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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제1독서 : 갈라 1,13-24
복 음 : 루카 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참된 환대; 관상적 삶
-말씀, 경청, 회개, 겸손, 사랑, 환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올해의 요즘은 유난히 행복합니다.
죽었다 살아난 너무나 생생한 파스카 감사의 체험 때문일 것입니다.
제 머리 왼쪽 상처 부위의 흰 반창고는 '회개의 표지'이자 '감사의 표지'처럼 생각됩니다.
올해 제 영명축일 때는 사랑도, 선물도, 축하도 제 생애 중 가장 많이 받았던 해인 듯 싶습니다.
나이가 들면 아이처럼 되는 가 봅니다.
요즘은 가끔 보고 싶은 분들도 있어 솔직하게 사진 좀 보내 달라 합니다.
요즘보다 사람 얼굴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인 적은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 또한 순수한 사랑의 환대의 표현이겠습니다.
오랜만에 어느 자매와 주고받은 카톡 메시지입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카톡에 올리신 프로필 사진을 보고 뭔가에 이끌리듯 수도원에 갔습니다.
두 팔 벌려 ‘언제든 와라. 다 괜찮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아무 연락도 안드리고 무작정 갔다 왔습니다.”
“오랜만에 반갑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예수님 축복 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해요. 신부님, 낮에 신부님 사진 떠올라 발길 머물렀던 ‘예수님 부활상’ 자리 바로 그 장소네요.”
“마리아죠? 보고 싶으니 셀프카 사진 찍어 보내 주세요.”
“지금 방금 찍은 따땃한 사진이예요.”
“편안하고 안정 되 보여요! 주님 안에서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배밭에서 좋은 정기를 받고 와서 안정되어 보이나 봐요. 실제로 마음도 안정되었고요.
신부님 뵙고 왔으면 더 환하고 예뻤을 텐데요. 일간 찾아뵐께요. 신부님”-
아, 그러고 보니 수도원 십자로의 두 팔 벌리고 가슴 활짝 열린 파스카 예수님 상은
그대로 환대하는 예수님 모습입니다.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는 불암산과 더불어 말입니다.
새삼 환대의 사랑, 환대의 수도원은 요셉 수도원의 정체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분도 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다음처럼 아름답게 환대를 명문화하고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할 것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시는 읽을 때 마다 감동이요 환대의 진가를 절감합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생애가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도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환대’라 명명해도 참 좋은 절창의 시입니다.
일생의 역사가 담긴 주님의 현존인
각자 고유의 ‘살아있는 역사책’이, ‘살아있는 성경책’이 방문하는 것이니
사랑의 환대는 너무 당연하고 어마어마한 축복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베타니아 집을 자주 찾았던 예수님 같습니다.
누구나 피곤하고 삶에 지칠 때 눈감으면 떠오르는 찾고 싶은 곳을 헤아리기도 할 것입니다.
아마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들은 예수님을 온 마음, 온 사랑으로 환대했던
베타니아 ‘환대의 집’에 ‘환대의 사람들’같습니다.
그러나 참된 환대도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눈먼 사랑의 환대도 있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환대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환대는 그러합니다.
내 좋을 대로의 환대가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상대방 좋을 대로의 환대가 참된 환대요
이점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심중을 꿰뚫어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잡수러 온 것이 아니라
우선 쉬면서 당신 말씀을 하고 싶어 방문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마리아,
바로 주님의 환대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흡사 미사전례 시 말씀의 전례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식사하는 것이 올바른 주님 환대의 순서이며,
하여 미사전례도 말씀전례에 이어 성찬전례가 뒤를 잇습니다.
식사 준비에 분망하던 마르타 언니의 불편했을 심중이 그대로 예수님께 표출되었고
마르타를 향한 예수님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활동주의에 중독된 이들에 대한 금과옥조의 경계가 되는 말씀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우선 택할 것이 말씀이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경청을 통한 예수님 환대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눈먼 환대가 아닌 눈 밝은 환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마르타는 넘치는 사랑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심중을 헤아리지 않는 제 좋을 대로의 일방적 눈먼 사랑의 환대임을 봅니다.
말씀의 경청을 통한 주님 환대는 모든 사람 환대의 근본이 됩니다.
참으로 말씀에 깊이 맛들여 갈수록 주님 환대와 이웃 환대의 사랑도 깊어갈 것입니다.
새삼 환대에도 순서가 있음을 봅니다.
참된 환대는 그대로 참된 관상적 삶의 기초가 됨을 봅니다.
우선 주님의 환대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말씀을 경청할 때 저절로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회개와 겸손이 뒤따르고
순수한 사랑, 아가페 사랑의 회복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으로 주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참된 환대는 ‘말씀-경청-회개-겸손-사랑-환대’의 순서로 이뤄짐을 봅니다.
