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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서수(君舟庶水)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라는 뜻으로, 배는 물이 없으면 띄울 수 없듯이 군주는 백성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엎기도 한다.
君 : 임금 군(口/4)
舟 : 배 주(舟/0)
庶 : 여럿 서(广/8)
水 : 물 수(水/0)
순자(荀子)가 쓴 순자(荀子) 제9절 왕제(王制)에 나오는 말이다. 군주는 배와 같고 서인(백성)은 물과 같다. 배는 물이 없으면 띄울 수 없듯이 군주는 백성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엎기도 한다(水則載舟, 水則覆舟).
따라서 군주는 항상 백성을 기반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모든 위정자는 배와 같고 국민은 물과 같다. 국민 없는 위정자는 있을 수 없으며, 국민은 위정자를 뒤엎기도 한다. 따라서 위정자는 항상 국민의 삶과 바램을 살펴야 한다.
1. 선거의 계절에
군주정치 시대의 백성은 난폭한 군주가 나타나도 마음대로 바꾸기 어려웠다. 핍박받고 시달리다가 민란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쉽지 않았다. 동서의 역사를 막론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난폭한 군주는 백성의 고혈을 짜다가 역성혁명이란 이름으로 권좌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때 군주를 교체하거나 왕조가 무너지고 새 왕조가 들어서기도 하였다. 이때도 백성들은 능동적인 역할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유는 일반 백성들은 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신분과 계급사회라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능동적인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역사에서 보듯이 시민계급이 성장하고 교육의 기회가 확대됨에 따라 백성들은 권리를 주장하고 추구하게 되었으며 봉기하여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난폭한 군주에 대항하여 그들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근대의 역사에서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 혁명이었다.
고려, 조선 등 한반도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후기의 정치는 그 질곡이 엄청났는데도 백성들은 군주를 갈아치울 수 없었다. 그러나 해방 후 민주주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부정하고 불의한 정권에 항거할 줄 알았다. 그리고 국민이 원하는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피를 흘리며 노력하였다. 3.15 부정선거에 대항한 4. 19혁명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룩한 민주화 시대에 국민은 국민이 원하는 정부와 지도자를 선택하고 세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민주주의 시대의 국민은 부정하고 무능한 정부를 국민의 이름으로 바꾸고 새로운 정부와 지도자를 세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해졌는가? 첫째,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이념의 정립과 민주정치라는 정치 형태를 바로 세웠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국민의 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삶의 형태가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자유와 평등이 올곧은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확대되는 만큼 국민의 교육과 지적 수준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급속도로 팽창된 교육의 혜택에 따라 국민의 민주 의식이 발달하였고 빠른 경제성장으로 시민의식과 자유와 평등 의식이 확대되었다. 그 결과 우린 민주주의의 정착과 함께 비로소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국가가 갖는 중요한 특징이 선거를 통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는 물론 정치인들을 국민이 직접 뽑아 세우는 데 있다. 따라서 선거는 민주주의 국가의 핵심이요 꽃이다. 민주국가의 국민은 선거를 통해 최고 통치자를 비롯한 모든 주요 정치인을 뽑아 세우고 바꾸고 물러나게도 한다. 그래서 민주정치는 선거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민주정치를 택한 국가의 국민이 올바른 선거 정치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현명해져야 한다. 국민이 현명해진다는 것은 정치인들의 당리당략이나 흑색선전 등에 함몰되지 않고 이성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판단과 결정이 있을 때 가능하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국민은 무능한 정부와 교활한 위정자들을 선택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거기에는 국민이 이성보다는 감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1934년 히틀러는 괴벨스를 앞세운 기막힌 선전 선동 정치를 통해 독일 국민의 90% 이상의 지지를 얻어 총통의 지위에 올랐다. 그것은 다가올 독일 국민의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나 당시 독일 국민은 그것을 모르고 오로지 히틀러에 맹종하고 있었다. 결과는 엄청난 독일 국민의 희생과 2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독일의 분단을 가져왔다.
그리고 유대인을 포함한 인류에게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그것은 히틀러의 죄악만이 아나라 히틀러가 그렇게 하도록 따라 주고 지지해 주었던 독일 국민의 몫이기도 했다. 이성적 사고를 중시한다고 알려진 독일 국민은 전혀 이성적이지 못했다. 이런 사례는 선거를 통한 국민의 선택이 이성적이지 못했을 때 국민은 그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민주국가에서 물(水)인 국민이 지도자인 배(舟)를 바꾸고 뒤엎을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며 신성한 수단은 선거이다. 이때 국민은 현명하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만약 국민이 현명하고 이성적이지 못하면 히틀러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 그가 오만하도록 하였던 독일 국민처럼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르게 된다. 그런데 민주국가의 국민 상당수는 자기들의 잘못된 선택을 탓하기보다는 지도자와 시국만 탓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4.10 총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상한 선거법으로 온갖 위성정당이 난무하고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흠결이 넘치는 사람들이 후보자로 뛰어들어 자기의 지지를 선전하고 있다. 여기에 상당수의 사람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우린 정말 선거를 통한 선택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 선택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이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이성을 바탕으로 합리적 선택을 하여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성능 좋고 현명한 지도자인 배를 선택하는 것은 그 선택권을 가진 국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바른 지도자인 배(舟)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 선택권을 가진 물(水)인 국민이 맑아야 하고 현명하여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은 물(水)이며 지도자(군주)는 배(舟)이기 때문이다.
2. 순자(荀子)가 말하는 군주서수(君舟庶水)
순자는 "군주는 배(舟)이고 서인은 물(水)이다. 따라서 수즉재주(水則載舟;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수즉복주(水則覆舟; 물은 배를 뒤엎기도 한다(荀子 9장 왕제 4절)"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순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말이 놀라면 군자는 수레에서 안정될 수 없고 서인(庶人; 백성)이 정사에 놀라면 군자는 자리에서 안정될 수 없다. 말이 놀라면 이를 안정시키는 것보다 나은 게 없고, 서인(백성)이 놀라면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 현량(賢良; 경학에 밝고 덕행이 뛰어난 선비)을 정선해 쓰고, 독경(篤敬)을 거용해 효제(孝弟)를 흥기 시키고, 고과(孤寡: 고아와 과부)를 거두고, 빈궁(貧窮: 가난해서 생활이 어려운 자)를 원조한다. 이리하면 서인이 정사에 안정될 것이다. 서인이 정사에 안정된 후에 군자 또한 자리에 안정될 수 있다.
그래서 군인(君人: 군주)이 안정되고자 하면 평정애민(平政愛民: 정사를 공평하게 하면서 백성을 사랑함) 보다 나은 게 없고, 영예(榮譽)롭고자 하면 융례경사(隆禮敬士: 예를 높이고 선비를 공경함)보다 나은 게 없고, 공명을 세우고자 하면 상현사능(尙賢使能: 현자를 숭상하고 재능있는 자를 두루 씀) 보다 나은 게 없다. 이는 군주의 대절(大節: 큰 원칙) 이다. 이 3절(三節)이 합당하면 부당한 게 없다. 그러나 이 3절이 부당하면 그 나머지가 비록 곡당(曲當: 모두 지극히 합당함) 할지라도 아무 이익이 되지 못한다.
순자가 말하는 정치의 대절(大節: 큰 원칙)인 평정애민(平政愛民), 융례경사(隆禮敬士), 상현사능(尙賢使能)은 공정과 민생이 첫째요, 스스로 도덕적 흠결이 없어야 하며 예의를 숭상하는 일이 둘째요, 올바른 인재를 등용하여 쓰는 일이 셋째다. 이는 오늘날에도 지극히 통하는 기본 원칙이 된다.
