갖 좋은 일을 행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더욱 잘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가장 큰 사랑은 가장 힘없는 자를 향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분이었습니다.
회개란 ‘나’를 바라보는 것에서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회개는 희랍어로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파라오로 상징되는 자아를 의지하는 삶에서 ‘나는 나’라고 하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할 때 나오게 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광야는 나를 의지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저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하는 극도의 자기 무력화를 해야 하는 곳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 살았습니다.
그는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습니다.
낙타 털은 죽은 낙타가 썩어서 남겨놓은 것입니다.
길쌈을 한 것이 아닙니다.
가죽 띠는 동물의 거친 육체를, 절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메뚜기와 들꿀은 경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메뚜기는 잡기도 어렵습니다.
날아오면 먹고 없으면 굶어야 합니다.
들꿀도 마찬가지입니다.
발견도 어렵지만, 벌들이 허락해주어야 합니다.
왜 위대한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이 그런 삶을 선택했을까요?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의지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통장 액수’에 의존하는 삶입니다.
통장 액수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거나 불안하다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자아, 곧 파라오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이 있건 없건 이집트 안에서는 돈의 노예로 살아가야 합니다.
노예는 고통스럽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라 외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만 모든 것을 마련해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저도 사제가 되면서 통장 액수를 어느 정도선에서 제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한 달 생활할 돈만 남겨놓고 다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사제만큼 철밥통이 있을까요?
죽기까지 먹고 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액수를 유지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돈을 모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통장 액수 줄이기를 실현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점점 저 자신을 믿는 이집트로 회귀하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삶으로 나아가려면 작은 신앙 체험들이 필요합니다.
광야는 나의 힘을 뺄 때 주님께서 힘을 주시는 곳입니다.
파라오에 의지하지 않을 때 만나와 물을 주십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살아도 샌들이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굶기지 않으십니다.
일론 머스크는 한 달을 30달러로 살아보고는 가진 재산을 다 투자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의탁하기 위해 나를 믿는 마음을 포기하고 그것으로 인해 주님께서 우리를 챙겨 주실 수밖에 없는 분이심을 체험할 때 조금 더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사회복지를 하시는 한 수녀님을 도와 주시는 두 봉사자 분이 저를 찾아오셔서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그 수녀님은 노숙자들, 탈북자들, 독거노인들, 결손가정 아이들 등을 정신없이 도와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떨어져서 고기반찬도 올리지 못하고 멸치를 주시는데 작은 멸치도 못 사고 큰 멸치, 그것도 똥도 빼지 못해 쓴 멸치를 반찬으로 내어놓아야 하는 처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어머, 걱정하면 안 되는데….”라며 주님께 의탁하려고 노력하신다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나의 힘이 아닌 주님의 힘에 의지하려 광야에 머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저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겨울이 찾아오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써 달라고 얼마의 돈을 맡기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것을 왜 안 쓰냐고 할까 봐 ‘어디다 써야 할까?’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두 봉사자 분이 오서서 그런 말씀을 하니 제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정말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 수녀님이 깜짝 놀랄 액수를 드렸습니다.
물론 수녀님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이것이 자기 힘을 빼고 광야로 나온 이에게 주님께서 가지시는 마음이 아닐까요?
물론 저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마음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부터 도와주십니다.
하느님께 더 맡길 줄 아는 사람부터 당신 모든 것을 쏟아주십니다.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신앙은 무엇일까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십일조’입니다.
통장 액수는 내 힘으로 사는 상징입니다.
내가 주님께 십일조를 바치려고 할 때 나는 광야에 살게 됩니다.
돈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살펴보면 선악과를 바쳤을 때의 에덴동산에 머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 챙겨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올바른 마음으로 바치는 사람은 결코 내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선으로 당신 창고의 문을 그 사람을 위해 여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큰 교훈입니다.
저는 내년부터 초등학생부터 시작하여 모든 신자분에게 각자의 교무금 통장을 만들게 할 것입니다.
각자가 신앙 고백을 하는 만큼 광야로 나올 수 있고 그래야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피부병이 들어 털이 다 빠지고 먹지 못하여 죽어가는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아지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 죽어가는 강아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물보호소에 맡겼습니다.
강아지는 치료받았지만, 털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 강아지를 입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누가 입양했겠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자기에게 의탁하지 않으면 죽었을 바로 그 대상입니다.
그를 발견한 이가 그 강아지를 입양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반려견들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강아지는 자신이 아니면 또 외로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강아지입니다.
