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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학회 발표 요지, 때: 2006, 4, 8. 장소: 동국대학교 학술문화관
고구려 國馬
1. 머리말
2. 國馬의 용례검토 徐榮敎(목원대학교 사학과)
3. 國馬와 市人馬
4. 國馬의 증식과 주변 遊牧民
5. 맺음말
1. 머리말
고구려는 중원의 강국이나 유목민족들로부터 자국을 지키기 위해 기병을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마구․무기․갑주 등의 기병장비의 생산도 뒷받침되어야 하며, 숙련된 기수를 양성해야 하고, 일정한 기량을 가진 전마(戰馬)를 키우고 그 적정 수를 유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기병의 구성요소는 기병장비와 기수 그리고 말 3가지이다. 필자가 본고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말이다.
지금까지 연구는 기병장비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중장기병을 고구려군대의 총아로 인식했던 연구자들은 기병의 중장 정도가 그 성능을 결정했다고 보았다.1) 물론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여기에는 고구려 중장기병의 말과 기수가 똑 같은 기량을 가졌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과 기수의 다양한 모습이 몰각된 느낌이 든다.2)
지금까지 고구려의 말 생산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다만 신라사에서 부분적인 언급만 있다. 그것은「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말과 촌락 그리고 그 소유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신라의 촌락에서 말을 생산했다는 것이 전제하고「신라촌락문서」에는 많은 수의 우마가 기재양식을 벗어나 유출되거나 파악되지 않는다고 본 견해가 있었다. 그 근거는 이러하다. A촌의 전식년의 말의 수가 22필로, 그 가운데 14필이 3살 이상의 성년 말이고 절반인 7필이 암말이라고 가정을 한 후 매년 7필의 새끼를 낳으면 3년 동안 증가 수는 21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적에는 감소한 2필을 더하더라도 증가한 수는 7필 밖에 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감소한 사정을 기록한 말을 제외하고도 14필의 말이 행방불명이라는 것이다.3)
하지만 촌락에서 말을 생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촌락문서」에 보이는 ‘가마(加馬)’를 출산을 통한 자연증가로 보기 어렵다. 사람의 출산을 ‘삼년간중산(三年間中産)’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망아지가 생산되었다면 ‘가(加)’가 아니라 ‘산(産)’으로 표현해야 한다. 무엇보다 말의 번식을 소의 그것과 동일하게 본다면 곤란하다. 수말은 소수의 종마만 남기고 모두 거세되며, 양질의 암말만이 교배에 선택될 뿐이다. 선택교배 없이는 좋은 말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4)
신라 통일기 왕실목장이 해도(海島)에 많았다고 보는 것은 편견이며, 촌락 내에도 왕실목마장이 많이 존재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5)「신라촌락문서」의 촌락에 많은 수의 말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능하다. 촌락은 말을 ‘사육’할 수 있는 공간은 될 수 있다. 하지만 말을 생산하는 촌락을 목마장으로는 볼 수 없다.「신라촌락문서」에는 선택 훈련의 기술이나 수의학적인 지식을 가진 인간의 존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정교한 왕실의 말을 생산하고 조련할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목축과 농경은 동일한 생태권 안에서 공존하기 어렵다.6)
말도 그 종자․연령․훈련정도에 따라 다르다.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 균질한 기량을 가진 전마들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종자개량과 조련이 필요하다. 말에 대한 국가의 장기적․조직적 관리가 요구되는 것이다.7)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자료의 단편이 있다. 삼국사기 온달전이 그것이다. 온달전은 아내의 내조로 남편이 성공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내조는 평강공주가 선택하게 하고 직접 양육한 ‘국마(國馬)’로 표징될 수 있다.8) 어떻든 국마란 명칭은 고구려국가가 관리하는 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암시한다.
하지만 본 연구의 최대장애는 자료부족이다. 고구려 국마를 설명해 주는 기록은 거의 없으며, 삼국사기에 국마라는 명칭이 단 2개만 전하고 있다.9) 국마의 용례를 전하고 있는 중국 측의 기록도 극히 드물었다. 필자가 아는 한 사기의 주석에서 1개, 자치통감에서 3개가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온달전의 국마에 관한 기록을 분석하는데 있어 중국 측의 여러 기록(특히『당육전』)들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문에서 먼저 국마의 용례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다. 고대의 그 상황을 반영하는 용어란, 세월이 흐르면서 그 뜻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삼국사기 온달전에 보이는 국마와 시인마(市人馬)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공주가 구입하고자 했던 국마는 고구려 국가의 처분대상이었다. 그 다음으로 고구려의 국마 증식 환경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주변의 유목민족들과 고구려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2. 國馬의 용례 검토
371년 백제 근초고왕 26년의 일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공방전이 가열되던 시기였다. 그 해 고구려 고국원왕의 침공 첩보를 접한 근초고왕이 패하(浿河)의 강가에 군대를 매복시켰다. 고구려군은 백제군의 급습을 받고 패했다. 그 해 겨울 백제 근초고왕은 태자(근구수왕)와 함께 3만 대군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백제군이 대승을 거두는데 있어 고구려에서 귀순한 사기(斯紀) 라는 자의 정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0) 삼국사기 권24(백제본기) 근구수왕 즉위년 조에 그의 투항 이유가 나온다.
