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성실과 기쁨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여 나아가오니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실 때
크신 은혜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본문 주해)
13~15절 : 바울 일행은 구브로섬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에 상륙하여 ‘버가’라는 곳에 당도했다. 이때 선교에 동참했던 마가 요한이 바나바와 바울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일어난다. 마가가 선교여행을 중도에서 포기한 이 사건으로 인해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된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
그곳에서 전통대로 율법서인 모세오경과 선지자의 글인 예언서도 읽혀졌다.
그 당시 회당 예배의 순서는 쉐마 기도, 율법서와 예언서 낭독, 설교나 권면의 말씀, 축복 등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때 설교나 권면의 말씀을 선정하는 일은 회당장의 권한이었다.
그것은 미리 준비되어져야 하는 일이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예외로 회당장이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한 것이다. 그것은 회당장이 바울 일행에 소문을 들었고 또 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6~31절 : 바울이 설교를 한다.
회당장의 제안에 바울이 즉각 승낙한 것이다.
그 설교의 대상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생에 의한 유대인과 그리고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던 이방인을 말한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한 것’은 그곳에 많은 헬라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열정적인 웅변의 설교를 하기 위함이었다.
구약성경을 여기저기 인용하여 증거 하는 바울의 설교가 스데반의 설교와 닮았다.
스데반은 이 설교를 하고 돌에 맞아 죽었다.
그때 바울은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바로 스데반의 설교 즉 돌에 맞아 죽을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설교 내용은, 역사 속에 인간이 하는 일은 그저 당장 죽을 일뿐이지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 그리고 그 약속의 절정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행한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정죄하고 죽인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살리심으로 인간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것이 스데반과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였다.
(나의 묵상)
바울은 스데반이 설교할 때 치를 떨며 들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것을 당연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바울이 지금 스데반의 그 설교를 그대로 하고 있다.
분노해서 들은 그때 스데반의 설교가 바울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새겨졌을 수도 있겠다.
그 누구보다 명확한 확신을 갖고 천사처럼 환하게 그리고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죽어가면서도 기도하는 스데반의 순교 모습이 바울에게 너무도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데반의 설교의 최대의 수혜자가 바로 바울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스데반이나 바울의 설교의 요지는, 인간이 하는 일은 그저 악한 일일 뿐이라는 것과 하나님 홀로 하나님의 일을 해 내셨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그 절정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은 그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어떤 힘을 인정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힘을 합쳐, 노력함으로써 어떤 일이든 우리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다는 자기 긍정 내지 인간의 가능성의 말씀 듣기를 원한다.
손에 손잡고 평화를 이루고, 정의를 이루자고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힘주실 것이라고 양념으로 ‘하나님’을 슬쩍 친다. 그러면 사람들이 ‘아멘! 아멘!’하며 열광하는 것을 자주 본다.
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자기의 가능성과 자기의 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밑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통틀어 계속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에게는 죄악 된 본성만이 가득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오직 죄 짓는 일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공연히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다 이것이다.
그러니 자기의와 자기 자랑이 넘치는 바리새인과 유대 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스데반을 돌로 죽인 자들고 그랬고, 분기탱천했던 바울도 그랬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아는 자는 이 ‘기분 나쁜 말씀’이 ‘지당하신 말씀’인 것을 안다.
살아갈수록 하는 짓이 죄 짓는 일일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그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자신에게는 과분하고도 과분한 은혜임을 날마다 고백하지 않을 수 없고, 한 순간도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된다.
날마다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지만 날마다 십자가 그늘 아래서 회복을 구한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구한다.
복음과 생명을 몰랐을 때는 ‘죄’에 대한 설교가 정말 듣기 싫었다.
‘내가 뭐 그리 죄를 지었다고?’하고 반발했다.
내 안에 있는 가능성을 말해 주고, 인간적인 노력과 성실한 삶의 자세 그리고 그 열매인 성공을 말해주는 설교를 들을 때는 가슴 벅차하면서 감격했다. 또 그런 나를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박수치며 기뻐했겠다.
며칠 전 어떤 모임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몸의 중심이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가장 약한 곳’이라는 답을 주셨다.
머리도, 심장도, 팔도 다리도 ‘가장 약한 곳’이 있을 때 그곳으로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그 말씀으로 분단된 이 나라의 현실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였다.
잠시 감동될 뻔 했었다.
그러나 아니다.
나의 중심은 심장이나 머리처럼 중요한 부분도 아니요, 어디 약해진 부분도 아니다.
나의 중심은 오직 주님이시다.
지금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의 분단된 이 나라의 현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곳인지, 약한 곳인지 나는 모르겠다.
주님께서 중심이시니 주님 뜻대로 이루어 나가실 것이다.
비록 통일이 우리의 기도 제목일지라도 주님의 뜻에 이 나라의 통일이 합당하다면, 하게 해 주실 것이요, 아니라면 우리는 그냥 살아야 한다.
세상의 중심도 주님이시다.
스데반과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의 중심은 주님이셨다.
(묵상 기도)
주님,
자나 깨나 예수님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말씀 공부를 할 때도, 기도할 때도
다 주님이십니다.
눈앞의 현상이나 삶의 상황 속에서도,
저의 깊은 심령 속에도,
모든 언어 속에도,
주님만이 풍성하게 나타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