김삿갓이 방랑 생활을 하는 중에 함흥지방에서 함흥 부윤 홍치준(洪致俊)을 만났다. 홍치준이 김삿갓에게 다섯이나 되는 자기 아이 훈장이 되어 달라고 사정하는 자리에서 정사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특히 순자가 말한 평정애민(平政愛民)의 길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제 김삿갓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관리에게 평정애민(平政愛民)의 세 가지 길이 있는데 첫째는 나라의 재물을 훔치지 말 것, 둘째는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지 말 것, 셋째는 매사에 공(公)과 사(私)를 엄격히 하여 모든 공사를 공평무사하게 처리할 것을 등입니다. 이 세 가지만 잘 지키면 백성들은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목민심서에서 강조하는 바로 살펴보면, 나라의 재물을 훔치는 일은 공금을 직접 횡령하는 일, 세금을 함부로 쓰는 일, 공금을 사적으로 쓰는 일, 일을 방만하게 하여 국고를 낭비하는 일 등 모두가 해당된다.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지 말 것에는 배성을 직접 수탈하고 뇌물을 받는 일뿐 아니라 국고를 함부로 사용하여 낭비하는 일도 해당된다. 국고는 백성이 낸 세금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이용하여 인사 청탁을 하거나 법인 카드를 함부로 쓰는 일 또한 이에 해당한다. 다산은 평정애민(平政愛民)의 핵심으로 청렴과 절용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지도자로 나선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이 너무도 많다. 공정과 상식에서 벗어난 자를 공천하는가 하면, 막말과 국가의 근본을 무시하는 자가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법정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자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서는데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도 있다. 국가관과 지향과 비전이 무엇인지 근본부터 혼돈되는 자를 공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찌된 일인가? 인간은 정치와 권력, 돈에 연관되면 이성적 동물이 아닌 것 같다.
3. 군주서수(君舟庶水) - 올바른 지도자를 세우기 위한 국민의 역할
앞에서 순자가 말했듯이 지도자는 배(舟)이고 국민은 물(水)이다. 물에는 올바른 배가 떠서 잘 운행되어야 한다. 만약 배가 올바르지 못하고 오염되면 물도 오염된다. 물이 그 오염을 방지하고 계속하여 깨끗하고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배를 잘 띄워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올바른 지도자를 세우는 일은 순전히 국민의 몫이다. 국민은 선거라는 방식을 통해 지도자를 세운다. 그리고 그 지도자란 배를 국민 위에 띄운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국민의 현명한 판단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역할이다.
첫째, 정직하고 믿음성이 있는 자를 우리의 배로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지도자가 되려는 자가 지금까지 한 말과 행동의 일관성 여부를 통해 알 수 있다. 과거의 말과 현재의 말이 일관성이 있는가? 과거의 자기의 말에 책임을 지고 있는가? 그런데 우린 지금 말을 수없이 바꾸고 그 말대로 실천하지 않은 사람을 우리의 배로 선택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둘째, 나라의 돈을 함부로 쓰려는 자를 경계하여야 한다. 나라의 돈은 국민이 낸 세금이다. 물론 민생은 아주 중요하다. 민생이 중요하다고 하여 국민에게 무상으로 돈을 주려는 것은 옳지 못하며 공평하지도 않다. 전 국민에게 일정액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국민이 낸 세금이다. 따라서 현금 살포성 정책은 분명 표퓰리즘에 해당하는 선심성 정책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일자리의 창출을 통한 생활 안정이다.
셋째, 도덕적 흠결이 있는 자를 경계하여야 한다. 특히 막말과 성 비위 문제, 음주운전 등의 경력이 있는 자들, 법정에서 실형을 선고받았거나 그 경력이 있는 자들, 예의를 저버린 오만한 자들 이런 자들을 우리의 배로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자들은 융례경사(隆禮敬士)에 지극히 어긋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넷째, 말 잘하는 자들보다 말에 신뢰가 있는 자를 택해야 한다. 공자도 ‘말을 청산유수같이 하는 자는 진실성이 떨어지는 자가 많다.’고 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교언영색(巧言令色) 하기 쉽고 그 교언영색(巧言令色) 하는 자에게는 인(仁 )이 없다. 오로지 임기응변과 술책만 난무할 뿐이다. 1930년대 독일 국민은 말 잘하는 히틀러와 괴벨스의 임기응변과 술책에 넘어갔다. 그리고 독일 국민은 그 댓가를 톡톡하게 치렀다.
다섯째, 후보자의 국가관과 가치관을 살펴야 한다. 국가관은 국가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다. 후보자의 국가관이 지금 대한민국의 헌법과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체계에 부합하는가를 따져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감정적으로든 어떤 이유로든 잘못된 선택을 하면 그 후유증은 국민이 짊어져야 할 몫일 것이다.
여섯째, 지금 후보자들은 엄청난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정치에서 공약(公約)은 공약(公約)이기도 하지만 공약(空約)이기도 하다. 사실 그들이 내세우는 공약(公約)의 상당수는 공약(空約)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무리한 공약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지금 후보자들이 내 세운 공약을 다 실현하려고 하면 나라의 제정은 바닥이 날 것이다. 따라서 그런 공약에 현혹되지 말고 냉정해 져야 한다.
일곱째, 무엇보다도 그가 가진 정치적 지향성과 정치 개혁의 의지다. 그가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는가? 그의 정치적 신념과 투지를 살펴야 한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변자가 되어야지 여의도의 대변자가 되어선 안 된다. 우린 제21대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에서 그들이 국민의 대변자가 아니라 여의도의 대변인 역할을 얼마나 많이 하여 왔는지를 보았다. 여의도 대변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한 정당은 오만한 정당이다. 여의도의 대변자들이었기에 방탄 국회를 만들고 밥그릇 채우기에 바빴던 것 아닌가?
확실한 것은 우리가 띄울 배를 선택하는 다가오는 4.10 총선을 앞두고 국민은 더욱 현명해져야 한다. 우리 국민은 과거 그런 현명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 현명함이 발휘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국민 상당수의 정치 지향이 1930년대 독일 국민의 정치 지향과 비슷한 것 같다.
순자가 말한 것을 다시 거론하면 국민은 물(水)이고 위정자들은 국민이 띄우는 배(舟)이다. 물은 더욱 맑아져야 하고 깨끗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민주국가에서의 지도자인 배(舟)고 맑고 깨끗해질 수 있다. 올바른 선택을 위해 감정이나 확증편향을 버리고 이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순자가 말한 君舟庶水(군주서수)를 생각하며 4.10 총선에서의 국민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수가재주 역가복주(水可載舟 亦可覆舟)
물은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민의를 중시해야 한다.
물이 귀한 것은 모두 안다. 우리 몸의 75%가 물이 차지하고, 지구의 4분의 3이 바다와 하천 등 물로 덮여 있다. 이처럼 중요한 물을 노자(老子)는 일찍이 최고의 선이라고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는 일이 없고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만 흐르니 당연하다.
이러한 물이 성이 나면 무섭다. '물 난 뒤끝은 없어도 불탄 끝은 있다'는 말대로 흐름을 잘못 다스리면 남아나지 못한다. 예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단골로 경계의 말이 되었던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水可載舟) 또한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亦可覆舟)는 것도 부드럽기만 한 물의 무서움을 말한다.
이 말이 워낙 유명하고 여러 곳에 실려 인용되면서 유사하게, 水則載舟 水則覆舟(수즉재주 수즉복주), 水能載舟 亦能覆舟(수능재주 역능복주)에서 간단히 줄여 載舟覆舟(재주복주)라고도 한다. 임금은 배, 백성은 물이라며 군주민수(君舟民水), 군주인수(君舟人水)라 해도 같다.
먼저 유가철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순황(荀況)의 '순자(荀子)'에 전하는 말부터 보자. 왕제(王制), 애공(哀公)편에 똑같이 나온다. 백성들이 편안해야 군주의 지위도 안정된다면서 말한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군자주야 서인자수야),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전복시키기도 한다(水則載舟 水則覆舟 수즉재주 수즉복주)."