“고구려사람 사기는 본래 백제사람이었는데 잘못하여 (백제)왕이 쓰는 ‘國馬’의 발굽을 상하게 하였다. 그는 죄를 받을까봐 두려워서 고구려로 도망하였다가 이때 (백제로) 돌아와 태자(근구수왕)에게 말하였다”.
국마의 용례가 보인다. 사기는 백제왕이 타던 국마(國馬)의 발굽을 상하게 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을 했다. 백제에서도 국마가 법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은 국가의 전쟁장비로서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이며, 그에 대한 파손에 대해 처벌이 가해지는 것은 상식적이다.
사실 국마의 국(‘國)’은 수도를 의미한다. 동맹제에 대해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 조에 전하는 기록을 보자.
그 ‘국’의 동쪽에 수혈이란 큰 굴이 있다. 10월 국중대회(國中大會) 때 이곳에서 수신을 맞이하여 ‘국’의 동편 (강) 위에 모셔 와 제사를 지내는데,….
여기서 말하는 국중대회란 수도에서 큰 제의를 개최한다는 말이다.11) 따라서 국마는 수도의 말이란 뜻도 된다.『위서 권100, 고구려전을 보면 부여왕의 목장에서 말을 사육하던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기 권2, 夏본기 2를 보면 왕성에서 5백리 이내 천자의 복치전(服治田)에 대한 납세 품목을 100리 단위로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 왕성에서 100리 거리의 지역은 총(總)을 부납(賦納)해야 한다. 총(總)의 의미는 공안국(孔安國)의 주(註)에서 소개되어 있다.
“공안국이 말하기를 기내근왕성자(「甸內近王城者)는 볏짚(화고)을 ‘총’이라 이르는데, ‘국마’를 먹이는데 이바지 한다…”.
왕성에서 100리에 사는 사람들은 볏짚을 부납(賦納)한다. ‘부납’이란 의미를 생각해 볼 때 납세자들이 볏짚을 100리 떨어진 왕성으로 직접 옮겨, 왕성의 국마를 사육하는 사료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한편 왕성에서 100리 거리에 있는 국마목장에 부납하는 것으로도 볼 수도 있다. 어떻든 여기서 말하는 국마는 왕경이나 그 교외에서 사육하는 말이다.
하지만 수도(國)의 이름이 국가의 이름이 되듯이 ‘국’은 팽창하는 것이며, 이와 함께 그것이 가지는 지역적 의미도 보다 확대된다. 국가의 전 영토를 포괄하는 의미로 바뀔 수도 있다. 국마가 국가에서 관리하는 말이란 뜻이 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자치통감 券212, 당기28 玄宗 開元13년(725) 11월 조를 보자.
수말에 ‘국마’가 모두 도적과 융적(戎狄)들에게 소략 당했다. 당초(唐初)에 가서 적안택에서 암수말 3천필을 얻어 농우(隴右)로 옮겨서, 태복 장만예에게 명하여 그것을 관리하게 했다. 소임을 잘 수행하여 정관년간(627-649)에서 인덕년간(664-665)에 이르는 시기에 말이 번식하여 칠십만 필이 되었으며, (말은) 팔방 48감에 나누어 배치하여 각각 그것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때에 이르러 비단 1필이면 말 한 필을 살 수 있었다.
고구려침공 실패 후 일어난 수말 혼란기에 국마는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융적(戎狄)’의 ‘소략(所掠)’ 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마가 수도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국마가 융적의 지역과 가까운 곳에서 사육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당 초기의 국영목장(國營牧場)의 위치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 당은 말 암수 3천 필을 농우(隴右-협서성 농현(隴縣) 서쪽 지역에 옮겨서 번식시켰다. 서북방의 농우지역은 중국의 전통적인 말 생산지였다.12) 한대(漢代)부터 국영목장이 집중된 곳이었다. 한무제는 흉노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서 전마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13) 국영목장의 위치는 당연히 수도를 벗어난 변방의 목초지였다.14)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둔다면, 국마는 주로 전쟁을 염두에 두고 국영목장에서 조련․생산한 전마(戰馬)이다.
3. 國馬와 市人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 권45, 온달전에 국마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이는 설화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말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상식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온달에게 시집온 평강공주는 자신이 소지한 귀금속을 팔아 전택(田宅)과 노비(奴婢), 우마(牛馬), 기물(器物) 등을 구입했다. 앞서 말을 구입할 때 공주는 온달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처음 말을 살 때에 공주는 온달에게 이르기를 “시장인의 말(市人馬)을 사지 말고 꼭 國馬를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하였다. 온달이 그 말대로 하였는데 공주가 먹이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여 말이 날마다 살찌고 또 건장해졌다.15)
‘시인마(市人馬)’란 표현에서 고구려의 시장에는 말이 유통되고 있었으며, 말을 거래하는 전문상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시인마의 의미를 알기위해서는 먼저 국마와 어떻게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알아야 한다. 온달은 시장에서 국마를 구입했다. 고구려 국가가 양육한 말들이 시장에서 처분되고 있었기에 그것은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당육전』권5, 상서병부 조를 보자.
