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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40,1-11>
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6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7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9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참 묘한 일입니다.
나무들은 걸치던 옷들을 다 벗고서 겨울을 나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옷을 겹겹이 덧입고서 겨울을 납니다.
겨울나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채웁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자신을 그렇게 채우는 바람에 그분이 들어오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도 자신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 비워진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의 ‘목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인류라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이 비유는 '목자의 기쁨'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마태 18,10)
그리고 그 이유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마태 18,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비록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버지의 기쁨’ 입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결국, 이 비유의 정점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사랑’을 행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이 지극하신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목숨을 바쳐 ‘이 사랑’을 행하셨고, 바로 그 일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자이신 당신의 소명이요,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이사 40,11)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음성,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에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처럼 ‘먼저’ 찾아 나서고, ‘먼저’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끌어안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보다 우리 자신의 뜻과 기쁨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제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어떨 때 기뻐하는가?
나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뻐하는가?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버지의 뜻”
(마태 18,14)
주님!
당신 기쁨이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제 사랑의 소중함보다 당신 사랑의 소중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당신 뜻’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작은이라도>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제가 참으로 생각을 많이 한 복음이고, 강의 때도 수없이 얘기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주목하지 않은 말이 오늘 눈에 들어왔는데, 다름 아닌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는 말입니다.
작은이라!
잃어버렸다!
그것도 하나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말들을 조각조각 내뱉었는데, 그것을 모아 보니 작은이이고 하나이기에 잃어버리는 거라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실 크면 잘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잃었을지라도 쉽게 찾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하는 것이 오늘 얘기 중에 앞에서는 '길 잃은 양'이었는데 뒤에서는 '잃은 양'이 되는 점입니다.
그런데 '길 잃은 양'과 '잃은 양'은 주어가 다릅니다.
귀책 사유, 곧 책임이 다르다는 얘깁니다.
'길 잃은 양'은 양이 주어이고 양이 길을 잃은 겁니다.
이에 비해 '잃은 양'은 목자나 공동체가 양을 잃은 거지요.
우리는 목표를 잃고 방황할 때 길을 잃었다고 하고,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고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가정의 경우에는 부모가, 수도회의 경우에는 공동체가 목표와 방향을 제시했음에도 그것은 싫다고,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뛰쳐나가서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경우 더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 책임이고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책임을 냉정하게 개인에게 돌리고 공동체는 책임에서 쏙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는 분명 인간적으로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고, 신앙적으로도 공동체가 함께 주님께 가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지요.
이런 공동체에서는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나 목소리가 큰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나 어른이어도 어린이처럼 미성숙한 사람은 이 공동체에서 소외 또는 도태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이란 공동체 안에서 소리가 작은 사람, 비중이 작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소리를 내어도 그 소리가 공동체에 들리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도 작아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전에 제가 관구 봉사자를 할 때 한 형제가 수도원을 떠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제가 왜 떠나려고 하느냐, 어떻게 해주면 되겠냐고 하니, 이제 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이미 늦었다고, 이미 마음이 떠나서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나가려고 하니까 왜 떠나느냐,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 하는데, 평소에 자기 소리를 한 사람이라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자기를 존중해주었다면 이렇게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이런 경우 개인이 떠난 것이지만 실은 공동체가 한 형제를 품지 못해 떠나게 한 것이고 잃은 것이며, 그 이유가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무시하였기 때문이지요.
말썽이나 소란을 피워야지만 소리가 들리는 공동체, 애들은 가라거나 애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공동체는 잠재적으로 길 잃은 양과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나가 소중하다>
한 생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만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분에 넘치도록 좋은 사람도 있지만, 기대와는 다른 사람,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골치덩이를 만나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크고 넓지 않고서는 홧병이 나기도 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 보면,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사실 지금 완벽한 사람도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얼마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못된 사람도 결코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고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잃은 것이 자신의 부주의 탓이든, 경솔함의 탓이든, 아니면 남의 탓이든 상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골치덩이든, 그 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하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길을 잃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지 않습니까?