공자(孔子)와 제자들의 일화를 엮은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역시 군주와 백성을 배와 물에 비유하면서 "물은 배를 띄우는 것이지만, 또한 엎어버리기도 한다(水所以載舟 亦所以覆舟 수소이재주 역소이복주)"라 했다.
이 내용을 인용하여 후한(後漢)의 장군 황보규(皇甫規)는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외척 양기(梁冀)에 '대책(對策)'이란 글을 올렸다. "군주는 배고 백성은 물이며 신하는 승객이고 장군 형제는 노를 젓는 사람(群臣乘舟者也 將軍兄弟操楫者也 군신승주자야 장군형제조즙자야)" 일 뿐이니 양기 장군도 거드름 피운다면 거센 물결에 빠진다고 했다. 하지만 양기는 간언을 듣지 않아 죽음을 자초했다. 후한서(後漢書)에 실려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하로 손꼽히는 당(唐)의 위징(魏徵)이 당태종(唐太宗)에게 '정관(貞觀)의 치(治)'로 역사에 남게 직언한 내용도 이 말이라 더 유명해졌다. 본래는 백성들의 뜻에 의해 나라가 흥하기도 하고 몰락하기도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다 어떤 일에 이로운 것이라도 때로는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비유도 된다.
백성을 휘두르던 전제군주가 드문 오늘날엔 선거에 이긴 정당이 권한에 취해 실정을 거듭하면 바로 응징하는 민의의 무서움에 더 많이 인용된다. 유권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정권이라 여야가 자주 바뀌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가는 모름지기 민심의 기반 위에 서야
논어 '향당편'에 매우 의미가 있는 구절이 있다. "마굿간에 불이 났다. 공자가 조정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알고) 사람이 다쳤느냐고 물으시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廐樊, 子退朝, 曰: 傷人乎? 不問馬)."
당시에 마부는 모두 일반적으로 가노였다. 노예는 증여, 매매가 가능하고, 때리거나 심지어 죽여도 되는 존재였기에 그 몸값이 말 한 필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공자는 사람에 대해서 묻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이는 그가 인도주의자였음을 알려준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흥미롭게 여긴 것은 당연하다.
공자는 분명 박애정신을 가진 사상가였다. 공자사상은 인(仁)을 핵심으로 한다. 제자 번지가 인이 무엇이냐고 물어왔을 때, 그는 단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애인(愛人/ 안연편)' 두 글자 만으로 답변했다.
공자는 군자는 높은 수준의 도덕 수양을 갖춰야 함을 되풀이 강조한다. 도덕 수양의 목적은 비단 자신을 깨끗이 하는 것 만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목적은 "자기를 닦아 남을 편안하게 하고(修己以安人), 자기를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修己以安百姓/ 헌문편)"이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자제들은 집에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하여야 한다. 행동과 말은 신중하게 하며 믿음이 있어야 한다. 널리 사람을 아끼며 어진 이를 가까이 한다. 그렇게 하고 남은 힘이 있다면 글(文)을 배운다(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학이편)."
공자가 제자들에게 준 가르침의 하나가 '범애중(汎愛衆)'이다. 붕우독자들은 반드시 '중(衆)'자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춘추시대는 계급사회로서 크게 귀족, 평민, 노예의 3대 계급이 있었다. 무리라는 뜻의 중(衆)은 이 등급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노예도 또한 衆에 속한다.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학자들이 늘 인용하는 구절이 '옹야편'에 있다. 자공이 여쭈었다. "널리 백성에게 베풀며 능히 무리를 구제할 수 있으면 어떻습니까? 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요?"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어찌 인일 뿐이겠느냐? 반드시 성(聖)일 것이다. 요순도 오히려 어렵다고 여기셨다(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여기에서 민(民)은 대체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평민을 가리키며, 중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리키는 범위가 더 넓다. 백성에게 베풀고 무리를 구제하는 일(施民濟衆)은 덕(德)이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지위나 권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인(仁)만으로는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반드시 덕이 있으면서 또한 지위와 권력이 있는 성인이라야 비로소 이룰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요임금이나 순임금도 또한 역부족을 느끼고, 혹은 그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이다. 시민제중(施民濟衆)은 자공이 제기한 가상의 명제였지만, 공자는 그것을 세상에서 이루기 어려운 최고의 성취로 간주하였다.
이를 살펴볼 때, 공자 정치사상 가운데 매우 중요한 내용의 제1항이 바로 '애인(愛人)'이다. "천승의 나라를 이끌 때는 맡은 바 소임을 소중히 여기고, 백성들이 믿을 수 있게 하라. 물자를 절약하고 사람을 아껴야 한다. 사람들을 동원할 때는 때를 가려 해야 한다(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학이편)."
아주 짧은 이 구절은 지위와 권한을 지닌 임금이나 정치권력자라면 반드시 주의를 기울이고 또 실행해야 할 몇 가지를 강론하고 있다. 그 가운데 '愛人'의 가르침은 임금과 정치권력자가 실행하는 정치의 품질일 뿐 아니라, 그 정책은 마땅히 백성에게 베풀고 대중을 구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임금과 백성의 관계에 관해 공자는 특히 뛰어난 논설을 펼친다. 순자 애공편에 보면, 노애공이 공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대해 가르침을 청할 때 공자는 많은 것을 이야기했는데, 그 중에 두 개의 명언이 있다. "또한 저 구(丘)가 듣기를,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라고 합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뒤엎기도 합니다. 임금이 이를 위태롭게 여긴다면, 장차 위험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且丘聞之: 君者, 舟也. 庶人者, 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君以此思危, 則危將焉而不至矣)."
이 말은 훗날 일대의 영주인 당태종이 좌우명으로 삼을만큼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겼다.
백성이 군주라는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엎기도 한다는 사상이 공자의 이 말에서 연유한 것인지 여부는 필자가 고증할 방법은 없다. 다만 이는 공자가 애초부터 가진 민본사상으로서, 국가는 모름지기 민심의 기반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음은 '안연편'에 실려 있는 공자와 자공의 대화이다.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子貢問政)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양식이 풍족하고, 군대가 튼튼하며, 백성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자공이 묻기를, "부득이 버려야 하는 것이 있다면 세 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사(軍事)이다(曰: 去兵)." 자공이 묻기를, "부득이 또 버려야 한다면 나머지 둘 중에 무엇입니까(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경제이다. 예로부터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있으나, 나라는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공자가 자공에게 말한 것은, 국가나 정치 지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세가지 일은, 백성을 잘 먹이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비를 잘 갖추고, 민중을 보호하여 정부가 백성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다. 세 가지 중에 근본 중의 근본은 백성들의 신임이다. 비록 가난하고 약해도 백성들의 믿음을 얻고 있다면 하나의 나라로 설 수 있다.
백성의 신뢰는 위가 아래를 아끼지 않고, 아래가 위를 믿지 않으면 당연히 생기지 않는다. "지도자는 관대함으로써 무리를 얻는다(寬則得衆/ 양화편)는 말처럼, 정치지도자가 민중을 아끼고 보호해야 민중도 비로소 정부를 옹호하고 신임하는 것이다.
애민(愛民)은 반드시 구체적인 실행력을 갖춰야 한다. 공자는 다음 몇 가지를 중요하게 이야기했다.
첫째는, 백성을 돌봄에 은혜롭게 하는 것이다(養民也惠/ 공야장편). 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실제적인 이익을 바라는 것처럼, 빈곤을 구제하는 일을 포함해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둘째는, 백성을 부림에 의(義)로써 한다(使民也義/ 공야장편), 백성을 부림에 때에 맞게 한다(使民以時/ 학이 편)는 것이다. 백성을 노역에 이용하고 동원할 때는 도리에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의 이야기로 하면 정의롭고 공평하고 합리적인 원칙에 따라 백성을 부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밖에 '때에 맞게'라는 것은,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범위에서 백성의 노동력을 이용해야지 무절제하게 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말이다.