…각 도독부에 상비된 말은 그 수가 매우 많았다. 개원 25년(737) 칙을 내려 “천하가 무사한데도 (상비의 마필이 너무 많아) 노고와 비용이 자못 번다하니 마땅히 경성과 동도에 가까운 지역에 편의에 따라 3천 필을 남겨 천자의 행차 및 가사의 승용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일체 중지하라”고 하였다
곡물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말은 사람보다 12배 이상을 먹는다.16) 평화 시 국가에서 말을 유지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특히 풀이 없는 겨울철에 말의 곡물 소비량은 엄청났다. 국가에서 말을 시장에 처분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온달이 평강공주의 당부대로 국마를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국마가 육안으로 누구나 알아볼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국마에는 어떠한 표식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하여 당육전 권17, 태복사 마개인(馬皆印) 조가 주목된다.
무릇 목에 속한 말에는 모두 낙인을 찍는다. 낙인은 오른쪽 앞발에 작은 ‘관(官)’자를, 오른쪽 넓적다리에 출생한 해를, 꼬리 곁에 감(監)의 이름을 찍는데, 모두 좌우(左右) 상(廂)에 따른다. 만약 형용이 단정하여 상승국에 보낼 말은 감의 이름을 찍지 않는다. 두 살이 되어 등뼈를 세우면 그 힘을 헤아려 ‘비(飛)’자의 낙인을 그 왼쪽 넓적다리와 앞쪽 발에 찍는다. 좋은 말과 그 다음가는 말은 용(龍) 모양의 낙인을 그 목의 왼쪽에 찍는다. 상승국에 보내는 말은 꼬리 곁에 좌․우에 따라 ‘三花’라고 새긴 낙인을 찍는다. 그 나머지 잡마(雜馬)로 상승국에 보내는 경우는 ‘풍(風)’자 낙인을 왼쪽 앞발에 찍고, 비(飛)자의 낙인을 왼쪽 넓적다리에 찍는다.…략…官馬를 사람에게 하사하는 경우는 ‘사(賜)’자를 찍는다. 각 군에 배속되거나 역마로 충당되는 경우는 ‘출(出)’자를 찍는다.
국영목장의 말에는 모두 낙인이 찍혀있다. 국가의 소유를 나타내는 ‘관’자가 말의 오른발에 찍혀 있고, 말의 나이를 밝혀 놓기 위한 출생 년도와 감의 이름이 낙인 되어있다. 온달이 시장에서 국마를 구분하고 그것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것도 낙인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고구려 국영목장의 존재를 반증하는 하나의 단서로 볼 수도 있다.
평강공주는 국마를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을 구입하라고 온달에게 당부했다. 병든 말의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렴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온달을 국왕친임 사냥대회에 내보낼 생각을 가졌던 평강공주가 가격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주가 국마를 구입하되, 병든 말을 구입하라고 당부한 것에는 2중 제한이 있다. 그것에는 다음의 의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된다. 건강한 국마라고 해도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위의『당육전 권17, 태복사 마개인(馬皆印) 조에서 목에 속한 모든 말들은 일단 국가의 소유를 나타내는 ‘낙인‘이 찍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에는 아주 좋은 말이 있고 그 다음으로 좋은 말이 있으며, 잡마로 분류될 정도로 질이 떨어지는 말도 있다. 국영목장의 말의 수를 감원할 때 첫 대상은 잡마였을 가능성이 높다. 먹이만 축내고 효율적으로 부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공주는 건강한 국마를 두고 왜 병든 국마를 구입하라고 당부했을까. 국영목장에서 좋은 말이 처분된다면 병이 들어 파리해진 그것이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국영목장에서 병든 말들은 재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다. 말을 대량으로 사육하는 국영목장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온달전의 표현 그대로 ‘파리하고 병들어 내다 파는 국마’이다.
좋은 말과 잡마의 구분은 훈련의 과정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말이 전마가 될 수 없다. 훈련의 과정에서 탈락을 수반한다. 우수한 말을 골라내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첫 훈련은 말이 2살이 되어 등뼈를 세울 때이며, 일찍이 탈락된 잡마는 어린시절에 육마(肉馬)가 되거나 시장에 처분될 수도 있다. 좋은 말들은 그 다음 과정의 훈련을 받고 그 중에서도 뛰어난 말은 더 높은 수준의 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야말로 조련(調練)하는 것이다. 전마는 비교적 여러 단계의 훈련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온달전에 보이는 국마와 시인마의 차이를 훈련 상태에서 찾고 싶다. 온달은 국왕친임 사냥대회에서 참여하여 출중한 기량을 발휘하였다. 여기서 훈련받은 국마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영목장에서 전마로서 훈련을 받지 않은 말은 사냥에서도 기량을 발휘하기 어렵다. 당육전 권17 太僕寺 노거(輅車) 조를 보면 “무릇 노거의 말은 어사(馭士)들에게 미리 훈련하고 길들이게 한 다음 輅와 車를 끌게 했다”라고 한다. 노거를 끄는 말도 훈련이 필요하다. 전마는 말할 것도 없다.
