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연세가 높아 천수를 다하셨다.
연하장애가 오셔서 보조제를 썼던게 전부고
한때 코로나에 걸리셔서 처방후에도 고열이 계속되셔서
앰뷸런스를 이용 병원에 가서 검사받고
약을 복용하셔서 나으셨다.
아버지는 자수성가 한 분이고 사남 사녀중 장남이셨다.
동생들은 삼남삼녀, 위로 누님이 한분 계셨는데 형편이 썩 좋진 않았다
우리 집도 좋은 형편은 아니었다
동생들은 함께 산 분도 있지만 어려우면 그때마다 항상 아버지께 왔다.
돈이든 뭐든 도움을 요청했다.
문제는 일을 저질러 놓고 형님을 오빠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어릴때에 우리 가족은
특히 정서적으로 힘들었다.
특히 재산문제로 할아버지 생존시
갈등이 생겼다.
서로 모시겠다는데
어린 나이에도 웃음이 나왔다.
모시겠다고 할아버지 돈을 가져다 쓰는데
갚지도 않고 모신다고 한 날들이 지나도 모시지도 않고!
당시 장남은 상속지분이 많았다.
재산욕심이 있어 아버지가 동생들이 모신다는 걸 반대한다는 말이 돌았다.
그럴만도 하긴 했지만
아버지가 우려한것은 재산이 전부 간후에 할아버지 할머니
를 안모시고...우려한 것이었다.
아버지 예측은 사실이 되었다
아버지는 권위가 있으셨다.
할아버지 조차도 아버지가 반대하면 함부로 자신의 뜻대로 하지는 못하셨다.
제일 많이 배우셨고 고향에서 아버지에 대한 평판은 매우 좋았다.
그러니 형제끼리 불만을 얘기해도 바깥에선 말을 못했다.
그 형제를 다 챙겨준 사람은 역설적이지만 아버지셨다.
나이 어린 누이동생들 가르치시고
막내 작은 아버지 취직시키고 조카들 취업부터 학폭으로 경찰서 간 조카일까지
수습하셨다.
(지금 같으면 아버지의 지역내 신망으로도 될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는 그랬다)
형편이 어려운 고모가 오시면 집안에서 큰 소리가 났다.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단 하나 어려우니 돈을 달라는 얘기였다.
아버지의 꾸지람소리와 고모의 악쓰는 소리가 난 정말 싫었고 고모가
오지 않았으면 했다.
이사한 후 하교길 대문앞에서 그 고모를 본 순간 심장이 멎을거 같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색하게 쳐다만 보고 있는 내게 잘 있었느냐고 묻는 고모!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일에 대해 많은 간섭을 하셨다.
아들로서 이게 좋겠다는 얘기셨지만 할아버지는 듣지 않으셨고
그 말은 더욱 할아버지와 형제들이 의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집안에서 제일 잘 들리는 얘기는 우리집이 재산욕심을 낸다
는 얘기였다.
할아버지가 의심을 하고 갈등이 극에 다달았을때 할아버지 방에
갔다 오신 아버지는 앉아서 벽에 기대어 우셨다.
자다가 깬 나는 아버지가 아실까봐 자는 척 했다
그때 아버지는 어머니께 그러셨다. 아버지 참 너무 하신다고!!
우시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숨죽이고 잠을 자는 척 했다.
아버지는 서울유학을 하셨다.
물론 공부를 잘해서였고 당시 최고학부를 나오셨다.
유학이란게 당시 말이 좋지 공부환경이 좋지는 않았지만
노력으로 가신 것이다.
어머니가 보고싶어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아버지.
어쩌다 집에 오는 길엔 밤중에 산고개를 넘을 때면 무서워 달리셨다는 아버지!
그러니 집안 농사일은 바로 아래동생이 했고 나중엔 우체국에 다니셨다.
세째 작은 아버지는 그래도 사범대에 가셔서
풍족하게 사셨다. 학원일타강사도 하시고!
그게 원인이었을까?
둘째 작은 아버지는 아들이 대입시험에 떨어졌을 때
우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중엔 우체국에 다니셨지만.
내겐 사촌형인데 사수인가 오수만에 대학을 갔다.
그리고도 취업이 안됐다.
놀고있는 그는 작은 아버지의 걱정거리였다.
나도 졸업후 몇년간은 놀았다. 백수였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취업을 시켰다 사촌형을!
자식도 못 시키시면서!
그러려니 했다. 아버지 성품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 뒤에 고맙다는 전화 한통이 없었다.
나중에 동생에게 들으니 작은 아버지가 쌀 한가마니를
실어주고 끝이었다.
나는 사촌형이 무척 괘씸했다.
이럴 수가 있냐고, 나도 못하고 있는데 큰 아버지가 나서서
취업한걸 알텐데 전화 한통이 없냐고 아버지께 따졌다
그때도 아버지는 못된 놈이라든가 하는 일체의 말이 없으셨다.
그런 분이셨다.
오해가 있으면 풀 생각이 없는 듯 보였고 그런 말이 들리면 난 괴로웠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돈 요구 하신걸 본 적이 없다.
한밤중에 오는 전화는 다 아버지 형제들이 하소연하는전화였다.
평소에 잘하지 어째 평소 험담은 하면서 그 나쁜 형님에게
도와달라고 전화하는 심뽀는 뭐지!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해결을 해 주셨다.
작은 아버지들은 아버지 앞에선 꼼짝도 못하셨다
작은 어머니는 그게 불만이었나 보다.
왜 할말을 형님에게 못하고 네 알겠습니다 형님! 소리만 했는지 모른다고
나중에 들었다 작은 어머니에게!