셋째는, 백성을 가르치는 일이다(敎民/ 자로편). 민중은 먼저 먹고 살게 해줘야 한다(富之). 그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나아가 잘 살게 이끌어 준 다음에 (사람과 국가사회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敎之). 백성들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도덕, 문화, 기술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유사시 전쟁에 대한 대비를 갖추도록 하는 것도 포함된다. "가르치지 않고 백성을 싸움터로 내모는 것은 그들을 버리는 것이다(以不敎民戰, 是謂棄之/ 자로 편)."
위징(魏徵), 군주를 편안하게 백성을 행복하게 하다!
양신(良臣)은 부귀와 명성을 누리면서도 군주의 명성을 빛내고, 충신(忠臣)은 죄를 얻어 이름만 남기고 죽는다.
의(義)란 무엇인가? 의는 천금과 같은 것이다.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한다(言必信行必果). 인격의 수양에 있어서 의 또는 의기(義氣)를 중시하는 것은 하나의 미덕임이 틀림없다. 누가 뭐라 해도 신의를 지키고 정의를 수호하는 군자가 무상함을 반복하며 이익만을 추구하는 소인배 보다,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에도 대의(大義)와 소의(小義)가 있어서 모든 일을 소의에 맞춰 추진한다면 권력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게 되고 대의를 위해 개인적인 소의를 희생할 줄 모르게 된다. 때문에, 맹자는 맹목적으로 의를 중시하는 행태에 대해 "말에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행동에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言不必信 行不必果)"라고 말했다.
물론 맹자는 사람들에게 억지 궤변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다. 그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이른바 믿음과 결과를 포기할 수도 있음을 말한 것이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칙을 지키되 구체적인 상황 분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전통사회에서는 "훌륭한 짐승은 나무를 택해서 보금자리를 짓고 훌륭한 신하는 군주를 택해 섬긴다(良禽擇木而栖 良臣擇主而事)"라는 말이 선비들이 군주를 택하는 가장 보편적인 원칙이 되어왔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았지만, 그 대표적인 인물로 당나라의 명신이었던 위징만 한 인물이 없었다.
위징이 태어난 북주 정제(靜帝) 대상(大象) 2년(580)은 천하가 대란에 처해 있던 시기였다. 위징은 서향세가 출신이었고 그의 부친은 박학다식한 인물로서 수(隋) 왕조에서 지방관을 지낸 바 있지만, 부친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가족은 어려서부터 매우 빈궁한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위징은 가슴속에 언젠가 큰일을 이루고 말겠다는 웅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독서에 힘쓰고 학문과 정치적 재능의 기초를 닦았다.
수양제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날이 계속되자 각지에서 영웅호걸들이 분분히 기병하여 수 왕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위징은 먼저 원보장(元寶藏)의 기의군에 참여했으나 대세의 흐름을 알 수 없어 출가함으로써 일시적인 난국을 피했다. 나중에 위징의 사람됨을 잘 아는 또 다른 기의군의 수령인 이밀(李密)이 그를, 막하로 불러들여 군중의 문서를 관장하게 했다. 이때 그의 나이 이미 38세였다.
이밀의 군중에서 위징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아 아무런 발언권도 없었다. 당시 이밀의 와강군(瓦岡軍)은 세력이 막강하여 수 왕조의 주요 양곡 창고인 하남의 낙구창과 화락창, 여양창 등을 점령한 후 창고를 개방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함으로써 기의군의 전성시대를 맞았다. 이때 관군의 대장 왕세충(王世充)이 낙양을 지키면서 기의군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위징은 기의군의 부족한 점을 냉정하게 파악하여 간언을 올렸다. "기의군이 승리를 계속하고 있긴 하지만 잃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군대를 운영하는 비용도 넉넉지 않고 비축된 물자도 한계가 있지요.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무모하게 공격하는 것보다 적군의 군량이 떨어져 철수할 때쯤 추격하여 무찌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밀은 속전속결을 주장하며 대규모 공격에 나섰다가 왕세충의 화공에 참패하여 돌아왔다. 이 전투로 와강군의 전력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추격을 받던 이밀의 패잔 병력은 이연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그 대우에 불만을 품고 다시 낙양으로 돌아가 군사를 모아 재차 기병하여 이연에 대항했지만 얼마 후 대패하여 주살 당하고 말았다.
위징은 이연의 이당(李唐) 정권에 희망이 있다고 판단하고 이연을 찾아가 이밀의 군대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다. 당 왕조의 신하가 된 위징은 나중에 이연의 동의를 얻어 군주의 예를 갖춰 이밀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주고 '당고형국공이밀묘지명(唐故形國公李密墓誌銘)'이란 제문을 지어 그를 해하에서 패한 항우에 비유하며 그의 공적과 인품을 서술했다. 문책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에 섬기던 주인을 애도하는 그의 충심에 사람들이 모두 칭송했고 그가 이밀을 배반하고 이연에게 투항한 것이 아님을 인정했다.
나중에 위징은 기의군의 수령이었던 두건덕(竇建德)의 권유와 협박에 못 이겨 1년 반 동안 그의 군중에 있다가 얼마 후 두건덕과 왕세충이 전부 이세민에게 패하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시 이연에게 귀의했다.
농민군의 대오에 들어간 것이 비록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해도 또 당 왕조에 중용되기는 어려웠다. 태자 이건성은 위징이 유능하고 인품을 갖춘 인물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다 도서와 경적을 관리하는 세마(洗馬)라는 작은 관직을 주었다.
이 시기에 위징에겐 약간의 명성이 있긴 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단지 이건성에게 병력을 이끌고 나가 유흑달(劉黑闥)을 공격함으로써 군공을 세우고 몰래 호걸들과 교우하도록 건의한 것이 전부였다. 태자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당 정권이 천하의 대세를 장악한 후 이세민은 ‘현무문 정변’을 일으켜 형인 태자 이건성과 동생인 제왕 이원길을 죽이고 자신이 스스로 태자가 되었다.
이세민도 위징이 이건성의 심복으로서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불러놓고 말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리 형제 사이에 끼어들었던 것인가?"
워낙 교언영색(巧言令色- 남의 환심을 사려고 번지르르하게 발라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낯빛)을 모르는 위징은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사람에겐 누구나 주인이 있기 마련이지요. 만일 태자께서 제말을 들었다면 오늘 같은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이건성에게 충성을 다한 것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입니까? 관중도 제환공의 허리띠를 활로 쏘아 맞힌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세민은 위장의 솔직하고 일리 있는 대답을 듣고는 그의 대담한 기백에 감복하여 그를 즉시 사면하고 그를 주부(主簿)로 봉했다. 이로써 위징은 주인 없는 생애를 마감했다.
이세민은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위징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했다. 위징의 명성은 신하의 의견에 겸허하고 소박한 태도로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태종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또 당 태종의 치적은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 직언을 서슴지 않는 신하 위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하는 직언을 서슴지 않고 임금은 그 직언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군신 관계는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한 장을 장식한다.
간의대부는 전문적으로 황제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직책으로서 아무런 권한도 없으면서 황제의 신임에 따라 막강한 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위였다. 당 태종이 위징을 간의대부로 임명한 것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의 됨됨이 자체를 존중하고 신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후 위징은 상서승(尙書丞)으로 승급하여 태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수행하면서 수시로 간언을 올렸다.
국가의 주요 통치전략으로 위징은 조세와 부역을 가볍게 하는 등 백성들의 삶을 보살필 것을 주장했다. 그는 수 왕조가 멸망한 원인을 세금 부담이 너무 크고 부역이 너무 많아 백성의 삶이 피폐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조세와 부역의 부담이 월등히 가벼워졌고 이는 태종의 정관치세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태종이 막 즉위하고 천하가 간신히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온갖 병폐가 여전히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어느 날 태종이 위징에게 물었다. "현명한 군주가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백 년의 세월은 필요하지 않겠소?"