조금만 사랑이 있어도 양심상 그런 강아지를 그냥 버려둘 수 없습니다.
이런 예는 아주 많지만 ‘뼈만 남은 채 버려져 죽어가는 개에게 다가간 여성이 한 일’이란 ‘개감동이야’ 유튜브 채널을 시청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피아’ 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피아는 ‘자비롭다’라는 뜻입니다.
자비로운 자의 사랑은 가장 힘없는 자를 향합니다.
하느님은 자비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해 보려는 사람은 제쳐 놓으시고 가장 힘을 뺀 이를 먼저 찾으십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로 가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를 내년부터는 십일조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맑은 정신으로 늘 깨어 기도했던 광야의 대예언자, 세례자 요한>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듯해 보입니다.
‘있어’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내 앞으로 몰려들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 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세례자 요한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 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 옷에 가죽 띠입니다.
그는 대체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는데, 때로 죽기보다 힘든 숙제입니다.
완전 귀 먹은 백성들을 향해, 이미 물 건너간 사람들을 향해, 다시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거듭되는 외침에도 사람들의 몰이해, 그로 인한 박해는 계속됩니다.
결국 외로운 투쟁을 거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 위에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데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자취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는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 선포’가 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멸망 선포’가 됩니다.
여기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 그 나라에 들어가고 싶으면 회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 내세,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 전혀 관심 갖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고, “그런 것은 없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라고 생각하는 무신론자들과 유물론자들도 많습니다.
신앙인은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회개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늘나라를 마련해 놓으셨다는 믿음,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신다는 믿음, 노력하면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희망’도 믿음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희망이 없으면 믿는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회개하는 생활’을 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진실한 회개를 하여라.”인데, ‘열매’는 ‘구원’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진실한 회개를 하라는 뜻입니다.
말로만 하는 회개와 형식적인 회개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진실한 회개’는 “삶을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그리고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페 4,22-24)
사람에 따라서 갑자기 변화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꾸준히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회개한다고 말하면서도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거짓 회개입니다.
루카복음 17장에 있는 다음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루카 17,4)
이 말씀은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가르침이고, ‘용서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용서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 말씀을 몇 번이고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정말로 회개한다면 고치려고 노력해야 하고, 변화하고 새롭게 되려고 노력해야 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에 “죄를 지어도 용서받는다.” 라는 생각만 하고서 고치고 바꾸려는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고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해서 짓는다면, 그러면서도 용서받으려고 회개한다고 말하면, 그것이 과연 회개일까?
그 말은 거짓말이고, 그 회개는 거짓 회개이고, 죄를 더욱 크게 만드는 일입니다.
회개를 ‘죄를 뉘우치는 일’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죄를 뉘우치는 일은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회개는 삶을 완전히 바꿔서 ‘주님에게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을 보면, 그는 먼저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루카 15,17-19), 그다음에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루카 15,20).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보면,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치긴 했는데(마태 27,3), 자살을 했습니다(마태 27,5).
이미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셨기 때문에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곳이 없었다고, 그래서 절망에 빠져서 자살했을 것이라고, 유다를 대신해서 변명해 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라도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려고 노력했어야 하고, 끝까지 살아서 속죄를 했어야 합니다.
그의 자살은 속죄가 아니라 속죄하기를 포기한 일입니다.
11절-12절에 있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말’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을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로 소개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말은 그런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노력하라고 촉구하는 말입니다.
말로만 회개하는 사람과 형식적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쭉정이’입니다.
진실하게 회개하고 ‘삶’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킨 사람은 ‘알곡’입니다.
‘쭉정이’는 멸망을 당할 것이고, ‘알곡’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알곡과 쭉정이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각자 자기 자신이 어떻게 사느냐에 달린 일입니다.
따라서 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알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는 누가 알곡인지, 또 누가 쭉정이인지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일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도 굴하지 않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알곡 신앙인’이 분명히 많은데, 코로나를 핑계로 신앙생활을 쉬거나, 코로나 때문에 아예 신앙이 식어버린 ‘쭉정이 신앙인’도 적지 않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삽시다 - 꿈. 공부, 찬양, 회개>
오늘은 대림2주일이자 제41회 인권 주일이며 제12회 사회교리 주간 첫날입니다.
주님 오실 날도 점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초 둘이 우리 내면의 어둠을 환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라며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오늘 인권주일과 사회교리 주간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면서 제대로 인권을 누리며 살게 하기위한 구체적 처방이 사회교리입니다.
