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봄의 아침햇살이 오늘 따라 눈부시다. 버스엔진의 불규칙한 진동이 창문 모서리에 기댄 나의 몸을 계속해
서 미세하게 느껴진다. 마치 버스가 나에게 아직 스스로가 건재하다고 보여주는 것 같아 왠지 모를 편안함이 드는 진동이다. 오
늘도 나는 맨 뒷자리 구석에서 학교까지 가는데 걸리는 꽤 긴 시간을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보낸다.
버스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이 오르고 내린다. 같은 학교, 다른 학교의 학생들이 타고 내리고, 양복의 젊은남자, 후줄근한 평상
복의 중년여성, 페인트가 잔뜩 묻은 옷을 입은 꽤나 늙어보이는 수척한 아저씨, 풋풋한 내음이 여기까지 나는 듯한 신내기 여대
생, 남자, 여자, 젊은이, 늙은이, 아이,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비슷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버스
를 오르고 내린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버스는 사람의 인생에도 비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인생에는, 심지어 나 홀로 살아가는 18
년 인생에도 참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쳐간다. 그들은 나라는 버스를 타자마자 내리기도 하고 탈 만큼 타다 가는 가 하
면 내릴 때에 못내려 허둥지둥 내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버스의 종점까지 주욱 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에 버스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제 갈길을 가며 버스에서 내리다 보면 어느새 버스에는 빈 공기만이 가득하다. 우리
들도 그렇지 않은가. 항상 새로운 사람들이 지나쳐 가고 그들중 함께 하는 이들이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결국 언젠가는 헤어지
기 마련이다. 나이가 먹을 수록 사람 사귀기는 힘들어지고 떠나가는 이들은 늘어만 간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사이클은 심화
되고 결국 우리는 벤치에 홀로 앉아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는 노인들처럼 곁에는 딱히 함께 있어줄 누군가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된다. 설사 그때까지 있다 한들 결국 관속에 누워 있는건 혼자니까 어쩌면 혼자라는 것은 모두의 숙명, 거부
할 수 없는 대자연의 법칙이 아닐까 싶다. 만일 그렇다라면 어쩌면 혼자라는 것에 빨리 익숙지는 것이 우리들에게 있어 좀 더 비
극적이지 않은 노년을 위한 노후대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나는 참으로 준비성바른 인간상이다. 죽기까진 아직도 멀
었건만 이미 혼자라는 것에 익숙하다 못해 삶 그 자체 아닌가. 게다가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존재감까지 갖
추고 있으니 이쯤 되면 혼자가 되지 않는 것이 범죄수준이다.
하지만 남들에 비해 훨씬 빨리 혼자라는 것에 익숙해 진 것은 꽤나 서럽다.
신발장에 와보니 나보다 먼저 온 한재윤이 어두운 표정으로 신발장에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있다. 곧 내가 있다는 걸 의식했는
지 이쪽을 보더니 인사인냥 살짝 손짓을 한다. 나도 똑같이 손짓해준다. 실내화로 갈아 신으면서 한재윤을 옆눈으로 힐끗 보니 마치
초상이라도 난 듯한 표정이다. 그런 표정으로 한재윤은 교실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간다. 나는 그런 한재윤을 뒤에서 따라 가보기
로 한다.
한재윤은 계속해서 비틀비틀 걷는다. 복도를 걷는 내내 한재윤은 그 동안 나름 친하게 지내왔던 것 처럼 보이는 아이들과 마주치
고 인사를 해보지만 그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오기도 전에 핸드폰을 보는 척 눈길을 피하는 아이, 한재윤의 인사에 부자연스럽
게 당황하며 내키지 않는 듯 억지웃음을 지으며 인사하는 아이, 그 중 몇몇은 정말 걱정하는 듯 한재윤의 안부를 물어보기도 하지
만 대게는 탐탁치 않은 반응들이다. 사람들을 마주치면서 한재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간다. 흥, 이 녀석도 인생 헛살았군
그래. 속으로 연민의 비웃음을 지어본다.
떠들고 뛰고 즐김으로써 청춘의 생기를 발산할 수 있는 시간인 쉬는 시간에도 오늘의 한재윤의 주위는 조용하기만 하다. 평소라
면 여러 명이와서 한재윤을 귀찮게 하는 풍경을 여러번 보겠지만 오늘 그저 엎드려 잠을 자는지 뭘 하는 지 모를 한재윤의 주변에
는 그 누구도 오지 않는다. 어쩌다가 이쪽을 보는 녀석도 있지만 곧 신경을 끄고 다른 일에 신경을 옮긴다. 어제의 일을 언급하는
이 조차 없다. 마치 한재윤이라는 존재가 원래 그랬던 것 처럼 아이들은 소름끼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이
런 상황을 본인도 예측 못한 것을 아니겠지. 다만 이건 내가 생각해봐도 그 진행의 속도가 너무 빠른 것이 아닌가 싶다. 아마 누군가
가 이 상황을 제지해주지 않으면 한재윤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 녀석이 있건, 없건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
다.