위징은 태종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성명(聖明)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소리가 금방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1년이면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고 3년이면 너무 늦습니다. 그런데 백 년을 기다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상서우복야 봉덕이(封德彛)가 나서서 말을 받았다. "예부터 인심은 강물과 같아서 세월이 지나면 간사해지기 마련입니다. 진(秦)이 가혹한 형벌을 쓰고 한(漢)이 패도를 이용했던 것은 인심을 교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위징은 지금 서생의 기질로 나라를 다스리려 하는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위징도 지지 않았다. "대란이 휩쓸고 간 다음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오래 굶주린 사람이 먹을 것을 찾는 것처럼 아주 빨리 이루어집니다. 만일 인심이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면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오래전에 귀신이 되었을 텐데, 어떻게 치국을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제도(帝道)를 행하면 황제가 되고 왕도를 행하면 왕이 되는 것이지요. 대업은 사람의 행하는 바에 달린 것이지 백성들을 교화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태종이 위징의 의견을 받아들여 적극적인 조처를 한 결과 3년도 채 안 돼서 대당제국은 이른바 정관치세의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다.
법의 집행에 있어서 위징은 정확하면서도 관대한 처리를 주장했다. 그는 진나라 때와 같은 가혹한 형벌을 반대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법률 적용을 강조했다.
한번은 태종이 노조상(盧祖尙)을 교주자사로 임명했는데, 노조상은 처음에는 이를 수락했다가 얼마 후 병을 핑계로 부임을 거부했다. 태종이 직접 만나 다시 권유해봤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종은 몹시 화가 나서 그를 당장 주살해버렸다. 나중에 태종은 자신의 처사가 너무, 지나쳤다고 후회하며 모든 일을 법률에 따라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위징이 나서서 북제의 황제였던 고양(高洋)이 매사에 신중하게 자신과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처신했던 사례를 들어 태종을 비판했고 태종은 그의 충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종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부하였던 복주자사 방상수(龐相壽)는 태종의 위세를 믿고 부패 행위를 저질러 고소를 당했는데, 추궁 끝에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나 관직을 박탈당했다. 방상수가 태종에게 선처를 호소하자 태종은 옛정을 생각하여 그에게 비단 백 필을 보내고 다시는 부패 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 자사의 관직을 유지하게 했다.
위징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태종에게 말했다. "방상수는 엄연히 죄를 범했는데도 폐하께서는 오히려 그에게 후한 상을 내리시고 관직을 보전해주셨습니다. 이는 사사로운 정리로 법률을 깨뜨리는 행위입니다. 폐하께서 진왕으로 계실 당시의 부하들이 적지 않는데 이들이 모두 방상수처럼,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을 내릴 때는 소원한 사람들을 잊지 말고 징벌을 내릴 때는 측근과 귀족들에 대한 정리를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상벌은 공정과 인정(仁政)을 원칙으로 해야만 사람들을 설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위징의 강경한 주장에 태종은 자신의 처사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징은 또 백성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선 조령모개(朝令暮改- 아침에 명령을 내리고 저녁에 다시 고친다는 뜻으로 ’법령이나 명령이 자주 뒤바뀜‘을 이르는 말)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당 왕조의 정책은 애당초 18세 이상의 남자만 병역에 징집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한번은 태종이 변경을 수비할 병력을 징집하기 위해 16세 이상의 남자는 전부 징병에 응하라는 명령을 내리려 하자 위징이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황제의 명령은 조정의 대신들이 만장일치로 서명을 해야만 효력을 발휘했다. 위징은 태종의 방침이 당조 이전의 법령과 어긋나며 백성들을 혹사하는 조치라 판단하고 여러 차례 서명을 거부했다. 태종이 위징에게 버럭 화를 내며 어째서 황제의 명에 서명을 거부하느냐고 다그쳤다.
위징은 차분한 어투로 대답했다. "연못을 말려 물고기를 잡고 수풀을 태워 사냥하는 것은 닭을 잡아 계란을 꺼내는 것과 같습니다. 병력은 수를 늘리는 것보다 정예병으로 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인데 어째서 나이도 안 찬 사람들을 징병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결국, 태종은 위징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울러 자신이 너무 쉽게 감정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신들에게 특별히 자신의 한쪽으로 치우친 결정을 바로잡고 조정의 제도를 올바로 이끌어 달라고 당부했다.
태종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제도를 제정하여 간관(諫官)과 사관(史官)들에게 정사를 논하는 회의에 참여하게 했다. 이러한 제도는 간관과 사관들에게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적시에 알아 간언을 올림으로써 재상이나 다른 대신들이 정무를 소홀히 다루지 못하게 하는 감찰 기능의 효과를 거두었다.
또 황제건 대신이건 간에 과실이나 부당한 행위가 있을 때 간관이 회의 석상에서 이를 지적하고 이를 변론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또 사관은 황제와 대신들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여 일차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기거주(起居注-황제의 생활을 자세히 기록한 글)를 작성함으로써 기본적인 감독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위징은 이처럼 관대하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간관의 직책을 수행할 수 있었고 그가 올리는 간언의 내용은 치국과 군정에서부터 황제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태종이 ’정관의 치세‘를 실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인재 활용에 있어서 위징은 시대 상황에 따라 인덕과 능력을 취사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징이 태종에게 말했다.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을 때는 인사의 기준에 있어서 능력을 중시하고 덕행과 행실에 대한 고려를 줄여야 하지만 천하가 완전히 평정된 이후에는 재덕을 겸비한 인재들을 중용해야 합니다."
위징이 제시한 인사의 원칙에 따라 태종은 안으로는 황실 인척의 천거를 기피 하지 않았고 밖으로는 원수를 중용하는 일도 꺼리지 않았다.
한번은 태종이 먼저 위징에게 말했다. "관리를 임용할 때는 경솔하게 함부로 발탁해서는 안 될 것이오. 군자를 중용하면 많은, 군자들이 따라오겠지만 소인배를 중용하면 소인배들이 마구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오."
개인의 향락에서도 위징은 태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감독하면서 간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번은 태종이 남산으로 사냥을 나가려고 수레와 말을 준비했다가 이를 취소한 일이 있었다.
위징이 그 이유를 묻자 태종이 말했다. "원래는 사냥을 나가고 싶었지만, 그대에게 야단맞을 일이 두려워 포기했소."
정관 4년(630), 태종이 낙양궁을 축조하려 하자 중묘현의 현승인 황보덕참(皇甫德參)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언사가 매우 격렬했다. 태종이 이에 격분하여 황보덕참을 처벌하려 하자 위징이 그를 변호하면서 자고로 상소문의 언사가 격렬하지 않으면 군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설득하여 태종의 분노를 가라앉게 했다.
그 후 하남과 섬서 일대에 폭우가 내려 큰 수해가 발생했는데도 태종은 낙양에 정산궁을 수축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위징이 한걸음에 달려와 태종에게 간언했다. "수나라가 그렇게 빨리 망했던 것은 수양제가 정자와 누대를 축조하는 등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의 부역을 가중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궁전과 누대만 해도 다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수 왕조의 멸망을 생각한다면 이 누대와 궁전들을 부숴버려도 시원치 않을 것이고, 아까워서 부수지 못한다면 더 짓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천하를 얻을 때의 어려움을 잊고 계속 궁전을 지어 화려함과 향락을 추구한다면 수나라와 똑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태종은 위징의 간언을 받아들여 궁전 수축을 중지하고 자재를 전부 수해 지역으로 보내 백성들의 집을 짓는 데 사용하게 했다.