한편 市人馬의 존재는 고구려에서 말이 유통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의 민간인들에게 그 수요가 상시적으로 있었고, 개인들이 적지 않은 말을 보유하고 있었다. 온달도 개인적으로 말을 구매하기 위해 시장으로 갔다. 공주는 시인마는 건강하고 보기도 좋지만 그것을 권유하지 않았다. 시인마 훈련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말은 애초에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국영목장에서 훈련받은 國馬는 건강만 회복하면 전과 같은 기량을 가질 수 있다. 숙련된 조련사들은 국가의 관리 하에 있다.
고구려국가가 국마를 보유하고 유지하는데 있어, 하자가 있는 말들의 지속적인 처분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유지비용을 절감할 뿐만 아니라 국마의 질을 일정 유지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렇다면 처분만이 말의 질을 유지하는 방법이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보고 싶다.
4. 國馬의 증식과 주변 遊牧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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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마의 증식과 질을 유지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초원으로부터 융마(戎馬)의 유입이 가장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치통감 권213, 당기29 현종 개원 15년(727) 9월 병술(丙戌) 조를 보자.
돌궐(突厥)의 비가가한(毘加可汗)이 그 대신 매록철(梅祿啜)을 파견하여 입공(入貢)했다. 토번(吐蕃)이 과주(瓜州)를 쳐들어와, (돌궐) 비가가한에게 서를 보내어 함께 (중국에) 들어가 약탈하자고 했다. 비가가한이 그 서한을 (당현종에게) 병헌(並獻)하니, 현종이 그 일을 기뻐하여. 서쪽의 항성(降城)들을 호시(互市)로 삼는 것을 허락했다. 매년마다 비단 수십만 필이 융마(戎馬)와 교환되었다. (그 융마로) 군려(軍旅)를 돕고 또 감목의 종(種)으로 삼으니 이로 말미암아 국마(國馬)가 더욱 성하고 강해졌다.
당은 호시(互市)를 통하여 돌궐의 말을 본격적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로 말미암아 말 증식에 탄력이 붙었고 國馬의 질도 향상되었다.
당시 당은 기병양성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은 숙적 토번과의 만성적인이 전쟁상태에 있었다. 실크로드를 놓고 벌어진 당과 토번의 전쟁은 치열했다. 과거 (유목국가)토욕혼을 병합한(660-667) 후 토번의 기병 전력은 크게 향상되어 있었다.17) 토번과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좋은 전마의 증산이 절실했지만 그 소모를 따라잡지 못했다. 당은 국마의 증식을 위해 서북방으로부터 말을 대거 수입해야했던 것이다.
자치통감 권212, 당기28 현종 개원 13년(725) 11월 조를 보자.
수공(垂拱 685-688) 이후 마(馬)가 太半으로 줄었다. 현종 즉위 초기에 목마(牧馬)가 20만 필이었는데태복경(太仆卿) 왕모중(王毛仲)을 내외한구사로 삼고, 소경(少卿) 장경순(張景順)을 그 부(副)로 삼음으로써 말이 43만 필이 되었다.…略…
현종대 당의 국마가 20만필에서 43만필로 증가했다. 물론 태복경 왕모중과 소경 장경순 등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돌궐 말의 수입이 보다 큰 요인이었다. 앞서 태종․고종기의 국마의 증식도 마찬가지였다.
다 아는 바와 같이 630년 돌궐이 자체 붕괴된 이후 부족민을 거느린 돌궐 추장들이 중국으로 대거 유입되었다. 그 규모는 10만으로 추산된다. 말을 거래하는 시장이 개설되었고 당 정부는 이들로부터 막대한 수를 구입했다.18)
고구려도 말을 조달 받는데 있어 양호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 휘하에 유목민을 거느리거나, 최소한 그들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했다. 일찍이 AD 8년 유목민인 선비족의 일파가 고구려에 복속된 바 있었고,19) 신대왕(165-178)대에 유망하던 유목민(胡族) 5백여호를 받아들이기도 했다.20) 49년 봄 고구려는 선비의 이종(鮮卑異種)인 만리(滿離)와 함께21)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 북중국의 깊숙한 곳까지 급습했다. 그해 후한은 고구려에 대하여 회유책을 썼다. 『후한서』 권20, 제준(祭遵)부 제융전을 보자.
건무 25년(AD49) 제융(祭肜)은 사인(使人)을 시켜 선비(鮮卑)를 불러와서 재리(財利)를 과시하였다. 선비의 대도호(大都護) 편하(偏何)가 견사봉헌(遣使奉獻)하고 귀화하기를 원하여 제융이 위로하고 상을 주니 얼마 안 있어 다시 친히 항부(降附)하였다. (선비와) 이종(異種)인 만리(滿離)와 고구려도 마침내 낙역(駱驛)하여 관새(款塞)하고 초구(貂裘)와 호마(好馬)를 올리니 황제는 곧바로 그 상사(賞賜)를 두 배로 하였다.