조용히 넘어갔지만
참 역지사지를 못하는게 나도 그렇고 인간이다.
어려움도 모두 큰 형님이 해결해 주섰고 아버지 성격이나 물욕없는 건
자신들이 더 잘 알것이다!
공부를 하기 시작한 계기도 아버지는 다르셨다
국민학교때 놀기만 하셨다고 들었다
어느 저녁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자식걱정을 하셨단다
쟤가 열심히 공부해야 할텐데 하시는 말씀을 들은게 계기였다고.
못살아서 가난을 면해보자 그런거 아니었다고!
아주 빈농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그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하셨고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꾸던 당시 합격을 하셨다.
서울유학생활도 쉽지 않았다
한 겨울에 아버지는 냉골 바닥에서 추워서 다리를 오므리고 주무셨다
고 회상하셨다.
할아버지가 사준 구두가 못이 튀어나와 발바닥을 찔러도 아버지는
신고 다니셨다.(돈이 없었다)
아버지는 절친이 많았다.
신용이 있고 사심이 없는 아버지를 좋아하는 친구분들이 많았다.
나도 어릴때부터 아버지 따라 친구분 댁에 가면 꼭 대접아닌 대접을 받았다.
그때 내가 보기엔 고지식하시고 물정 모르시는 아버지가
왜 깍듯한 대접을 받는지 몰랐다.
학벌때문에!
그런 점도 있었다 그러나 출세한 친구든 아니든 아버지는 다 따뜻하게
대하셨다. 아버지에겐 출세한 친구도 고향에서 어려운 친구도 속마음을
터 놓고 말씀하셨다!
출세한 친구들은 교수도 있고 저명한 예술가도 회사 사장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청탁이란 걸 자신을 위해선 하지 않으셨다
아니 모르셨다.
출세할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밀어줄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에 갈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차마 부모와 동생들을 놔두고 혼자 잘 살겠다고
아버지는 그 길을 택할 수가 없었다.
분가하자는 어머니 설득에
처자식은 버려도 부모는 버릴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얘기를 어머니께 들었다.
그런 분이 재산욕심이 있었다고!
평생을 그리 사셨다!
아들이 아버지는 왜 그렇게 사세요! 해도 아버지는 변함이 없었다.
자식이 보기엔 답답하기도 했었고 고지식하게 생각했다.
내가 나이가 들어 먹고 살기 바빴다
그리고 아버지를 뵐때마다 힘들게 사신다 했다.
지금 아버지를 떠나 보낸후
아버지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다.
한번도 권위적인 모습을 안보여 쉽게만 느껴졌던 아버지
많은 오해도 비판도 견뎌내신 아버지의
본 모습이 보인다.
결점도 많으셨지만 장점은 더 많으셨던 아버지!
따라갈수 없는 아버지의 속내와 정을 알았다.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신 분도 아버지셨다.
모시겠다는 자식들은 없었다
다들 자기집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따로 사셨다.
평생 모시겠다는 자식들은 결국 안 모셨다.
사실
우리 집도 모실 만하진 못했다
할아버지가 마음을 바꾸셨는지 모르나
방을 얻어서 모시고 임종을 지키셨다
큰 아들의 진심을 할아버지가 그제서야
아시고
그때 부자간 오해가 풀렸다고 들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전 모신 분은
돈 잘버는 세째 아들도 아니요
큰 형님은 서울 유학을 보냈으니 땅은 나를 달라
잘 모시겠다던 작은 아버지도 아니요
아버지셨다.
재산의 대부분은 이미 둘째와 셋째 작은 아버지에게
갔다!
나는 돈이 없어 가끔와 돈을 달라던 고모와 화나면 말씀을 막하시던 할아버지에게
어린 나이에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울면서 학교에 뛰어간 기억이 난다
그리고 미워했다
운명이란 얄궂은게 그 고모가 또 어려울 때 돈은 아니지만 작은 도움을 드렸다
그때는 나도 나이들어 고모도 힘들게 사신 분이고
마음은 순수한 분이었음을 알았다.
이젠 많은 분들이 세상에 안계신다.
그리고 사실은 미우니 고우니 해도 형제와 남매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셨던
아버지도 세상을 뜨셨다.
한가지 아버지는 화장을 싫어하셨다.
생전에 아들을 불러 매장이든 화장이든 편한대로 하라 하셨다.
그건 아들을 위한 배려이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매장을 선호하신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형제들과 상의시 매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매장생각으로 수십년전 구매해두신 곳에 어머니가 계신다.
당시엔 합장묘로 구매하셨는데 장례지도사 말처럼 이렇게 면적이 작으면 합장묘 면적이 아니란다
겹쳐서 들어갈 면적이란 것이다.
(장삿속에 많은 분들이 화장을 선택할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 말을 듣고 화장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나로선 겹쳐서 들어갈 면적이라는데 어쩔수가 없었다.
그리 결정을 하고 아버지 영전에 고했다.
아버지 부득이 화장으로 결정했어요!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게 마지막 바램이셨을텐데!
불초한 자식은 그 바램을 들어드리지 못했다.
아버지 오랜 세월 우리 형제들 키워주시고 아껴 주신 은혜
결국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고 임종도 지킬수 없었습니다.
불초한 자식이란 말씀밖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평안히 쉬세요!
아버지 진심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제가 압니다!
할아버지가 너무 하신다고 벽에 기대어 우시던 아버지를 전 기억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제 아버지셨음이 제일 자랑스럽습니다!
첫댓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돈 때문에 집안의 어려움을 겪는 일이 대부분이더군요... 아버님의 천도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