하지만 그 상황을 막아줄 사람은 저 들중 한명도, 선생님들도, 본인도 아닐 것이다.
" 야. "
호준이가 옆에서 나를 툭 친다.
" 왜. "
" 야, 그... 점심먹고 나랑 그..."
호준이가 얼굴을 붉히고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더듬는다. 매우 게이스럽다.
" 아 제발, 이제 게이 컨셉은 질린단 말이야."
" 아니, 좀 말할 게 있어. "
" 그럼 여기서 말하시죠? "
" 그, 그런 종류가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네 도움이 좀 필요한 것 같아."
이 녀석이 심각한 얼굴로 말할 때는 별로 되지 않는다. 그 만큼 녀석에게 중요한 이야기라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
이 시덥잖치 않은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녀석이야 말로 심각한 것에 진지하지 못하고 사소한 것에 뜬끔없이 심오해
지는 녀석이니까.
" 뭐, 생각해보고."
" 뭘 생각해보고야. 너 나 말곤 친구도 없잖아."
맞다. 난 정말 이 녀석밖에 친구가 없다.
" 그.. 그치. 넌 정말 내 하나밖에 없는 친구였지..."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겁다.
" 아니, 그렇게 슬퍼하진 말고, 사람이 친구가 없을 수도 있는 거지뭐."
급 우울해진 나의 어께에 호준이가 손을 올리며 위로해준다.
" 그래서 뭐야, 할말이라는게."
온화한 햇볕 아래 옥상에서 시원한 봄바람을 맞으면서, 내 곁의 호준이가 어디서 챙겨왔는지 '렛잇비' 두 캔을 주머니에서 꺼내
나에게 한 캔을 준다. 호준이에게서 '렛잇비'를 받아들고 뚜껑을 따니 칙 소리가 나면서 약간의 거품이 올라온다.
" 그 ,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호준이가 공중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말한다.
" 왜, 요즘 성생활에 문제라도 있니?"
" 그런거 아니라니까."
내 개드립에도 불구하고 호준이가 어떤 감정도 없이 말한다.
" 그럼 뭐가 문제야. 뜬끔없이."
" 그, 있잖아. 그... "
호준이가 잠시 엄청나게 뜸을 들이더니
" 나,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 것 같아."
" 그래. "
" 뭐가 그래야."
" 아니 알겠다고. "
" 뭐가 알겠다고야."
" 니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서. "
" 어. "
" 너가 좀 호모색슈얼이지만 고자는 아니잖아. 누군가를 좋아할 순 있겠지. "
" 아니 이 새끼야. "
호준이가 이마를 손으로 쥐어짜면서 짜증이 난 듯 인상을 쓴다.
" 이거 굉장히 심각하다니까."
" 뭐가 그리 심각한데."
" 이제껏 난 너 말고 좋아했던 사람이 없었단 말이야. 그 어떤 미소녀가 나에게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 ' 딱.... 딱히 사귀어 달라
고 주는 건 아니니까...' 라면서 선물상자를 주면서 말해도 ' 그래, 나도 너와 딱히 사귀고 싶지 않아.' 라고 딱 잘라 거절해서 턱뼈
가 나간게 바로 며칠 전인데. "
아, 그랬었지. 이 녀석 나름 얼굴값 한다고 고백도 참 많이 받았던 녀석이다. 그리고 그 많은 고백중에서 이루어진 고백은 하나
도 없었다. 심지어는 작년 남자애들 사이에서도 개념옹골찬 외모로 인기가 많던 여자애로부터의 고백도 ' 내겐 한명이 한명뿐이
야!' 라는 왠지모를 라임까지 느껴지는 외침으로 한동안 애꿏은 나까지 게이설에 휘말려 당사자가 아닌 내가 해명을 하고 다녀야
했었다. 그때 여자애들의 매가 빙의한 듯한 눈빛에 얼굴이 참 따가웠었지. 제길.
" 그래서, 개는 왜 좋아하는건데."
" 개가 날 싫어해서."
헐, 미친. 입속에 들이키던 커피가 기도에서 역류한다. 참을 수 없는 기침이 잠시동안 계속해서 나온다. 맞다. 상대는 호준이었
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녀석이다. 그 녀석을 이 앞에두고 너무 방심했다. 제기랄, 한방 먹었군.
" 아니, 왜 그렇게 놀라냐? "
호준이가 살짝 뾰루퉁해져서 묻는다.
계속해서 기침이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멈추게 하고는 숨을 고른다.
" 니...쿨럭... 이제 마조히스트로 전향하기로 한거냐? "
가까스로 말하고는 나는 참았던 기침을 다시 내뱉는다.
" 아니 뭐가, 아이씨 난 장난 아니라니까."
호준이가 인상을 쓰면서 짜증을 낸다.