정관 12년(638), 공경대신들이 태종에게 태산에 올라가 봉선대례(封禪大禮)를 거행할 것을 권했으나 위징 한 사람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이에 반대했다.
태종이 위징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을 한번 말해보시오. 혹시 내 공로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오? 아니면 내 덕행이 모자란단 말이오? 그것도 아니면 나라가 태평하지 못하고 변방의 이민족들이 대당제국을 우러르지 않는다는 것이오? 나라가 두루 태평하고 온갖 좋은 징조가 가득하며 농사도 해마다 풍작을 이루는데 봉선대례를 행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오?"
위징이 말했다. "페하의 공로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백성들은 아직 폐하의 은덕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폐하의 덕행이 아무리 순후하다 해도 폐하의 어진 정치가 아직 전국에 두루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국이 안정되긴 했지만, 사업을 흥성시키기 위한 자원은 부족한 상태입니다. 변방의 이민족들이 폐하의 높으신 뜻을 우러르고 있긴 하지만 조정은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징조가 많이 나타나긴 하지만 법은 여전히 엄격하고, 몇 년째 계속 풍작을 거두고 있긴 하지만 양곡창고는 아직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직은 봉선대례를 거행할 수 없는 이유이지요. 제가 사람을 비유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10년째 중병으로 누워 있다가 간신히 치료되어 피골이 상접해 있는 사람에게 쌀 한 가마니를 들고 매일 백 리를 걸으라고 하면 그는 금세 쓰러질 것이 분명합니다. 수나라의 대란이 10년간이나 지속하다가 폐하께서 전국의 혼란을 바로잡으신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라 국고가 아직 충실하지 못한데 벌써 대업이 다 이루어졌다고 만천하에 알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친히 태산으로 행차하신다면 각국의 사절들이 모두 서둘러 먼길을 달려와야 합니다. 지금 서쪽의 이수와 낙수 유역에서 동쪽의 태산에 이르는 길에는 산과 강은 물론이요, 늪지대와 황무지가 분포해 있고 도로 사정이 열악하여 통행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이민족 사절들을 대거 불러들여 우리나라의 허약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십니까? 그들에게 많은 재물을 상으로 내린다 해도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어려울 것이고, 2년치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준다 해도 백성들의 노고를 덜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가는 길에 일기가 순조롭지 못해 가뭄이나 수재를 만나게 된다면 이 일에 동원된 노역자들 사이에 불만과 원성이 자자할 것이라 그때 가서 후회한다 해도 손해를 만회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찌 이것이 소신 혼자만 폐하의 봉선대례을 막으려고 획책하는 것이겠습니까? 천하의 만백성이 모두 폐하의 은덕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태종은 위징의 간곡한 설득에 결국, 봉선대례를 취소했다.
또 한번은 장안을 떠나 낙양의 현인궁에 갔을 때 일이다. 태종은 그곳에서 바친 음식과 물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몹시 분개했다. 위징이 망설이지 않고 직간했다. "수양제는 한없이 향락을 추구하다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바치는 물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시면 아랫사람들은 앞으로 폐하를 만족시키기 위해 봉공(奉供)에 최선을 다하려 들것입니다. 그런데 봉공하는 물건에는 한계가 있지만, 상인들의 사치 욕은 무한한 법이지요. 이러다가는 수나라의 치욕을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태종은 위징의 지적을 두려워하여 검약한 생활에 만족하게 되었다.
위징은 태종의 인격 수양문제도 매우 중시했다. 한번은 위징이 아주 겁 없는 직언을 올렸다. "윗사람들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복종하지 않는 법입니다."
위징은 순자(荀子)의 말을 인용하면서 간언을 계속했다.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입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하지요."
위징의 말에 크게, 놀란 태종은 이를 마음에 새기는 동시에 태자에게도 이를 전하면서 절대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한번은 태종이 위징에게 어떻게 해야 명군이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위징은 수조 때의 대신이었던 우세기(虞世基)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세기는 수양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듣기 좋은 말만 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희소식만 전하고 좋지 않은 소식은 일체, 전하지 않았다. 아울러 위징은 "두루 폭넓게 들으면 밝아지고 편벽되게 들으면 어두워진다(兼聽則明 偏聽則暗)"라는 유명한 결론으로 태종의 물음에 답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충신(忠臣)과 양신(良臣)에 관한 위장의 변론이다. 한번은 태종이 다른 대신들의 참언을 그대로 믿고 위징이 자신의 친척들을 싸잡아 비난했다고 나무랐다가 위징의 해명을 듣고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적이 있었다. 위징은 이런 기회를 노치지 않고 태종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저를 충신이 되게 하지 마시고 양신이 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되물었다. "대체 충신과 양신이 어떻게 다르다는 게요?"
위징이 말했다. "차이가 매우, 많지요. 양신은 스스로 훌륭한 명성을 누릴 뿐 아니라 군주에게도 훌륭한 위세와 명망을 가져다주어 자손만대에 이어지게 하는 데 비해 충신은 결국, 미움을 받아 주살 당하기, 십상이고 군주에게는 어리석은 임금이라는 악명을 남겨주며 나라를 망치지요. 결국, 충신이 얻는 것은 공허한 이름뿐입니다."
위징의 말에 크게 감동한 태종은 연신 그를 칭찬하며 비단 5백 필을 상으로 내렸다.
물론 태종도 인간이라 위징의 간언을 항상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몹시 분개했고 심지어 그를 주살하려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다.
한번은 태종이 매 한 마리를 헌상받고 매우 좋아하면서 이를 팔 위에 올려놓고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멀리서 위징이 다가오는 것을 본 태종은 몹시 긴장하며 위징이 이를 볼까 봐 서둘러 매를 품속에 감췄다. 사실 그 모습을 이미 다 보고 있던 위징은 태종이 하찮은 노리개에 마음을 빼앗기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일부러 정무를 보고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고 결국 매는 태종의 품속에서 질식사하고 말았다.
위징이 물러가자 태종은 재빨리 품속에서 매를 꺼냈지만 이미 죽은 뒤였다. 태종은 이 일 때문에 몹시 기분이 상했지만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이런 위징이 늙어서 병으로 눕게 되자 태종은 거듭 사자를 보내 병세를 묻고 약을 보내주었으며 태자를 대동하여 직접 문병을 하러 가기도 했다. 위징이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조정의 9품 이상 관리들에게 전부 조문하도록 지시하고 친히 비문을 써서 비석에 새기기도 했다.
그것으로도 위징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없었던 태종은 좌우 대신들에게 유명한 말을 한마디 던졌다. "사람들은 의관을 바로 보기 위해 구리로 거울을 만들지만, 옛것을 거울로 삼으면 왕조의 교체를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정사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이제 위징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짐에겐 거울이 하나 없어진 셈이로구나!"
사람들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위징은 절대로 충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천고에 길이 남을 훌륭한 양신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개인의 명리를 위해 황제와 조정의 비위를 맞추러 애를 쓰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위로는 군주를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한 가지 원칙밖에 없었다. 그의 충성은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작은 충성'이 아니라 큰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큰 충성'이었다.
군주민수(君舟民水)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군주민수(君舟民水)는 군주와 신하의 긴밀한 협력과 상호 존중을 의미하는 말이다.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나오는 글이다.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당나라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태동 이세민의 정치 철학을 기본으로 한 정치 토론집 성격의 책으로 당 태종은 백성의 관점에서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군도편(君道篇)에 나오는 말이다. "군주의 도리는 먼저 백성을 생각하는 것이오. 만일 백성들의 이익을 손상시켜 가면서 자기의 욕심을 채운다면, 마치 자기 넓적다리를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아서 배는 부를지언정 곧 죽게 될 것이오. 또 만일 군주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한마디라도 한다면 백성들은 그 때문에 사분오열할 것이고 망을 바꾸어 원한을 품고 모반하는 이가 생길 것이오. 나는 항상 이러한 이치를 생각하고 감히 나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소."