요동태수 제융은 선비에게 유화책을 썼고, 그 손길을 고구려에까지 미쳤다. 고구려․만리는 후한과 조공 형식을 띤 교역을 하는데 초구(貂裘)와 호마(好馬)을 증여했다. 고구려나 만리 양자 가운데 호마의 생산자가 누구이든지 당시 고구려는 호마의 안정적인 공급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121년에 가서 고구려는 (후한의)遼隊공격에 선비 기병 8천을 동원했다. 후한서』권115, 고구려전을 보자.
여름에 다시 요동 선비(鮮卑) 8천 명과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鮮卑와 濊貊(고구려)이 해마다 노략질을 하여 小民을 잡아가 그 수가 천 수백명이나 되었는데…
2세기 초반부터 고구려는 선비와 함께 후한의 변방을 지속적으로 약탈했다. 사람을 잡아가 대가를 받고서야 풀어주었다. 당시 고구려의 군사적 동맹상대인 선비족은 공동이익을 위해 보조를 맞추고 있었고, 양자는 공생관계였다.22)『후한서』권51, 교현(橋玄)열전을 보면 후한 환제(146-167) 말에 선비와 남흉노 및 고구려왕 백고(신대왕)의 약탈이 있었다고 한다.23) 그 시기는 후한의 환제와 고구려 신대왕(165-178)의 즉위년이 겹치는 165년에서 167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 확실하다. 또『후한서』권8, (효령제기 9)을 보면 건령 원년(168) 12월에 선비와 고구려(濊貊)가 유주와 병주 2주를 약탈하였다고 명기하고 있다.24)
소수림왕대에도 고구려는 휘하에 유목민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소수림왕 8년(378년)의 9월의 일이다. 거란은 고구려의 북변을 침공했다.
秋九月, <契丹>犯北邊, 陷八部落(『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6).
거란은 고구려의 북방 8부락(八部落)을 함(陷)했다. 이 8개의 부락은 고구려에 속해있는 유목민 부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광개토왕은 즉위한 원년(391)에 거란을 친다.
9월 九月, 거란을 북벌하여 남여 5백을 포로로 잡고, 또 (거란이 잡아간) 본국의 함몰민 1만을 초유(招諭)하여 데리고 왔다.25)(『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6).
본국 함몰민 1만구(本國陷沒民口一萬)는 13년 전에 거란이 잡아간 8개 부락민(陷八部落)이었을 가능성이 있다.26) 이는 초유하여 데리고 왔다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가 유목민에게 항상 평화적으로 말을 공급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395년 고구려는 유목민인 패려(稗麗)를 약탈했다. 「광개토왕비」 영락 5년 조를 보자.
영락 5년 을미년에 (광개토)왕은 패려가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기 때문에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에 나서 부산(富山)을 지나 산을 등지고 염수(鹽水) 하반에 이르러 그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였는데 (포획한) 소(牛)․말(馬)․양떼(郡羊)의 수가 헤아릴 수 없었다.
광개토왕은 패려를 끈질기게 추적했다. 얻어진 결과는 만족할만한 것이었다. 말을 비롯하여 노획한 가축들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유목민에 의해 훈련되고 사육된 말들은 대부분 질이 좋다.
439년 고구려 장수왕은 말 800필을 (유)송에 보냈다..27) 그것은 송 황제의 요청이 있어서였다. 고구려의 마가 우수하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그 말은 조련된 전마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고구려는 유목민이 세운 북위와 긴장관계에 있었다.28) 기병전력의 강화가 절실했고, 상당한 전마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479년 고구려와 유연(柔然)의 모의가 있었다. 양국사이에 있는 지두우족을 협공하여 분할하자는 것이었다. 위서 권84, 거란전을 보자.
태화 3년 고구려가 몰래 유연과 모의하여 지두우(地豆于)를 취하여 나누려고 하였다. 거란은 이들(고구려와 유연)의 침탈을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거란의 막불하(莫弗賀) 물우(勿于)는 그 부락의 거(車) 3천승과 중(衆) 만 여명를 거느리고 잡축(雜畜)을 몰고 (北魏의 영내에) 들어와 내부(內附)하기를 청했다.
고구려 장수왕과 유연의 가한(可汗) 자성(子成)이 연합하여 내몽고의 (요하 서쪽 상류)유목민 지두우를 분할하려고 했다. 이에 놀란 거란이 북위의 영내로 들어갔다. 고구려의 계획이 지두우 지역 분할인지 지두후족의 그것인지 아니면 양자를 모두 고려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러한 계획이 말의 수급문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한편 고구려는 장수왕의 손자 문자왕대(492-518)에 가서도 유목민인 거란족 일부를 그 아래에 두고 있었다. 위서 권32, 봉궤전을 보자.