" 켘켘... 근데 니 이유에 진지함이 없잖아, 무슨 시트콤이냐고 인생이. "
" 지금껏 날 보고 그렇게 윽박지르고 무시한 사람을 본적이 없어. 이제까지 살면서 내가 그렇게 묵사발이 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근데, 그녀는 그랬어. 날 마치 음식물쓰레기중에서도 재활용 할 수 없는 삼계탕 끓기고 남은 뼈 한조각처럼 취급했다
고. 정말 나한명 니가 되는 느낌이었단 말이야. "
나? 음식물 쓰레기?
" 정말... 내 지금 껏 인생 살면서 엄마나 아빠에게 밖에 느끼보지 못한 감정을 이런데서 느낄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녀는 정말
내게 신세계를 보여주었다고. 그러니까, 그녀는 내게 특별한 존재야. 그러니까 사귀어야겠어. "
그게 무슨 논리인가 싶지만,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해있는 이 녀석에게 딴지 걸기는 힘들 듯 싶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 개가 누군데? "
" 음... 안 말할래."
" 야! 떡밥 다뿌리고 안 말해주는게 뭐냐. 똥 싸고 안 닦는거랑 다를게 뭐냐고. "
" 나중에 닦아도 괜찮아. "
" 전혀! "
" 어쨋든, 지금은 못말해주겠다. 그래도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해줄게."
호준이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녀석의 빛나는 외모에 뚜했던 내 마음이 사르르 풀린다. 뭐라고 대꾸하려
던 입을 그냥 다문다. 아아, 아름답다. 그냥 나랑 둘이 오래오래 살면 안될까 싶다.
옥상에서 내려오자마자 호준이 녀석때문에 점심시간 내내 참았던 화장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이미 예비종은 쳤지만 뭐 그
까짓 예비종이 나의 배변욕구를 막을 수는 없다. 텅빈 화장실에서 홀로 소변을 보고 있으니 내 오줌이 소변기를 때리는 청량한 소
리가 텅 빈 공간의 공백을 나름 알차게 채운다. 하핫, 이 녀석, 진정하라고? 비록 사소하지만 또 하나의 짐을 내려놨다는 느낌 그
리고 약간의 자부심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성공적인 배변이야 말로 건강의 청신호가 아니겠는가. 가벼운 마음으로 반
으로 돌아가는데 저 멀리 심상치 않은 무리들이 보인다. 머리카락 색부터 이 거리에서 보일 정도로 다채롭고 화려한 것이 왠지 낯
이 익다. 저 스키니한 교복과 덩치를 보니 아무래도 한재윤을 찾으로 왔던 일진들인것 같다. 곧 있어 반삭머리와 함께 한재윤이
교실에서 나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재윤이 반삭머리에게 멱살을 붙잡혀 끌려 나오는 중이었다. 그대로 반삭머리는 계단
을 향해 한재윤을 끌고 내려가고 나머지 무리들이 그 뒤를 뒤따른다. 영 좋지 않은 상황이다. 반 입구부터 아이들이 웅성대는 소
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한바탕 하고 나간 모양새다. 아마 그들은 한재윤을 학교 쓰레기 소각장쪽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청소시간 외에는 일진들이 거의 아지트로 쓴다는 것을 알기에 아이들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고, 담배를 피거나 농땡이 치는 선
생님들도 굳이 냄새나는 소각장에서 일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쯤이면 정말 아무도 없는 곳이다. 그 곳에서 잠시후면 한
재윤은 말 그대로 걸레짝이 되서 돌아오겠지. 그렇다고 그들이 그 선에서 끝내는 것도 아니다. 아마 두고두고 갈구고 또 갈궈서
사람을 말려 죽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누군가가 막지 못하면 한재윤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게 되는 것이다.
" 이제 한재윤 어떻하냐?"
"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 누가 선생님이나 다른 사람한테 말하러 가야되는 거 아니야? "
아이들이 수근댄다. 그러나 저렇게 말하는 이들 중에서 정작 행동으로 옮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역시 입만 살았다니까. 착하
게 사는 이론은 모두가 안다. 다만 행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 기회비용이 크거든. 저들은 그 기회비용을 치르고 이론을 따를 만큼
그다지 착실한 인간들은 아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것마냥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하고 또 말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기 대신에 그것을 해주기를 기다린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영웅을 바라는 지 모르겠다. 그 기회비용
을 자신 대신에 얼마든지 지불하고 사회의 정의를 실천해 줄 수 있는 존재, 그리고 또 그 존재를 찬양한다. 얼마나 이해타산적인가.
절대로 자기가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대신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도, 영웅이 없다는 것도 알면서 절대 자
신이 나서지 않는다. 설사 영웅이 있다한들, 결국 그 영웅에 대한 찬양이라는 것도 자신의 무손실에 대한 기쁨의 돌리고 또 돌려
서 표현한 것이 불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참으로 정 떨어지는 존재들이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나. 나는 저들을 못마땅
하게 바라보다 한재윤과 그 무리들이 내려간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