“사회교리는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공동선을 증진할 수 있도록 사회의 다양한 영역의 현실을 관찰하고, 복음에서 제시하는 기준으로 성찰하며, 성찰한 바를 구체적인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대로 인권신장과 유지를 위한 사회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성공부와 필히 함께 가야 할 사회교리 공부입입니다.
방금 흥겹게 부른 화답송 후렴의 시편 기도가 이런 우리의 열망을 표현합니다.
“정의가 꽃피는 그의 성대에 영원히 평화넘치리이다.”
정의가 꽃피고 평화가 넘치는 세상은 예언자들은 물론 우리 인류의 가장 깊은 염원이기도 할 것입니다.
도처에서 정의와 평화가 유린되는 세상을 목격하곤 합니다.
어제 국회앞에 모인 민주노총 6000명의 노동자 대회의 다음 구호를 통해 정의와 평화가 얼마나 절실한 지 깨닫습니다.
“죽일 테면 죽여라. 어차피 이렇게는 못산다.”
어제 가톨릭 평화신문은 인권주일을 맞이하여 ‘청년 자살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제하에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자살 사망자들은 2778명이었고 그중 20대 사망자들은 56.8%인 1579명 하루 4명꼴이며 그 추세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합니다.
이런 현실에 대한 전문가의 조언입니다.
“자살예방은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삶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역할이지만, 사람은 삶의 일정 조건들이 충족돼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예방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자살 원인을 해결하려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이 중요하다.
인간은 ‘죽고 싶은’ 충동보다 ‘말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지지해주는 이만 있어도 자살 충동은 크게 줄 수 있다.”
이런 작금의 어둔 현실 앞에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 절박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그리하여 대림2주일 강론 제목은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정했고 그 구체적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꿈꾸라!”입니다.
꿈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사람만이 꿈을 꿉니다.
꿈과 희망이 없는 삶, 살아있다 하나 죽어있는 삶이요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꿈이, 희망이 있어야 끝까지 버텨내고 견뎌낼 수 있습니다.
꿈이 희망이 없으면 곧장 무너집니다.
꿈이 없는 세대는 길을 잃은 세대입니다.
꿈중의 꿈이 궁극의 꿈이 하늘나라의 꿈, 평화의 꿈입니다.
예수님은 물로 성서의 모든 예언자들이 하느님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제시하는 평화의 꿈, 유토피아의 꿈도 우리를 한껏 고무하며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됩니다.
대림시기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이런 모든 피조물이 평화롭고 정의롭고 조화로운 세상일 것입니다.
“늑대가 새끼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고무적인 꿈이요 비전인지요!
그대로 성탄 밤미사 때 제1독서에서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런 평화와 조화의 세상이 우리의 궁극의 꿈입니다.
이런 평화의 꿈이 있어야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 수 있습니다.
끝까지 안주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한 품위을 유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꿈을, 희망을 잃어가는 오늘날 세대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늘 나라의 꿈이 생생해야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공부하라!”입니다.
꿈을, 희망을 키워주는 공부입니다.
하느님 공부, 성경공부, 말씀공부요, 졸업이 없는 평생공부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비로소 무지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병인 무지의 병에 대한 유일한 구체적 처방인 하느님 공부, 말씀 공부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빛이요 생명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가고 나를 알아 갈수록 자유로운 삶에 하늘나라의 꿈도 희망도 늘 생생히 지닐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을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성경공부는 꾸준해야 하고 한결같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권하는 바, 매일미사책을 통한 하느님 공부, 말씀공부입니다.
입당송부터, 영성체후 기도까지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마음에 간직하며 기본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생활화, 말씀의 일상화, 말씀의 습관화에 매일미사책을 통한 공부의 수행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 매일미사까지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습니다.
이렇게 부단히 말씀을 통해 영혼을 튼튼히 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찬양하라!”입니다.
찬미, 찬양의 기쁨으로, 행복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입니다.
믿는 이들의 궁극의 기쁨과 행복도 하느님 찬양에 있습니다.
하느님 찬양은 영혼의 본능입니다.
찬양의 기도와 삶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제 행복기도 중 다음 대목에서도 찬양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주님,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바오로 사도 역시 찬양의 기도를 바칠 것은 권고합니다.
제2독서 후반부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들이 자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와 찬양과 감사의 삶과 기도가 샘솟는 영적 삶의 원천이 됩니다.