골치덩이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바로 나일 수 있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골치덩이는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서로를 소중히 인정해 주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때론 내가 바로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양은 목자에게 의존하는 특성을 지녔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목자인 주님께 온전히 의존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지 못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양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버려 둔 채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것과는 달리 마태오 복음은 매우 교회적이고 사목적입니다.
일단 양들은 ‘산’에 둡니다.
산은 기도하는 장소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양들이 스스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면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 때를 잘 모르고 산에 있는 양들에게 집중하면 오히려 양들을 잃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저도 본당에 와서 일단 양의 우리를 손보고 양들이 빠져나가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첫 번째로 보았습니다.
일단 그물코가 단단히 이어져 있어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손보는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말하면 저희 본당을 산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시스템.
이것은 공동체에 들게 만들어 그 공동체의 친교가 신자들을 잡아 놓고 성장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내실에 힘을 쏟아야 할까요?
언제 잃은 양을 찾으러 나가야 할까요?
이것이 고민입니다.
만약 너무 이른 타이밍에 양들을 찾아 나서면 지금 있는 양들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너무 늦은 타이밍까지 내실만 기하려다 보면 쓸데없는 간섭을 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 타이밍을 아는 것이 지혜인 것 같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서 엄마가 아이를 믿지 못하여 cctv로 감시까지 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간섭에 ‘새’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엄마에게 자신은 필요 없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데 간섭하니 잘한 것도 엄마의 공로가 됩니다.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간섭에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합니다.
엄마는 그것이 걱정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자녀에게 시선을 돌려서 자녀를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믿어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간섭하는 만큼 아이의 자존감은 추락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정은표 씨 가족은 아이들을 방임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훨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성장합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 하셨을 때부터 그래도 나의 인생에 책임을 지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가고 크게 엇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마 성당에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란 사제의 간섭 없이도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신자들일 것입니다.
만약 대부분이 단체에 가입해서 그 안에서 성장하고 기도하며 봉헌 생활과 성체를 영하는 정도가 된다면 그때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야 할 때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한 단체에 가입하고 감사일기를 쓰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신자 대부분이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을 때 저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갈 것입니다.
사제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신자들의 자존감은 배가합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고, 자신들이 잃어버린 양처럼 사제가 목숨을 바칠 정도로 귀중한 존재임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우리 안에서 스스로 성장합니다.
이 때를 알지 못하면 큰일입니다.
어느 때부터는 무관심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무관심할 때도 자녀들은 자라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곳이 양 떼를 풀어놓는 산입니다.
그 산에는 데려다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양들이 산에 있어도 내가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산에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산에서 스스로 성장해본 적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스스로 성장할 수 있음을 압니다.
목자는 그래서 언제 양들을 산에 놓아주어야 하는지 압니다.
정은표 씨 부부는 스스로 성장할 줄 알았던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만 해주면 자녀들이 스스로 성장하는지 압니다.
저는 하.사.시.와 성체조배였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진리를 찾으려 하고 은총을 찾으려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오게 만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의인은 목자가 없어도 스스로 산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입니다.
그러한 공동체에 속할 줄 아는 자이고, 은총과 진리로 목자가 없어도 스스로 성장할 능력을 지닌 자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형성되면 이제 목자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때 양들을 신경 쓴다면 양들은 더 피폐해집니다.
신애라 씨는 딸 둘을 입양했습니다.
그리고 그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해주었습니다.
아이들도 그것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차인표, 신애라 씨 부부가 이 정도면 아이들이 자기들 스스로 클 수 있음을 알았기에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것은 친자녀가 너무나 잘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입양한 딸들이 입양되지 못한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하자 수많은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어주기로 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녀를 잘 키우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할수록 친자녀는 부모가 믿어줌을 알아 더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목자의 도움 없이도 잘 자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목자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언제까지 함께 있어 주어야 하는 줄 알고, 그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 줄 알며, 또 언제 그들을 떠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당신 자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우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갑작스레 기온이 급강하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스산한 저녁, 야외 식당 화목난로에 소나무 장작을 잔뜩 넣어 불을 지폈습니다.
혼자 있기 뭐해서 평소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강아지 두 녀석을 한번 화해시켜보려고 난로 옆에 데리고 앉아 기도 중입니다.