이러한 생각이 바탕이 있었기에 태종은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또한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라는 위징의 말을 늘 마음속에 새기면서 다스림의 지침으로 삼고자 했다. 여기서 '人'는 '民' 자와 같은 말로 당 태종의 이름이 '세민(世民)'이라 피휘하여 대체한 것이다.
당 태종이 다스린 23년여 기간을 '정관의 다스림(貞觀之治’'이라고 하여 그 치적을 높이 평가하는 데는 열린 정치라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 君(임금 군)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尹(윤, 군)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尹(윤, 군)은 손에 무엇인가를 갖는 모양으로 천하를 다스리다는 뜻과, 口(구)는 입으로 말, 기도하다의 뜻의 합(合)으로, 君(군)은 하늘에 기도하여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君자는 '임금'이나 '영주', '군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君자는 尹(다스릴 윤)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尹자는 권력을 상징하던 지휘봉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다스리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직책이 높은 사람을 뜻하는 尹자에 口자가 결합한 君자는 군주가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君(군)은 (1)친구나 손아랫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에 그 성이나 이름 아래에 붙여 쓰는 말 (2)조선시대, 고려 때, 서자(庶子) 출신인 왕자나 가까운 종친이나 공로가 있는 산하(傘下)에게 주던 작위(爵位). 고려 때는 종1품(從一品), 조선시대 때는 정1품(正一品)에서 종2품(從二品)까지였으며, 왕위(王位)에 있다가도 쫓겨나게 되면 군으로 강칭(降稱)되었음. 이를테면, 연산군(燕山君), 광해군(光海君) 등이다. 이와같은 뜻으로 ①임금, 영주(領主) ②남편(男便) ③부모(父母) ④아내 ⑤군자(君子) ⑥어진 이, 현자(賢者) ⑦조상(祖上)의 경칭(敬稱) ⑧그대, 자네 ⑨봉작(封爵) ⑩군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백성 민(民), 신하 신(臣)이다. 용례로는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을 군주(君主),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를 군국(君國), 임금의 명령을 군령(君令), 임금의 자리를 군위(君位),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군자(君子), 처방에 가장 주되는 약을 군제(君劑), 임금의 총애를 군총(君寵), 임금의 덕을 군덕(君德), 임금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를 군도(君道),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군림(君臨), 임금과 신하를 군신(君臣),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아버지를 이르는 말을 가군(家君), 엄하게 길러 주는 어버이라는 뜻으로 남에게 자기의 아버지를 일컫는 말을 엄군(嚴君), 남의 남편의 높임말을 부군(夫君), 남의 부인의 높임말을 내군(內君), 거룩한 임금을 성군(聖君), 어진 임금을 인군(仁君), 재상을 달리 일컫는 말을 상군(相君), 임금께 충성을 다함을 충군(忠君), 포악한 군주를 폭군(暴君), 임금의 신임을 얻게 됨을 득군(得君), 덕행을 베푸는 어진 임금을 현군(賢君),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첫째는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둘째는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자삼락(君子三樂), 임금과 신하와 물과 물고기란 뜻으로 떨어질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일컫는 말을 군신수어(君臣水魚), 임금은 그 신하의 벼리가 되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똑같다는 말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큰 의리를 일컫는 말을 군신대의(君臣大義),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는 말을 군자무본(君子務本), 군자는 큰길을 택해서 간다는 뜻으로 군자는 숨어서 일을 도모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옳고 바르게 행동한다는 말을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군자는 한 가지 재능에만 얽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하다는 말을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표범처럼 변한다는 뜻으로 가을에 새로 나는 표범의 털이 아름답듯이 군자는 허물을 고쳐 올바로 행함이 아주 빠르고 뚜렷하며 선으로 옮겨가는 행위가 빛난다는 군자표변(君子豹變),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아서 백성은 모두 그 풍화를 입는다는 뜻으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을 군자지덕풍(君子之德風),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욕신사(君辱臣死) 등에 쓰인다.
▶️ 舟(배 주)는 ❶상형문자로 통나무 배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한자의 부수로는 배와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舟자는 '배'나 '선박'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舟자는 조그만 배를 그린 것이다. 강줄기가 많은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수로가 발달했었다. 강에는 여러 종류의 뗏목이 떠다녔지만, 그중에서도 舟자는 1~2명만이 탑승할 수 있었던 조그만 배를 그린 것이다. 이 배는 돛 없이 노를 저어 움직이던 것이었기 때문에 舟자의 상단에 있는 점은 노가 생략된 것이다. 이처럼 舟자는 배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배의 종류'나 '옮기다', '움직이다'와 같은 뜻을 전달하게 된다. 참고로 舟자와 丹(붉을 단)자는 매우 비슷하게 그려져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舟(주)는 ①배, 선박(船舶) ②반(제기인 준을 받쳐놓는 그릇) ③성(姓)의 하나 ④몸에 띠다 ⑤배 타고 건너다 ⑥싣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배 강(舡), 배 방(舫), 배 항(航), 배 박(舶), 배 선(船), 배 함(艦)이다. 용례로는 서로 배를 타고 싸우는 전쟁을 주전(舟戰), 배를 타고 감을 주행(舟行), 배처럼 생긴 모양을 주형(舟形), 배와 수레를 주거(舟車), 뱃놀이를 주유(舟遊), 작은 배를 한 줄로 여러 척 띄워 놓고 그 위에 널판을 건너질러 깐 다리를 주교(舟橋), 배로 통하는 길 선로를 주로(舟路), 배로 화물 등을 나르거나 교통하거나 하는 일을 주운(舟運), 뱃사람을 주인(舟人), 뱃사공을 주자(舟子), 배에 실음을 주재(舟載), 배와 뗏목을 주벌(舟筏), 소형의 배를 주정(舟艇), 네모지게 만든 배나 배를 나란히 맴 또는 나란히 선 배를 방주(方舟), 작은 배를 단주(端舟), 한 척의 배를 단주(單舟), 작은 풀잎이 배처럼 떠 있다는 뜻으로 작은 배를 이르는 말을 개주(芥舟), 조각배를 편주(扁舟), 같은 배 또는 배를 같이 탐을 동주(同舟), 배를 물에 띄움을 범주(泛舟), 외롭게 홀로 떠 있는 배를 고주(孤舟), 가볍고 빠른 배를 경주(輕舟), 배는 물이 없으면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임금은 백성이 없으면 임금 노릇을 할 수 없다는 말을 주비수불행(舟非水不行), 배 속의 적국이라는 뜻으로 군주가 덕을 닦지 않으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이 이해 관계가 같은 사람들이라도 적이 되는 수가 있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주중적국(舟中敵國),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자 뱃전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가 나중에 그 칼을 찾으려 한다는 뜻으로 판단력이 둔하여 융통성이 없고 세상일에 어둡고 어리석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각주구검(刻舟求劍),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한 배에 타고 있다라는 뜻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는 원수라도 협력하게 됨 또는 뜻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게 됨을 이르는 말을 오월동주(吳越同舟), 잡아매지 않은 배라는 뜻으로 정처없이 방랑하는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불계지주(不繫之舟),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싸움터로 나가면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고 결전을 각오함을 이르는 말을 파부침주(破釜沈舟), 조그마한 틈으로 물이 새어들어 배가 가라앉는다는 뜻으로 작은 일을 게을리하면 큰 재앙이 닥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소극침주(小隙沈舟), 배를 삼킬 만한 큰 고기라는 뜻으로 장대한 기상이나 인물을 이르는 말을 탄주지어(呑舟之魚), 달 하나를 세 배에서 본다는 뜻으로 하나의 달을 보는 사람의 경우에 따라 각각 달리 보인다는 뜻에서 道는 같으나 사람마다 견해가 다름을 일컫는 말을 일월삼주(一月三舟), 새털처럼 가벼운 것도 많이 실으면 배가 가라 앉는다는 뜻으로 작은 일도 쌓이고 쌓이면 큰 일이 된다는 말을 적우침주(積羽沈舟), 한 조각의 작은 배를 일컫는 말을 일엽편주(一葉片舟), 뭍에서 배를 민다는 뜻으로 고집으로 무리하게 밀고 나가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추주어륙(推舟於陸) 등에 쓰인다.
