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젊은이들을 위한 정의와 평화의 교육/교황 베네딕토 16세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선물인 새해를 맞아, 모든 이에게 믿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며 정의와 평화가 확고히 새겨지기 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맞이하여야 하겠습니까?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시편 130(129),6) 더 굳건한 희망으로 주님을 기다립니다. 여러분이 2012년을 이러한 확신에 찬 믿음으로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제45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젊은이들을 위한 정의와 평화의 교육”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립니다. 젊은이들과 그들의 관심사에 동참하고, 그들의 말에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는 것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미래를 세우기 위한 사회 전체의 첫째 의무입니다. 교회는 젊은이들이 진리를 찾고 공동선을 수호하며,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일들”(이사 42,9; 48,6)을 바라보도록 격려합니다.
평화와 정의에 대한 참 교육은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모가 첫 교육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우리가 정의와 평화를 익히는 첫 학교입니다. 부모는 자녀와 함께하면서 그 삶의 여정에 더 깊이 동참하고 연륜으로 얻은 경험과 확신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모범적인 삶을 통하여, 자녀들이 진정한 정의와 평화의 유일한 원천이 신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도록 격려하기를 바랍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모든 가정과 교육 기관들이 그들의 교육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도록 구체적인 도움을 주고, 젊은이들에게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하여 진정으로 봉사하는 투명한 정치상을 보여 주십시오. 젊은이들도 정의와 평화 교육을 비롯한 자신의 교육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만 인간 자유의 의미도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이 참된 자유를 누리도록 양성하는 것이 교육의 과제입니다. 참된 자유는 아무런 제약도 없는 방종이 아닙니다. 참된 자유는 하느님을 떠나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자유를 행사하기 위하여 인간은 자신에 대한 진리와 선과 악에 대한 진리를 알아야 하고, 양심의 법을 발견해야 합니다. 자유는 자연 도덕률과 관련되어 있으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존의 기초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자유의 올바른 사용은 정의와 평화 증진의 핵심입니다.
자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존재와 생활 방식이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요구합니다. 여기에서 상호 신뢰, 용서를 할 수 있는 힘, 주고받는 사랑, 연민, 희생을 할 각오가 생겨납니다. 이 요소들이 없다면, 평화와 정의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그저 빈말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평화는 거저 받는 선물이 아니라 우리가 떠맡아야 할 과업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일꾼이 되려면, 우리는 스스로 교육하여, 연민, 연대, 협동, 형제애, 능동적인 공동체 활동을 배워야 합니다. 평화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추구하여야 하는 목표입니다. 미래 세대가 평화의 겨레가 되고 평화의 일꾼이 되도록 교육하여야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저는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사회를 위한 소중한 선물입니다. 어려움에 부딪쳐 좌절하지 마십시오. 흔히 가장 쉬운 길로 보이는 그릇된 해결책에 기대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투신하십시오. 힘든 일과 희생을 직시하고, 성실과 인내, 겸손과 헌신을 요구하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여러분의 젊음을 믿으십시오.
[서울] 되돌아봄과 바라봄/고준석 신부
항상 해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때 괜스레 가슴이 떨리고 설렘과 더불어 어떤 희망이 자리 잡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아쉽고 못다 이룬 꿈이 남아 있는 지난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첫날이기에,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되돌아봄과 바라봄, 이 두 가지가 얽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해를 보내고 2012년,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를 기쁘게 하고 나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올 한 해 동안 내 가슴 속에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슬픔이 많은 사람보다 아쉬움이 많은 사람의 삶이 더 힘들고 괴롭다.” 진정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아쉬움이란 무엇입니까?
사실 지나고 나서 우리가 늘 후회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들은 특별한 실패나 부족함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물질이나 능력이나 지위나 명예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고 크게 마음 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고, 겸손하지 못한 데서 생긴 후회나 아쉬움은 오래갑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늘 우리를 우울하게하고 가슴을 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목자들이 천사의 기쁜 소식을 들은 후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경배합니다. 한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사실 마리아는 누가 그 목자들을 불렀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은 그 아기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는지 등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묵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든 신비를 마음속 깊이 새겨 간직하면서 하느님의 길을 발견하려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미약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관찰하고 그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체험은 그 나름대로 가치를 지닙니다. 비록 고통스러운 경험일지라도 우리를 좀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도 새롭게 사랑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마음 속에 곰곰이 간직하고 묵상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지난 한 해에 축복을 주셨고 올 한 해에도 축복을 주시리라는 사실을 믿게 될 것입니다.