하늘나라의 꿈도, 말씀공부도 하느님 찬미와 찬양의 기도와 삶을 통해 비로소 실현됩니다.
부단한 찬양의 삶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넷째, “회개하라!”입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가 평화의 꿈을 보여줬고,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말씀공부와 찬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회개를 강조합니다.
대림1주일의 주제가 “깨어있어라” 였다면, 대림2주일의 주제는 “회개하여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우선 선포한 것도 회개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인생 광야 여정의 순례자들인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이어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시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촉구합니다.
마음으로만 회개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나는 회개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은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
하느님의 심판 앞에 일체의 기득권은 무용지물임을 천명하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고 당신 뒤에 오실 예수님께서도 가차없는 심판을 하실 것을 예고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과연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알곡의 삶인지, 혹은 회개가 없는 쭉정이의 삶인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내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 회개의 삶이요 알곡의 삶입니다.
구체적 회개의 실천으로 바오로는 서로 받아들일 것을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회개의 은총입니다.
바로 우리가 대림시기 기다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도와주십니다.
이샤야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이런 성령 충만한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회개의 은총이요, 우리 또한 성령 칠은을 받습니다.
또한 이런 성령의 은총이 우리를 끊임없는 구체적 회개의 실천으로 이끕니다.
참으로 이런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1. 늘 하늘 나라를 꿈꾸는 삶, 2. 늘 말씀 공부에 충실한 삶, 3. 늘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 4. 늘 회개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성령충만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대림환에 두 개의 촛불을 밝힙니다.
오시는 주님께 한층 더 간절하고 한층 더 빛나는 그리움을 열어보이는 대림 제2주일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회개'를 이야기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 3,2)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회개를 외칩니다.
회개를 위해 우리는 삶의 네 개의 축을 성찰합니다.
나와 하느님의 관계,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나와 자연 환경, 즉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입니다.
첫째, 회개는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려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로마 15,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창조된 우리 모든 이의 존재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께 커다란 보탬이 되지는 않지만 그분은 당신의 충만함을 나누시고자 창조를 감행하셨지요.
우리는 그분께 찬미와 찬양, 흠숭, 사랑을 되돌려드리는 본연의 부르심을 인식하고 회복함으로써 그분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로마 15,4)
말씀은 우리 죄를 인내하시고, 우리 약함을 위로하시며,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인내, 위로, 희망"은 우리의 회개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둘째, 회개는 나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마태 3,9)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그분의 모상입니다.
하느님의 진실함, 선함, 아름다움은 우리 존재 깊숙이 새겨져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남과 비교하거나, 익숙해진 죄와 어둠에 머물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일에 인색합니다.
자신을 자신으로 수용하기보다 인종, 국적, 족보, 연줄, 인맥, 소속, 직분 등 온갖 타이틀 뒤로 숨어 그것들의 힘과 자기 본연의 존재를 혼동하고 살기 일쑤지요.
그럴수록 진정한 자기와 멀어지고 유리되어 자기를 잃어가는데도 말입니다.
"그분께서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태 3,11)
우리는 물과 성령과 불로 새로워진 존재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말씀, 해마다 돌아오는 전례주년, 그리고 성사를 통해 나날이 새로워지는 은총을 입고 살아가지요.
이것이 바로 그 어떤 신분, 타이틀, 연줄보다 강력하고 진실한 우리 정체성입니다.
물질과 숫자라는 세상 잣대에 스스로를 매몰시키지 말고, 그런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초대받은 회개입니다.
셋째, 회개는 이웃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로마 15,7)
기꺼이 받아들임.
이는 우리에게만 요구되는 무리한 강요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께 기꺼이 받아들여진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독려입니다.
사실 '다름'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일이 쉽지만은 않지요.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편협한 자기중심성과 주관적 잣대의 힘을 조금 빼주시면 가능해집니다.
사람 사이의 회개는 그래서 주님 은총의 협력이 매우 절실합니다.
혼자서 하려고 하기보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열리는 문이지요.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로마 15,6)
이웃과의 화해는 그저 인간적으로 편하고 좋자고, 똑같아지자고, 서로 이득이 되자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느님을 향해 "한마음 한목소리로"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기꺼이"라는 말씀 안에는 우리 인간과 천양지차로 다르시면서도 묵묵히 우리의 실존을 끌어안고 보듬어 주시는 하느님의 "선선한 내어줌"이 들어 있습니다.
넷째, 회개는 자연 환경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존중의 회복입니다.