“앞서 거란이 (北魏의) 변민(邊民) 60여명을 노략(擄掠)하고 또 고구려의 호위하에 (북위의 변민)을 노략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 (북위관리) 봉궤(封軌)가 그 상황을 모두 듣고, 글을 보내 그러한 일에 대하여 경고하자 운이 노략해간 사람들을 요청하니 (고구려왕) 운(雲-문자왕)이 노략해간 사람들과 재물을 모두 돌려보냈다.
거란이 북위의 변민을 잡아갔다. 그런데 북위의 관리 봉궤는 고구려에 북위 변민들의 인도를 요청한다. 북위는 고구려가 거란을 조정하는 배후인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 전부터 고구려의 영토 안에 적지 않은 거란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29) 당시 고구려가 이동을 하는 유목민인 거란족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로부터 말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30)
하지만 이동하는 유목민을 완전한 지배 하에 묶어 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거란족은 어디까지나 고구려와 공생관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것은 고구려가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는 유목민이 원하는 곡물과 철, 생필품을 주고, 그 대가로 말을 포함한 가축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진서』권125, 풍발전은 주목된다.
고막해(庫莫奚)의 처출고진이 3천여락을 거느리고 와서 교시(交市)를 요청하면서 1천 필을 헌납하므로, 그것을 허락하여 영구(營丘)에 교시를 설치하였다.
411년 북연(北燕)의 풍발에게 유목민인 고막해가 교시를 요청하였다.31) 고막해는 북연에게 말 1천 필을 주고 곡물 등 생필품을 받아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와 유목민인 돌궐 사이에 교시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605년 수가 돌궐 계민가한(啓民可汗) 휘하의 2만기(騎兵)를 동원하여 거란을 유린한 바 있다. 이때 돌궐군대는 고구려와 교역을 위해 이동하는 상단(商團)으로 위장했다.32) 대규모의 돌궐인들이 고구려와 교역을 위해 유성으로 이동하는 것을 거란인들은 의심 하지 않았다. 그것은 거란인들에게 익숙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유성은 이전부터 고구려의 생필품과 돌궐의 말이 상호교환 되는 장소였을 것이다.
7세기 중반에 고구려의 기병 보유 규모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의 일이다. 그 해 4월 계모성과 비사성을 함락시킨 당군이 요동성을 포위했다. 명장 이적(李勣) 예하의 당군이었다. 원군이 없는 농성전은 의미가 없다. 평양의 고구려 본부에서 국내성과 신성에 명령을 내렸다. 포위된 요동성을 구원하라는 것이다. 고구려 기병 4만이 여기에 동원되었다.33) 국내성은 구도이고 평양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신성도 고구려에서 큰 성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단 2개의 성에서 차출할 수 있는 기병의 규모로서는 상당하다.
같은 해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에 임박하자, 고구려는 고연수․고혜진을 필두로 하는 중앙군 15만을 동원하여 이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비참하게도 고구려군은 당의 유인술에 걸려 격파되었다. 이때 당군이 노획한 우마가 10만 이었다 한다34) 이러한 대규모의 우마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고구려국가가 백성들로부터 징발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특히 개인이 사육할 경우 말은 훈련을 제대로 시키기 쉽지 않아 전마로 활용이 힘들다. 당시 고구려에서 대규모 국영목장들이 많은 곳에서 운영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5. 맺음말
삼국사기 온달전에서 평강공주는 좋은 말을 선택하고 사육하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공주는 온달에게 시인들의 말(市人馬)을 사지 말고 국마(國馬)를 구입하라고 충고한다. 국마 가운데서도 파리한 것을 권유한다. 처음에 건강치 못한 국마는 공주가 사육한 후에는 기력을 되찾는다. 온달은 그 말을 타고 국왕 친임사냥대회에 참가하여 특출한 기량을 발휘하게 되고, 나아가 무장으로 등용이 되어 적(북주)의 외침을 막아낸다.
궁중에서 자란 평강공주가 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 말을 고를 수 있는 고구려여성들의 능력이 온달전에 반영되어 있다고 보고 싶다. 「동명왕편」에 의하면 주몽은 어머니 유화(柳花)의 도움으로 날랜 말을 알아내어 이것을 획득한다.35)
온달은 국마를 구매하기 위해 시장으로 갔다. 국가가 처분한 국마가 시장에 나와 있었다. 고구려국가가 국마를 일정 보유하고 유지하는데 있어, 하자가 있는 말들의 지속적인 처분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유지비용을 절감할 뿐만 아니라 국마의 질을 일정 유지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조련과정에서 좋은 말과 좋지 않은 말은 자연스럽게 구분된다. 좋지 않은 말은 잡마(雜馬)로 분류된다. 평화 시 국가가 말을 부양하는데 부담이 될 경우 그것은 선택 처분의 유력한 대상이다. 훈련을 받은 국마라 하더라도 건강치 못하면 처분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말을 대량으로 보유한 국영목장에서 재생의 기회는 가지기 어렵다.