[마산]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강론/유영봉 몬시뇰
우리 주변의 프로테스탄 신자들이 가끔 천주교를 비난할 때, “천주교는 예수님을 믿는 교가 아니라 마리아를 믿는 교회이다”고 말한다. 어느 성당이나 성모마리아 상(像)이 모셔져 있고, 한해를 시작하는 1월 1일을 마리아의 축일로 지낼 뿐만 아니라, 그 축일의 이름도 “천주의 모친 마리아 대 축일”이다. 한 인간을 ‘하느님의 모친’이라니, 얼마나 엄청난 호칭인가? 더구나 한국 교회는 이 축일을 주일이 아닌데도 주일처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축일’로 지낸다. 어디 그 뿐인가? 다른 기도는 몰라도 성모님께 바치는 ‘묵주의 기도’를 모르는 천주교 신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렇게 성모님께 대한 우리 신자들의 신심과 정성이 남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성모님께 바치는 이러한 공경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의 위상(位相)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때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때가 많다.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오는지?” 이해하기 힘들 때 우리도 성모님처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하며 그분께 온전히 우리를 내맡길 수 있어야 하겠다
[안동] 간직해야 할 이름, 예수!/최상희 신부
천사들의 찬양을 듣고 목동들이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기 위하여 발길을 재촉합니다. 목자들과 마리아는 예수 탄생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인간 방문에 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바로 그 믿음의 모범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그들에게 약속한 것을 봅니다. 우리들은 목동들이 들었던 그 말을 통하여 일어난 일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 받은 첫 번째 사람들인 목동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상, 당시 사회에서 목동들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채울 수가 없다고 해서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구세주 메시아께서는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맨 처음으로 주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관계를 맺고 형제애를 주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새로운 역사 안으로 인도하면서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게 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일어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말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말들의 의미를 풀이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영적인 친교의 차원에서 나눔 받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선명하고 올바른 믿음을 위하여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나눔입니다.
우리도 이렇듯 예수 탄생 이야기를 우리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이 예수 탄생에서 역사 안으로 들어와 우리 모두에게 나타난 하느님 사랑의 신비 안으로 빠져 들어갈 때까지 우리가 전해들은 기쁜 소식을 이리저리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느님(야훼)께서 구원하시다’라는 예수님을 우리도 마리아처럼 이 세상에 전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기쁜 소식은 축복의 말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만나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 가운데 생생하게 현존하여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축복은 백성이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은 백성을 평화로써 다시 말해서 온전한 생명으로써 축복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성경에서는 평화를 온전한 생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마리아처럼 오로지 창조주 하느님께 의탁하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어머니,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인천] 스펀지가 아닌 세상이라서 감사합니다./조명연 신부
멀게 느껴지면서도 가장 가까운 날은 언제일까요? 정답을 말씀드리면 12월 31일과 1월 1일입니다. 실제로는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해가 바뀌어 2011년에서 2012년이 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먼 시간처럼 보입니다. 사실 우리의 주위 환경이 확 바뀐 것도 없습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마음이 변한 것이지요. 새해를 맞이해서 열심히 살겠다는 마음가짐, 더 의미 있는 해를 만들겠다는 다짐들이 2011년 12월 31일과는 다른 2012년 1월 1일을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마음으로 힘차게 살 201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새 도화지 같은 2012년 새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올해는 실수하지 않고 멋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도록 항상 주님께 의지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기쁘게 행복을 일구어가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어렸을 때 저는 자주 넘어졌던 기억이 떠올려집니다. 바지가 엉망이 되어 어머니께 혼나는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넘어지면서 무릎 등에 상처 나서 아픈 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땅이 모두 푹신푹신한 스펀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요. 그리고 실제로 성당에 가서 어린 마음에‘예수님, 이 세상의 모든 땅이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스펀지로 만들어주세요.’라고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저의 이 기도를 만약 주님께서 들어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농사를 지을 수 없을 테고 꽃이나 나무도 자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자동차는 어떻게 다닐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이 어렸을 때의 저처럼 고통과 시련이 없는 스펀지 같은 세상을 원합니다. 하지만 스펀지가 아닌 세상에 살고 있음이 오히려 큰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에 대해 좌절도 또 불평불만도 하지 않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 뜻에 맞추어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새해의 첫날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께 다가왔던 모든 신비는 사실 커다란 고통과 시련의 모습이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할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예수님을 낳았을 때까지, 1년간의 모든 일이 어린 성모님께서 견디어 내기에는 너무나 큰 짐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주님 뜻에 맞게 생활하셨던 것입니다.
이 성모님을 기억하면서 올해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그리고 항상 지금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최선을 다하며 당신을 따르는 사람과 언제나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부산] 루가 2, 16-21./서공석 신부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새해일 것을 빕니다. 여러분의 가족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충만할 것을 빕니다. 2012년 한 해 동안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셔서 그분의 은혜로우심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천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은 2012년을 시작하는 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 축일’입니다. 그리고 또한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말은 기원 후 431년 에페소공의회가 믿을 교리라고 반포하면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뜻으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믿음을 알리는 표현입니다.
5세기 에페소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풀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만일 그의 주장대로,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가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그분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공의회 교부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하기 위해 예수는 태어날 때,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긍정하였습니다.
공의회는 예수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해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을 채택하였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천주의 성모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가 태어날 때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이 표현은 그 시대 신앙인들이 예수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예수의 삶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참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을 전하는 말입니다.