"땅이 주님의 앎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사 11,9)
제1독서는 창조된 만물의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상태를 노래합니다.
동물들조차도 서로 해치지 않고 함께 평화로이 공존하는 모습은 곧 메시아 시대, 하늘 나라의 모습이겠지요.
이처럼 모든 존재가 주님을 알게 되면 더 이상 폭력도 눈물도 없을 겁니다.
앎이 곧 사랑이고,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신 분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 까닭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낳은 기후 변화와 그에 기인한 자연재해, 무너져가는 생태계와 지구의 몸살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지요.
소수 인간의 편리와 이익에 집중할수록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병들어 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미래 세대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파멸로 청산해야 할지도 모르는 무서운 빚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마태 3,8)
오시는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대림 제2주일에 말씀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빌어 보다 강하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인간이 지닌 네 가지 관계성, 즉 하느님, 나, 이웃,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를 잘 성찰하고 각자 돌이켜 나아갈 방향을 찾으라는 초대입니다.
그런데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진정한 회개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히게 마련입니다.
머리로 하는 관념놀음이나, 입으로 날리는 공수표는 회개일 수 없으니까요.
오늘은 '인권주일'이고 이번 주간이 사회교리 주간입니다.
말씀 안에 머물러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회개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실천으로써 한 걸음 내딛는 대림 제2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신화’는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동굴을 나왔지만 곰은 끝까지 참았고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 바람, 구름을 다스리는 책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은 인간이 된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입니다.
하늘세계에서 사는 환웅은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세계를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마치 하느님의 아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이 되신 것과 비슷합니다.
환웅이 제시한 조건은 호랑이에게는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육식동물인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은 먹기 힘들었습니다.
잡식동물이 곰에게 쑥과 마늘은 먹을 만했습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호랑이에게 캄캄한 동굴에서의 생활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곰에게 동굴에서의 생활은 편안한 집과 같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평등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말은 단군신화의 세상에도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태어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단군신화는 환웅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고 하였습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시천주(人乃天侍天主)의 동학사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난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까지도 품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미국에서의 노예해방에 서명한 지 100년이 되었지만 흑인들에게는 여전히 기회는 공평하지 않았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았고, 결과는 정의롭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흑인목사 마틴루터 킹은 1963년 8월 28일에 ‘I have dream'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연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어려움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지만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이 옛 노예 소유주의 자손들과 함께 형제애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4명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으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인품에 의해 판단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울리게 할 때 하느님의 모든 자손들인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이방인들, 신교도와 구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영가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마침내 해방되었도다!’를 노래 부를 수 있게 될 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환웅의 꿈과 마틴루터 킹의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러한 세상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의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Dreams come true!"
20년 이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은 기적과 같이 16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환인의 꿈, 마틴루터 킹의 꿈,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꿈은 혼자서 간직하면 꿈으로 머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마침내 현실이 될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이 뵙고 싶어졌습니다.
전화할 수도 없고, 편지를 써도 수신이 가능한 주소도 없습니다.
기도해도 부모님께서는 침묵 중이셨고, 꿈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무작정 운전해서 부모님 산소에 갔습니다.
산소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연도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그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움에 무기력한 마음마저 더해져 우울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비가 쏟아졌습니다.
쌀쌀한 날씨였는데, 비까지 맞으니 추워서 도저히 산소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미사 가방을 챙기고, 부모님께 인사한 뒤에 차 있는 곳까지 뛰었습니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 산소까지 차를 끌고 갈 수 없었기에, 한참을 비 맞으며 뛰어야만 했습니다.
차에 도착해서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는 순간, 우울한 마음이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차를 운전하는데 라디오에서 아주 멋진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저를 위로해주고 힘내라며 옆에서 가수가 불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 주인과 직원들이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해서 나가려고 하자 괜찮다면서 주문받습니다.
비 맞은 제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자기들이 먹는 계란 후라이가 남았다면서 먹으라며 주십니다.
식당 주인의 배려에 감동하며 정말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외로움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아서 생겼음을, 비 맞으며 뛰다 보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멋진 노래를 듣고, 계란 후라이를 먹으며,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음을, 그래서 외롭지 않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늘 함께하는 주님과 나의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으쌰~”를 외치며 힘차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자기만의 구원을 위해 이렇게 외쳤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광야에서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필사적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미리 알려준 주님께서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하면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무기력함과 함께 희망 없는 삶이라며 절망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때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즉,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주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또 세례자 요한처럼,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함께 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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