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남은 시간’
1849년 12월 22일,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날씨에 여남은 명의 사형수가 형장으로 끌려나왔다. 한 청년이 다른 두 사람과 함께 형장의 세 번 째 기둥에 묶였다. 사형집행까지는 5분이 남았다.
청년은 이제 단 5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어디에 쓸까 생각해 보았다. 옆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2분, 그리고 남은 1분은 자연을 한번 둘러보는데 쓰기로 했다. 그는 옆의 두 사람과 최후의 키쓰를 나누었다.
“거총!” 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총을 들었다. 조금만 더 살고 싶은 욕망과 함께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다. 바로 그때 말발굽 소리와 힘께 한 병사가 나타나서 소리쳤다.
“사형 중지, 황제가 특사를 내렸다.”
28세의 나이로 총살 직전에 살아난 사형수, 그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죄와 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같은 불후의 명작들을 쓴 세계적 문호 도스트예프스키(1821-1881)였다.
농노제의 폐지, 검열 제도의 철폐, 재판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주의 서클에 가담했다가 1847년 체포되어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사형집행 직전, 황제의 특사에 의해 감형되어 시베리아에 유배를 갔다. 4년 간의 징역 후에 풀려나온 그는 후에 시베리아 유형의 체럼을 기록한 ‘죽음의 집 (1860)’을 발표했다.
‘영혼의 리얼리즘’ 작가로 불릴 정도로 인간의 내면 묘사에 정착했던 도스도예프스키는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에 일생 동안 그를 괴롭혔던 사상적, 종교적 문제, 선과 악에 관한 사색 모두를 쏟아부었다. 물욕과 타락의 상징인 표도르를 아버지로 둔 카라마조프 가의 3형제(방탕하고 무분별하나 순수함을 지닌 장남, 드리트리. 무신론자에다 냉소주의적 지식인 차남, 이반. 수도원에서 사랑을 설파하는 조시마 장로를 추종하는 박애주의자, 알료사) 그리고 아버지와 백치 거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스메르자코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부자와 형제 간의 애욕을 그린 작품이다. 결국 카라마조프 가의 사랑의 결핍은 스메르자쿄프의 친부 살인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유형길에 오른다. 동생 알료사는 형을 따라 나선다.
신이 없는 이상, 남을 사랑해야 한다는 법칙도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신이 없으면 인간이 신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한 이반에게 알료사는 말한다.
“논리보다 앞서서 우선 사랑하는 거에요. 사랑은 반드시 논리보다 앞서야 해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알게 되죠.”
도스토예프스키는 드미트리의 입을 빌려 인간의 마음이란 ‘악마와 신이 서로 싸우고 있는 싸움터’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신이 마음속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고, 선과 악의 투쟁은 결국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랑하려는 힘과 사랑하지 못하는 힘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정신적인 지주로 등장하는 조시마는 ‘지옥이란 다름 아닌 바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데서 오는 괴로움’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그는 역설한다. ‘대지에 입 맞추고 끊임없는 열정으로 사랑하라. 환희의 눈물로 대지를 적시고 그 눈물을 사랑하라. 또 그 환희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것을 귀중히 여기도록 하라. 그것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1878년에 쓰기 시작하여 1879년에 처음으로 발표되고 이듬해 완결된 이 작품에는 ‘작가로부터’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여기서 이 작품을 미완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후 20년 간 계속 쓸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결국 그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불과 2개월이었다. 다음 해 1월28일에 급사했기 때문이다.
연구실의 쪽창 밖으로 보이는 은행나무가 자지러질 듯 노란색을 뿜어낸다. 하늘에는 노을빛이 감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죽음을 5분 남겨두고 그 귀중한 시간 중에 1분이나 할애하고자 했다던 자연도 이제는 서서히 순명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내 삶도 이제는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나는 눈물의 열정으로 대지를 사랑하지 못한다. 내 마음에서는 치열한 싸움만 계속하고 있다.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아름다운 저녁놀과 가을을 볼 수 있을까. 한가지 확실한 건 사랑 없는 ‘지옥’에서 속절없이 헤메기엔 내게 남은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