1970년에 교회는 그 교의적(敎義的) 표현을 가져와서 오늘의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오늘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신앙인은 없습니다. 예수가 마리아로부터 출생할 때,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일 뿐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가 1970년에 이 축일을 제정한 것은 그리스도 신앙은 다른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고,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다시 천명한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평화였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백성을 평화로이 살도록 해 주면. 모두가 평화를 누렸습니다.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을 제정한 것은 세계의 평화는 이제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겠지만,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평화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성탄날 밤,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서(2,14)가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러 퍼진 천사들의 환호라고 말하면서 전하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주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우리가 이웃의 자유를 빼앗고 억누르면서 평화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 싶으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고, 죄인을 용서하면서, 그 섬김이 어떤 실천으로 나타나는 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웃을 보살피며 섬기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고 그 실천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어느 고을에서 죄인이라 낙인찍힌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루가 7,48). 그 여인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니 평화 안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여인은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졌습니다. 은혜롭게 영접하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은혜로운 것이 되게 해야 하는 세월입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새해를 은혜롭게 살자는 뜻을 담은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하느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욕심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이웃에게 무자비하기도 합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생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여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이며, 세월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으며,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실천해야 하는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며, 새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느님이 베푸신 좋은 한 해를 시작합시다. ◆
[부산] 당신 마음 속에/이동화 신부
로마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우리 인생 역시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성숙해 갑니다. 좋은 부부는 결혼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인내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됩니다. 좋은 부모 역시 아기를 낳는 그 기쁨의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향한 사랑과 헌신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신앙인은 세례의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전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고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주변의 일들을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서, 그 놀라움과 경이로움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품을 수 있을 때 성숙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을 자신의 가슴 속에 품는 것은, 물질 중심의 경제 논리에서 해방될 수 있을 때, 효율과 능률의 논리에서 해방되어 자기 마음을 비워놓을 수 있을 때나 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긴 시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을 찾고 그 마음속에 하느님을 담았던 한 여인, 그래서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자신의 주변을 향해 깊은 연민과 식별력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잉태할 것을 알리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곰곰이 생각하던 마리아였습니다.(루카 1, 29) 그녀는 구유에 누워있는 갓난아기를 찾으러 온 목자들의 방문 역시 마음속 깊이 새기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본 아기의 모습에 놀라움으로 어안이 벙벙해졌지만(루카 2, 47) 그 모든 것 역시 마음 속에 새겨둡니다.(루카 2, 51) 언제나 모든 일을 마음 속에 새기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한 여인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그 어떤 놀라움도 가슴에 새기고 그 어떤 아픔도 마음 속 깊이 안고 가려는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여인이었기에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루카 1, 38)하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듯이,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고백하는 것은 당신의 육체로 성자 하느님을 낳고 기른 결과 때문이기보다는, 평생을 하느님의 말씀을, 그래서 말씀이신 아드님을 마음속 깊이 넣고 살았던 삶의 과정 때문입니다. 온 인생을 통해 자기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채우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당신 자궁 안에 잉태하기 이전에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춘천] 주님의 뜻대로/이명호 신부
찬미 예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시고, 하느님 나라에서와 같은 행복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으로 새해 아침을 선물로 주셨으니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살아갑시다.
여러분은 외교관과 여자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외교관은 자신의 의사를 함부로 결정하지 않고 늘 신중합니다.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외교관이 뭔가를 결정할때,“ 예.”라고 말하면, 그것은“ 한 번 생각해보겠다.”는 뜻입니다. 또 외교관이 “한 번 생각해 보겠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아니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외교관이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그건 외교관도 아닌 것입니다.
외교관의 기본자세는 긍정적인 소통과 관계성입니다. 한편 여자가 “아니오.”라고 말하면 그건 “한 번 생각해 보겠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 보겠다.”라고 말하면 그건 “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예.”라고 말한다면 그건 여자도 아닌 것입니다. 여자는 튕기는 맛이 있어야 하는가 봅니다. 그냥 유머로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은 여자이길 포기하신 분이십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리라는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예.” 라고 대답하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성모님은 여자이길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한껏 꾸미고 연애할 수 있는 여자됨을 포기하셨고, 평범한 결혼 생활 속에서 얻게 되는 보통의 여자됨을 포기하셨으며, 자식이 잘 되어서 자식 덕을 볼 수 있는 여자됨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됨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 성모마리아의 삶은 불행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까지 쉬운 삶은 아니었지만, 성모님은 복되신분이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삶 전부로 이루신 참으로 복된 분이십니다.
두 번째 질문을 드려봅니다. 신앙인과 비신앙인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느님의 뜻을 채우며 산다면 그것은 신앙인이고, 자기 뜻을 채우며 산다면 그것은 비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채울 때 풍성한 복을 내릴 것이라 믿고 있는 사람이 참다운 신앙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하늘나라를 위해 하느님의 뜻을 지금 여기에서 채우는 사람만이 신앙인입니다. 지금 당장은 조금 뒤처지고 손해보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우리 안에 채운다면 결국 우리는 복된 삶을 살 것입니다.
2012년에는 하느님의 뜻을 보다 더 많이 채울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말입니다. ‘작년보다 조금 더’이면 좋겠습니다.
온 세상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안고
이땅에 구세주로 파견되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 선교는 신앙의 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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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평화와 착함! 수고가 많으십니다. 한자리에서 강론을 모두 대할수가 있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