바로 이런 주님 환대의 자세로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에 참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 환대와 더불어 날로 주님을 닮게 되고
이웃 사람에 대한 참된 환대의 사랑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참된 영성의 잣대는 참된 환대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참된 신자는 참된 환대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성인들이 예수님을 닮아 환대의 성인들이었고 특히 이의 모범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오로가 사도로 부름 받은 경위가 상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환대 은총을 통해 바오로 사도가
철저한 회개와 정화 과정을 겪는 과정의 묘사처럼 보입니다.
환대의 사도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환대를 통한
철저한 회개와 겸손의 정화 과정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당신 말씀과 성체의 사랑으로 우리를 환대해 주시고
우리 모두 당신 ‘환대의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텔레비전에서 냉면한철(冷面寒鐵)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넌센스 문제로 생각했는지 한 방송인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냉면집 장사가 여름 한 철이다.”
물론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방송인들이 이 대답이 맞을 것으로 예측하는 것입니다.
한글만 보면 당연히 그렇게 예측할 수도 있는 ‘냉면한철’입니다.
그러나 이는 ‘낯빛이 싸늘하기가 차가운 쇠붙이 같다’라는 뜻으로,
‘사사롭고 편벽됨이 없어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이르는 말입니다.
한자를 보지 않고서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삶도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를 잘 알면서도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그 안에 담긴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뜻은 그냥 눈으로만 쉽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너그러운 손님 접대의 덕을 보여 줍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한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르타의 동생인 마리아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녀는 마르타처럼 손님 접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 발치에 앉아서 정의와 진리를 즐겼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시중을 드느라 분주한 자신과 달리 주님 발치에 편하게 앉아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 관한 판단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청을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은 마르타가 잘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영원에 속하는 일이지만
육신을 섬기는 일은 지나가 버리는 일일 뿐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결국, 겉으로는 보이는 모습을 보고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그 안에 담긴 뜻을 볼 수 있어야 함을 마르타에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어떤 모습도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것을 부족한 인간의 눈으로 부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지금, 마르타는 예수님의 몸을 섬기고 있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섬기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타가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섬김이 진정한 ‘주님 섬기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주님을 섬기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자신을 섬기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실상 주님을, 혹은 남을 섬긴다고 하면서, 막상은 자기 자기를 섬길 수가 있습니다.
마치 마르타처럼 말입니다.
사실, 베풀기보다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상 주님 앞에 앉아서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있거나 타인의 말을 듣고 있을 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그 어떤 섬김보다도 더 큰 섬김이 됩니다.
마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허용해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곧 자신을 향한 주님의 섬김을 수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리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나는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해드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그분과 한 자리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일, 곧 섬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에서 쓴 편지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중요하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이다.”
그렇습니다. 상대방이 있는 자리에 같은 처지로 함께 있기!
바로 그것이야말로 진정 상대를 섬기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섬기십니다.
마리아는 지금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께 위로가 되어 주겠다며 분주한 마르타가
예수님께 위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께 귀 기울이고 있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위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꼭 한 가지,
그것은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
주님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주님!
이 한 가지로 하여,
가난을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당신께 속한 자만이 진정 가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가지로 하여,
낮추어 섬기겠습니다.
속한 자만인 진정 낮아질 수 있고,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전부를 하는 이 신령스런 일이
바로 당신의 소유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실상 필요한 한 가지,
주님이신 당신을 주님 되게 하는 일,
바로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는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정년퇴임까지 5번 정도 직장을 옮긴다고 합니다. 직책은 19번 정도 바뀐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회가 다양해지고, 직업을 구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런가하면 대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새로운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소홀해서는 안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민 사회도 다양한 직업을 갖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증권회사에 다녔는데 이민 와서는 한의사가 되신 분도 있습니다.
언어의 소통 문제로 직업을 바꾸기도 하고, 회사의 구조조정 때문에 직업을 바꾸기도 합니다.
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신문사 직원이 되신 분도 있습니다.
여행을 다니다가 여행사를 운영하는 분도 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다가 여행사를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직업을 바꾸는 것이 당연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율법학자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율법학자로서의 신념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신비한 체험을 했던 바오로 사도는 율법학자라는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자였던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찾아가는 선교를 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선교여행을 통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율법학자로 대접을 받으며 편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바오로 사도는 박해와 시련이 눈앞에 보이는 사도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방법은 2000년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선교사들은 중국과 일본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와 남미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박해가 심했던 한국으로도 왔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박해도, 시련도, 죽음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30년째 사제로 지내면서 다양한 직책을 경험했습니다.
본당 사제로 16년 지냈습니다. 보좌신부 8년, 본당 신부 8년을 지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는 본당 사제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사제가 하는 일은 본당 사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구의 인사이동을 통해서 다양한 사목을 체험하였습니다.
사목국에서는 3년 동안 교육 담당 업무를 하였습니다.
소공동체를 위한 교육을 하였고, 구역장과 반장을 위한 월례교육을 준비하였습니다.
해외연수와 중견사제 연수를 통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연수의 기회를 주신 교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청소년국에서는 6개월 동안 청소년 수련원에서 지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과 함께한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성소국에서는 5년 동안 사제양성을 위한 업무를 하였습니다.