공주가 권유한 국마는 건강치 못한 것이었다. 공주는 시인마가 건강하고 보기도 좋지만 그것을 애초 권유하지 않았다. 시인마는 훈련과정에서 탈락을 수반하는 검증과정이 없다고 여겨졌다. 시장에 나온 건강한 국마는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검증과정에서 초기에 탈락한 것이다.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말은 애초에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국영목장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국마는 건강만 회복하면 전과 같은 기량을 가질 수 있다. 숙련된 조련사들은 국가의 관리 하에 있다.
한편 시인마의 존재는 고구려에서 말이 유통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고구려의 민간인들에게 말의 수요가 상시적으로 있었고, 개인들이 적지 않은 말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도 유사시를 대비하여 권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北史 고려전에는 “봄․가을에는 매번 전렵을 하는데 왕이 직접 참석하였다”라고 하여 고구려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국왕이 친히 임하는 사냥대회가 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36) 그 참여범위는 신하들과 5부의 병사 모두였다.37)
삼국사기 온달전에서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말을 사주고 그것을 기르게 한 것은 이 사냥대회에 그를 참여시키기 위해서였다. 물론 온달뿐만 아니라 다른 5부의 젊은이들도 국왕과 고관대작들이 직접 참관하는 사냥에 나아가기 위해 평소에 실력을 갈고 닦았을 것이다. 국가적 사냥대회는 등용의 창구이기도 했을 것이며, 그것은 젊은이들이 평소에 기마궁술을 연습하게 하는 무엇보다 강력한 동기였을 것이다. 국가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고구려국가는 유목민들로부터 말을 조달 받을 수 있는 양호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휘하에 직접 유목민들을 거느리거나, 최소한 그들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했다. 유목민들의 말을 구입하는데 있어 국가가 이를 독점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고구려는 유목민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탈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되찾아 오기도 했다. 때로는 고구려가 유목민들을 습격하여 그들의 가축들을 몰아오기까지 했다.
한편 고구려는 외국에 말을 내보내기도 했다. 439년 송의 황제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 장수왕은 말 800필을 (유)송에 주었다. 외교적 고려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의 국영목장에서 마의 생산이 원활하지 않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장수왕 27년 당시 고구려는 유목민이 세운 북위와 긴장관계에 있었다. 기병전력의 강화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송의 황제에게 증여된 그 말은 잘 조련된 전마였다고 생각된다.
1) 李仁哲, 「4-5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 軍史 33, 1996.
김두철, 韓國古代 馬具의 硏究, 동의대박사논문, 2000.
2) 기수의 騎射역량이 주목한 연구도 있었다(서영교, 「고구려기병과 鐙子」, 歷史學報 181, 2004. 서영교,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의 전술과 무기」, 高句麗硏究 17, 2004.).
3) 李仁哲,『新羅村落社會史硏究』일지사, 277-280쪽.
4) 서영교, 「신라 통일기 기병증설의 기반」『역사와 현실』45, 2002.
5) 李泰鎭,, 「新羅 村落文書의 牛馬」『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이우성 정년논총)』上, 1990.
6) 하자노프 著, 김호동 譯,『遊牧社會의 構造』지식산업사, 1990, 70쪽.
7) 『당육전』권17 태복사 전구령 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다. 필요한 자료만 대충 정리했다. 좋은 말 1 필, 중급 말 2필, 하급 말 3필 마다 丁 1인을 배정했고, 구체적인 말의 먹이로 하루에 粟 1斗, 소금 6작이 들었다. 증식과 관련하여 암말은 4살․5살부터 증식하는데, 말은 한 해에 1백 마리당 60마리를 증식시켜야 한다. 말이 외국에서 온 경우는 첫해에 40마리 의무를 부과했다. 다음 해에는 50마리, 3년째에는 전부를 부과한다. 일정 비율을 손실로 인정하는데, 외국에서 새로 온 말은 20필, 2년차는 15필을 빼준다.
8) 이기백은 이 기록을 설화적 색채를 띤 허구적인 부분으로 보았다. 전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해 버릴 수 없겠지만 적어도 온달의 무인으로의 성장을 공주의 내조로 보려는 것은 허구적일 것이라고 단정했다(이기백, 「溫達傳 檢討」, 韓國古代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1996, 105-106쪽). 하지만 이 설화에서 고구려인들이 다양한 말을 바라보는 시선이 투영되어있다고 생각한다. 기록을 허구로 간주 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완벽한 논리이다.
9) 삼국사기 온달전.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근구수왕 조.
10) 삼국사기 권24, 근구수왕 즉위년 조, “저쪽(고구려)의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을 채운 허위의 군사일 뿐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뿐입니다. 만일 먼저 이를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11) 노태돈,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1999, 159쪽.
12) 중국의 국마는 전통적으로 서북방 농우지역에 산재한 목장에서 사육되었다. 이는 삼국사기 권18, 장수왕 24년 조에 “북위 왕이 (장수왕이) 명령을 어겼다고 해서 隴右의 騎兵을 (고구려로) 보내려고 하였는데…”라는 것에서도 암시 받을 수 있다.
