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증(胡曾)-오강(烏江)
爭帝圖王勢已傾(쟁제도왕세이경) 황제 자리 다투었으나 형세 이미 기울고
八千兵散楚歌聲(팔천병산초가성) 팔천 병사 흩어지고 초나라 노래 소리
烏江不是無船渡(오강불시무선도) 오강은 배로 건너지 못할 바 아니지만
恥向東吳再起兵(치향동오재기병) 부끄럽구나, 동오를 향해 다시 군사를 일으키기도
*호증[胡曾, 생몰년 미상, 당나라 소주(邵州) 소양(邵陽) 사람. 자는 추전(秋田), 장사(長沙, 지금의 湖南에 속함) 사람이라고도 한다]은 의종(懿宗) 함통(咸通) 중에 여러 차례 진사에 응시했지만 낙방했고, 사방을 유람하면서 많은 견문을 쌓았다. “영사시(咏史詩)” 3권이 전한다. 호증은 잠시 시인이며 관리였던 고병 밑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위 시는 문학비평가이신 김희보님의 “중국의 명시”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본 것인데, 항우의 비장한 최후를 읊은 시입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의 죽음을 계기로 각지에서 봉기한 세력은 결국 항우와 유방(2~4구) 두 우두머리에 집약되고, 처음에는 항우가 우세하였다가 나중에 전세가 역전되는데, 항우가 해하의 싸움에서 패하여 오강까지 왔을 때 오강의 정장(亭長, 촌장)이 배를 준비하여 와서는 강동으로 건너가 재기를 도모하라고 권하였는데, 그러나 항우는 이미 강동의 자제 8천 명을 모조리 전사시켰는데, 무슨 낯으로 그 부모들을 대하겠느냐며 자살하였다. 위 시는 이렇듯 영웅의 말로를 애석하게 여겨 쓴 것 중 하나이고, 항우의 최후를 읊은 수많은 시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두목의 ‘제오강정’이고, 그 외에 증공의 ‘우미인초’가 있습니다.
*烏江(오강) : 안휘성 화현의 동북쪽에 위치함, 오늘날 오강포라는 이름으로 불림, 항우가 건너려다 자살하여 죽은 곳으로 항우의 비가 있다.
爭帝圖王(쟁제도왕) : 진의 통일 세력이 쇠퇴해짐에 따라 항우가 유방과 황제 자리를 다투고 스스로 패왕이 되려고 도모한 것.
八千兵(팔천병) : 처음에 항우가 강동의 고향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부하 군사는 8천이었다
楚歌聲(초가성) : 항우의 군사가 안휘성의 해하에 진을 쳤을 때 군사 수도 많지 않았고 보급도 떨어졌는데, 밤이 되자 그들을 포위하던 한의 군사가 초나라 노래를 불러 그 소리를 듣고 항우는 초나라가 유방에게 점령되었는가 생각하고 깜짝 놀라 비분강개한 사실을 말함.
船渡(선도) : 배로 건너는 것. 오강을 배로 건너는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건너려면 얼마든지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할 바도 아니다. 정장의 말을 읊은 구절이다. 마침 그때 오강의 정장은 배를 준비하고 항우를 기다리며 다시 군사를 일으키도록 권고한 것, 정장이란 역의 책임자 또는 여관이나 나루터 등을 관리하고 취체하는 책임자
向東吳(향동오) : 강동에서 양자강 동쪽 지방은 춘추 시대 오나라 동부의 영지. 강동은 항우의 고향, 항우는 그 자제들을 이끌고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向은 ...에 있어서의 뜻
첫댓글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은 작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바가 크다고 보이네요. 항우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지만 영웅의 모습은 간직한듯 합니다.
ㅎ, 역사는 승자편이다 보니 말씀하신 그런 측면이 있는 듯 합니다,,,
오강에 한 번 가보면 그 느낌이 새로울 듯 합니다.
회장님의 멋진 댓글에 감사드리고,
오늘도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