교황방한 준비위원회 업무를 한 것도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작년부터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신문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주님께서는 제게 참 다양한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많은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큰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마리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활동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도 좋은 몫입니다.
영성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도 좋은 몫입니다.
중요한 것은 활동과 영성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가 좋은 몫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습니다.
직업에 따른 다양한 직책이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그 일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좋은 몫을 선택한 것입니다.
비록 그 일 때문에 시련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좋은 몫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삶의 중심은
한 가지뿐이다.
삶의 중심이 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염려와 걱정을 맡겨드린다.
하느님께 멀어질 때
염려와 걱정은 더욱 커진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시간은 많아도
하느님께 머무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믿음의 몫이다.
믿음은
함께하는 기쁨이다.
믿음의 방향은
일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은 마음을 표현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보다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기꺼이
하느님께 나누는 마음이다.
마음 안에 일이 있고
마음 안에 기쁨이 있다.
필요한 것은
삶의 첫 자리에 계시는 하느님께
먼저 우리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마음을 드리는 것이
말씀을 듣는
머무름의 첫 시작이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두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필요한 한 가지는 자기관리뿐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는 보통 예수님을 위해 봉사와 활동을 위주로 하는 이들을 대표하고,
마리아는 기도와 관상을 위주로 사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마르타는 활동을 통한 성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사람이고,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곁에서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보고 불평하는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마르타를 따르면 예수님께 식모가 되고, 마리아를 따르면 신부가 됩니다.
예수님은 식모와 같은 여인을 원하시지 않고 순결한 신부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집에서 밥도 청소도 하지 않는 아내를 원하시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사랑하는 순결한 신부가 신랑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순결한 신부가 식모보다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모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지쳐 쓰러지지만,
신부는 신랑을 위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충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더 사랑하는 것이지, 더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식모가 될 것인지 신부가 될 것인지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순결한 신부가 되려고 하다 보면 끝까지 좋은 결과를 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일에 집중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첫째로 자기관리에 집중합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운동이 유일한 취미라는 유재석씨도 자기관리에 충실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끊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는 일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기관리가 잘 된 모습이 일을 통해 입증되도록 합니다.
정준하 씨는 말합니다.
“재석아, 너 너무 재미없게 산다. 몸이 재미가 없잖아.”
정형돈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 그렇게 재미없게 사는 거 주위 사람들이 스트레스야.”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점점 재석이 형이 무섭다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데, 슈퍼맨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운동도 진짜 열심히 하고 담배도 끊고 점점 이형,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무한도전이 끝나고 다른 멤버들은 활동이 약해져도 유재석씨는 언제나 건재합니다.
유재석씨가 집중하는 것이 일이 아닌 자기관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는 자기관리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유재석씨도 놀란 자기관리 장인이 있는데 바로 박진영씨입니다.
박진영씨의 자기관리 방법을 들으며 유재석씨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박진영씨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배고파!”, “죽겠다!”입니다.
조금만 먹으면 바로 살이 찌는 박진영씨는 일주일의 반 이상 하루 20시간 공복을 유지합니다.
1일 1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엔 운동하며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런 사람이 배 두드리며 먹고 놀아도 되는데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일까요?
그는 매년 한 곡씩 노래를 발표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올해도 ‘When We Disco’라는 곡으로 복귀를 했습니다.
그의 음원 수입이 국내 1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렇듯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의 전형이고, 마리아는 먼저 자기관리부터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봉사와 기도 중 하나만 끊으라고 하면 어떤 것을 끊으시겠습니까?
활동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활동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관리를 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여 분명 무언가 이루어내고 싶은 열망으로 들끓습니다.
그래서 일에 지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 중심인 사람은 그 일이 잘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지치고
그래서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일보다 자기관리가 우선입니다.
박찬호 선수도 첫 메이저리그 성공신화를 이루어내고
후배들에게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적합한 조언을 달라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치지 않는 것입니다.”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관리를 우선시하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해지면 주위 사람들도 거룩해집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다가는 자신도 거룩함을 잃습니다.
제가 살을 조금 빼니까 저절로 주위 사람들도 다이어트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로 나를 증명하려 하지 말고, 내가 일을 통해 증명되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한데, 신앙인 처지에서는 그것이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기도로 여기고
기도시간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마련할 줄 알 때
다른 하는 모든 일도 잘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 (루카 10, 42)
코르디아 수녀
예수님께 다가가는 제 마음은
많은 경우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인 마르타와 같습니다.
주인인 저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예수님을 초대하기 위해 집을 정돈하고
좋은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지쳐 내안에 선한 의지가 바닥을 보이면
이내 예수님께 다가가기를 주저합니다.
머리로는 아무것도 없는 빈 손, 빈 마음일 때
그분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생각하면서도
빈 손이 되려는 마음, 그 의지라도 내가 가져야만
그분과 가까워질 수 있다 여깁니다.
필요한 것 한 가지,
모든 것에 선행하는 하느님의 은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은총이 잠시 거두어진 듯 느껴지는 때
빈 손이 되려는 마음 하나도
그분의 은총이 아니면 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