13) 서영교, 「장보고의 기병과 서남해안 牧場」, 震檀學報 94, 2002.
14) 唐六典 권17, 太僕寺 典牧署 조 “진․한은 태복의 속관에 목사원령을 두었는데, 모두 변군에 있었다(秦漢太僕屬官有牧師苑令, 皆在邊郡)”. 同書 권17, 上牧 조. “한구의에 태복 예하의 목사원은 36 곳으로 북변과 서변에 분포되어 있는데 낭으로 원감을 삼았다. 관노비 3만인이 말 30만필을 나누어 키웠는데,.(한구의: 太僕牧師諸苑三十六所, 分布北邊西邊. 以郞爲苑監, 官奴婢三萬人分養馬三十萬頭…)”.
15) “初, 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甚勤, 馬日肥且壯“.
16) 한서 조충국전.
17) 서영교, 「羅唐戰爭의 개시와 그 배경-國際情勢 변화와 관련하여-」, 歷史學報 173, 2002.
------, 「羅唐戰爭과 吐蕃」, 東洋史學硏究 77, 2002.
18) 서영교, 「高句麗의 對唐戰爭과 내륙아시아의 諸民族」, 軍史 49, 2003.
19) 삼국사기 권13, 유리명왕 11년.
20)『삼국지』권30, 동이 고구려전 “백고(伯固-8대 신대왕165-178)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을 노략질 하였고, 또 유망한 胡族 5백 여호를 받아들였다(自伯固時, 數寇遼東, 又受亡胡五百餘家)”.
21) 박경철, 「고구려의 異種族支配 실상」『韓國史學報』15, 고구려사학회, 2003, 295쪽.
22) 徐榮敎, 「高句麗의 狩獵習俗과 遊牧民」『高句麗硏究』21, 2005, 319-326쪽.
23) “桓帝(146-167)末, 鮮卑、南匈奴及高句驪嗣子伯固並畔, 為寇鈔”.
24) “[建寧元年]… 十二月, 鮮卑及濊貊寇幽并二州”.
25)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26) 朴京哲, 「高句麗의 東蒙古經略, 白山學報 71, 2005, 129쪽.
27) 송서 권97, 고구려전“璉每歲遣使. (元嘉)十六年, 太祖欲北討, 詔璉送馬, 璉獻馬八百匹”..
28) 436년 고구려는 북연 수도를 약탈하고 그 곳의 사람들을 모두 고구려로 데리고 온 바 있다. 북위는 북연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화룡성의 고급인력과 물자는 고구려가 모두 가로챘다. 이에 분개한 북위의 황제는 농우에 있는 북위의 기병을 징발하여 고구려를 치려고 했다(서영교, 「北魏 馮太后의 執權과 對高句麗政策」, 中國古代史硏究 11, 2004).
29) 李在成, 『古代 東蒙古史硏究』법인문화사, 1996, 179쪽.
30)『수서』권84, 거란전을 보면 “其後為突厥所逼, 又以萬家寄於高麗.”라고 하여 거란이 고구려에 내부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재성은 거란 1만가의 고구려에 기속을 555년 이후 580년대 초반 사이로 보고 있으며, 그 전후 사정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李在成, 『古代 東蒙古史硏究』법인문화사, 1996, 206-207쪽).
31) 李在成, 『古代 東蒙古史硏究』법인문화사, 1996, 119-120쪽.
32)『신당서』권116, 위운기전 “始, 契丹事突厥無間, 且不虞雲起至. 既入境, 使突厥紿雲詣柳城與高麗市易, 敢言有隋使在者斬. 契丹不疑. 因引而南, 過賊營百裏, 夜還陣, 以遲明掩擊之, 獲契丹男女四萬, 以女子及畜產半賜突厥, 男子悉殺之, 以餘眾還. 帝大喜”
33) 신당서 권220, 고려전.“ 勣遂圍遼東城. 帝次遼澤, 詔瘞隋戰士露骼. 高麗發新城、國內城騎四萬救遼東”
34) 신당서 권220, 고려전 “帝料酋長三千五百人, 悉官之, 許內徙, 餘眾三萬縱還之, 誅靺鞨三千餘人, 獲馬牛十萬, 明光鎧萬領.” 구당서 권199, 고려전을 보면 馬가 3만 필이고 牛가 5만 두라고 한다.
35) 譯註三國史記 3, 정문연, 1997, 409쪽(주 29) 재인용.
36) 隋書 권81, 고려전에도 “每春秋郊獵 王親臨之”라 하여 같은 기록이 보인다.
37) 삼국사기 권45, 온달전 “고구려에서는 봄철 3월 3일이면 樂浪 언덕에 모여 田獵을 하고, 그 날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신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출처:[한사모]한국사를사랑하는모임 다음카페.
고구려 시대 말에 대한 자료라서 올려봅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
가져갑니다.
고구려 유민 왕모중(王毛仲)은 자치통감뿐만 아니라 장유-조선 인조때의 문인-의 <계곡집>,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 박지원의 <열하일기>,특히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고전번역원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