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는 노래하고 세월은 흐른다 - 허수경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 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개여울, 1922>
소월이 약관 스무 살에 쓴 시다. 놀라운 감성이다.
그는 서른 두해 짧은 생을 살고 갔지만, 그의 시가 오래도록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시대를 초월한
특유의 가락과 감성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 특별한 전시회에 초대받았었다.
화가 정미조씨의 그림과 음악이 함께하는 디너 콘서트였다.
‘시간의 흐름과 변모’라는 영상전에, 클레식기타에 맞춰 음악 퍼포먼스를 곁들인 영상과 음악이 있는
이색 전시회였다.
정.미.조.
7 ~ 80년대 그리운 생각, 사랑의 계절 그리고 소월의 시어로도 빼어났던 개여울 등의 히트곡으로
그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가수로 기억 될 것이다.
가수라는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주변의 노래 요청을 거절하고,
화가와 가르치는 삶만을 고집했다는 그는 그러나 고엽, 개여울, When I dream 등을 부를 때는 30여 년의
시차를 넘어 여전히 우아한 가수였다.
어느해 여름방학 미술관 순례차 파리에 머물던 나는 지인의 소개로 몽마르뜨 언덕에서 유학하는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인상보다 조금 더 그로데스크했다.
무슨 날이었는지 한국인 몇 명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음식을 해 먹고 들쭉날쭉 얘기가 겉돌다가 새벽녁이 되어서야 이야기가 모아졌다.
문학, 예술, 한국의 정치상황 뭐 대강 그런 주제였던 것 같다.
누군가의 선창으로 우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곳은 이내 콘서트장이 되었다.
히트곡들을 그는 한처럼 쏟아 내었다. 어느 노래에선가 우린 모두 목이 메었다.
"그립다 생각나면 조용히 눈을 감자
잊었던 조각들이 가슴에 피어난다
아득히 가버린 그 사람 지금은 없어도
마음을 조-이며 기다리는 기쁨도 있다
추억을 아프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그립다 생각나면 조용히 눈을 감자".
타향살이의 고단함과 외로움, 남의 언어로 하는 학업에 대한 중압감, 그리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
각자의 가슴엔 각기 다른 회한들로 가득찼을 것이다.
난 조용히 일어나 그의 아뜰리에를 돌아봤다. 거기엔 붓을 모티브로 형상화한 ‘여인의 그리움’이란
표제의 '붓'그림들이 가득했다. 가슴이 뭉클한 게 다시금 목이 메어왔다.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83x117cm,1984
'가수는 노래하고 세월은 흐른다’고 시인 허수경은 말했다.
요즘 서ㅇㅇ씨의 음악카페에서 세대를 이어 공감하는 음악들을 같이 들으며,
나 역시 정서적 이해 관계자의 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 노래들 속에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내 지나온 한 시절의 한숨과 방황 그리고 순정함이 있다.
가평이던가, 대성리였나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친구의 나직한 기타 소리에 귀 기울이던 애잔했던
순간들, 노래 끝에 밀려오던 밤의 적막감.
순정은 시간의 흐름으로도 막을 수 없는 그리움의 마지막 보루인가?
수많은 노래가 그 만큼의 가수를 뒤로하며 흘러갔다.
한동안 그 가수도 노래가 아닌 그림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했다.
귀국 후, 그는 oo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열여섯 번의 개인전과 100여회의 그룹전에 참여하며
30년 넘게 화가로 살았다.
그래도 그 밤 한줄기 눈물로 함께 했던, 내 나라 언어가 전해주던 그리움과 정겨움을,
세상의 설렘을, 따뜻한 모국어로 들려주던 그의 목소리는 내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반추되었다.
37년 만에 그는 다시 가수로 돌아왔다. 콘서트가 있는 날 나는 다시 객석에 있었다.
작곡가이면서 색소폰 연주자인 손성재씨 편곡으로 재탄생한 '개여울'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피아노의 인트로도 좋지만,
노래 중간부분 색소폰 연주의 긴 호흡은 떠난 사람의 한숨과 미련을 느끼게 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성숙하게 나이든 가수가 주는‘세월의 힘’은 객석을 숙연하게 했다. <2022. 1>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