▶️ 庶(여러 서, 제거할 자)는 회의문자로 엄 호(广; 집)部와 光(광; 빛)의 합자(合字)로, 집안의 빛이 있는 모양이다. 미개(未開) 시대에 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인 것을 나타내서 많다는 뜻이 되고, 전(轉)하여, 서족 또는 서민의 뜻이다. 奢(사)와 통하여 풍성하다의 뜻에 이어 바란다는 뜻으로도 쓴다. 그래서 庶(서, 자)는 ①여러 ②거의 ③바라건대 ④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⑤서출(庶出: 첩의 자식이나 자손) ⑥벼슬이 없는 사람 ⑦지손(支孫), 지파(支派) ⑧가깝다 ⑨바라다 ⑩많다, 수효(數爻)가 넉넉하다 ⑪살찌다 ⑫천(賤)하다, 비천(卑賤)하다, 그리고 ⓐ제거(除去)하다, 제독(除毒)하다(자)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여러 루(屢), 여러 루(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정실 적(嫡)이다. 용례로는 관직이 없는 평민으로 귀족 등에 대하여 사회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는 보통 사람을 서민(庶民), 첩의 몸에서 난 아들을 서자(庶子), 첩의 몸에서 낳은 딸을 서녀(庶女), 서자와 그 자손을 서얼(庶孼), 첩에서 낳은 자식을 서출(庶出), 특별한 명목이 없는 여러 가지 잡다한 사무 또는 그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서무(庶務), 여러 가지 종류나 갖가지 종류를 서휘(庶彙), 여러 가지 물건을 서물(庶物), 여러 가지의 물품을 서품(庶品), 신하와 서민 또는 많은 신하를 신서(臣庶), 모든 백성을 증서(蒸庶), 수많은 백성을 억서(億庶), 수많은 백성을 범서(凡庶), 살림이 넉넉한 백성을 부서(富庶),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민서(民庶), 여러 가지 정치 상의 폐단을 말끔히 고쳐 새롭게 한다는 말을 서정쇄신(庶政刷新), 어떠한 일도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일하면 안된다는 말을 서기중용(庶幾中庸), 거의 될 듯한 희망을 이르는 말을 서기지망(庶幾之望) 등에 쓰인다.
▶️ 水(물 수)는 ❶상형문자로 氵(수)는 동자(同字)이다.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물을 뜻한다. 본디 물 수(水)部는 시내의 뜻이었다. 부수로 쓸 때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로 쓰는 일이 많다. ❷상형문자로 水자는 '물'이나 '강물', '액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水자는 시냇물 위로 비가 내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水자의 갑골문을 보면 시냇물 주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물'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水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액체나 '헤엄치다', '범람하다'와 같이 물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참고로 水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氵자나 氺자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水(수)는 (1)오행(五行)의 하나. 방위(方位)로는 북쪽, 계절로는 겨울, 빛깔로는 검정을 나타냄 (2)수요일(水曜日)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물 ②강물 ③액체(液體), 물과 관련된 일 ④홍수(洪水), 수재(水災), 큰물(비가 많이 와서 강이나 개천에 갑자기 크게 불은 물) ⑤수성(水星: 태양에 가장 가까운 별) ⑥별자리의 이름 ⑦물을 적시다, 축이다 ⑧물을 긷다, 푸다 ⑨헤엄치다 ⑩물로써 공격하다 ⑪평평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내 천(川), 강 강(江), 물 하(河), 바다 해(海), 시내 계(溪), 바다 명(溟),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메 산(山), 큰 산 악(岳), 뭍 륙/육(陸), 불 화(火),빌 공(空)이다. 용례로는 물 속에서 몸을 뜨게 하고 손발을 놀리며 다니는 짓을 수영(水泳), 축축한 물의 기운을 수분(水分), 물속에 잠김을 수몰(水沒), 물을 보내는 통로를 수로(水路), 물의 겉을 이루는 면을 수면(水面), 홍수로 인한 해를 수해(水害), 물에 의해 발생하는 힘을 수력(水力), 물의 깊이를 수심(水深), 저수지에 설치하여 수량을 조절하는 문을 수문(水門), 물의 양을 수량(水量), 물 속에서 자라는 풀을 수초(水草), 물과 물고기의 사귐이란 뜻으로 임금과 신하 또는 부부 사이처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이르는 말 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친한 사이를 일컫는 말을 수어지교(水魚之交) 또는 수어지친(水魚之親), 물이 모이면 내를 이룬다는 말을 수적성천(水積成川),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으로 작은 노력이라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수적천석(水滴穿石),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뜻으로 미미한 힘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수적석천(水滴石穿), 산과 바다에서 나는 진귀하고 맛있는 것을 이르는 말을 수륙진찬(水陸珍饌), 산과 바다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물을 일컫는 말을 수륙진미(水陸珍味), 물이 맑으면 큰 고기가 없다는 뜻으로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그 몸을 감출 곳이 없어 그곳에는 살지 않음과 같이 사람이 너무 똑똑하거나 엄하면 남이 꺼려하여 가까운 벗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수청무대어(水淸無大魚), 물이 샐 틈이 없음으로 단속이 엄하여 비밀이 새어 나가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수설불통(水泄不通), 깊고 넓은 물에는 큰 고기가 깃듦을 일컫는 말을 수관어대(水寬魚大), 물결이 일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수파불흥(水波不興), 물과 불은 서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서로 원수같이 대함을 일컫는 말을 수화상극(水火相剋), 흐르는 물과 하늘의 뜬구름이라는 뜻으로 과거사가 흔적이 없고 허무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 수류운공(水流雲空), 바다 멀리 수면과 하늘이 서로 맞닿아 그 한계를 지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수천방불(水天髣髴), 물 위에 뜬 기름이란 뜻으로 서로 잘 어울릴 수 없는 사이를 이르는 말을 수상유(水上油), 물은 그릇의 모남과 둥긂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진다는 뜻으로 사람은 상종하는 사람의 선악에 따라 달라지므로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말을 수임방원기(水任方圓器), 물이 깊고 넓으면 고기들이 모여 논다는 뜻으로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히 사람들이 따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수광즉어유(水廣則魚遊), 물이 흐르면 고기가 다닌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나 때가 되면 이루어짐을 일컫는 말을 수도어행(水到魚行), 물이 빠져 밑바닥의 돌이 드러난다는 뜻으로 물가의 겨울 경치를 일컫는 말 또는 나중에 사건의 진상이 명백하게 드러남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수락석출(水落石出), 바다와 육지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이르는 말을 수륙만리(水陸萬里), 물에 비친 달과 거울에 비친 꽃이라는 뜻으로 볼 수는 있어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수월경화(水月鏡花), 바다 멀리 수면과 하늘이 하나로 이어져 그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한 가지로 푸름을 일컫는 말을 수천일벽(水天一碧),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외로운 넋을 일컫는 말을 수중고혼(水中孤魂), 물이 흐르면 자연히 개천을 이룬다는 뜻으로 학문을 열심히 하면 스스로 도를 깨닫게 됨을 이르는 말을 수도거성(水到渠成), 오행에 수기가 왕성한 절기로 곧 겨울을 일컫는 말을 수왕지절(水旺之節), 시문을 짓는 데 재주가 샘솟듯 풍부하여 빨리 이루어 놓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수용산출(水湧山出), 물과 불은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친교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수화불통(水火不通)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