첩첩산중 시골에서 시골 영감으로 지내고 있자니 얼마나 힘들고 답답하냐고 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따지고 보니 소소한 기쁨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어디 있든지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어디에서든 여기가 꽃자리려니 하고 감사하며 지내다 보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잠깐 바깥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세상에! 셀 수도 없이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합니다.
몇천 년, 몇만 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전부터 저렇게 저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별들을 보니, 인간 만사 참으로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업습니다.
대림 시기 이사야 예언자는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묵상 주제를 던져주고 있는데, 오늘 독서 말씀은 더욱 각별하고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영원할 것 같은 우리 인간의 권세와 힘, 건강과 젊음, 힘과 에너지는 사실상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한 송이 꽃과도 같음을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가 난다긴다하면서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있고, 틈만 나면 내가 누군 줄 알아? 하고 떵떵거리지만, 돌아서서는 눈물 흘리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이사야 예언자의 외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을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이사야 예언서 40장 6~8절)
대림 시기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신 은혜로운 대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감사하고 묵상하는 가슴 설렘의 순간입니다.
이 시기 동안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우리, 티끌이요 먼지인 우리들의 본래 모습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게 크신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시고, 이 땅 위에 살게 하시며, 사랑스런 인연과 더불어 살게 하신 하느님께 백번 천번 감사드려야겠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우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분의 축복이 아니었으면, 한순간 솟아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한 줄기 연기요, 안개였을 우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되찾은 양의 비유>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인류는 잃은 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잃은 양’을 되찾으려고 오신 메시아입니다.
‘모든 사람’이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는 것은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되찾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과 에덴동산을 되찾는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혹시라도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셨으니, 그냥 하느님께서 다시 불러들이면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말에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책임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질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로마 5,12)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로마 5,17)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그들 자신들이 죄를 지어서, 그래서 그곳에서 살 자격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은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로 한 일이니까 그들 스스로 ‘쫓겨나는 것을 선택한 것’이라고, 즉 그들 스스로 떠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그 자격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이고, 사람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그 사명을 ‘되찾은 양의 비유’로 표현하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요한 4,9-10)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셨지만, 다시 돌아가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표현을 조금 바꾸면,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에덴동산을 떠났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그 부르심을 사람들에게 알려준 일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떠났으니 되돌아가려면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는 ‘구원 선포’이면서 동시에 ‘회개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 6,39-40)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다시 돌아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고,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랑과 뜻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뜻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부해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다시 정리하면, ‘되찾은 양의 비유’에 나오는 ‘잃은 양’은 ‘모든 사람’입니다.
바로 ‘나’입니다.
우리는 ‘잃은 양’을 ‘그들’이나 ‘그’ 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잃은 양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고, 나를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되찾은 양’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금방 ‘되찾은 양’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냉담하던 생활에서 돌아서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했다고 해서 ‘되찾은 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모든 신앙생활’은 ‘잃은 양’에서 ‘되찾은 양’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인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 비로소 ‘되찾은 양’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14절의 ‘작은 이들’이라는 말도 ‘모든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는 “공동체 구성원들 가운데에서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 하나라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입니다.
우리는 14절의 말씀을 하느님께서는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나 ‘우리’ 라는 표현을 쓸 때, 가장 먼저 ‘나 자신’이 첫 번째 대상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하고, ‘내가 먼저’ 구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착한 목자 영성 - 하느님 닮기>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의 궁극의 목표는 하느님을 닮아 참나의 실현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아감으로 참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이 그 전형적 모범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착한 목자 영성-하느님 닮기-’로 정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바로 이런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예수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위로의 하느님입니다.
위로의 책이라는 제2이사야서는 “위로하여라”로 시작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사 40,1)
고린토 2서에서 주님은 바오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
(2코린 1,3-5)
위로의 하느님입니다.
궁극의 위로는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고나 조언보다는 위로나 격려이겠습니다.
어제 절식을 중단한 저에게 도반 형제의 따뜻한 위로도 잊지 못합니다.
말한마디 천량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몸에 안맞는 단식하느라고 생고생만 하셨네요.
예, 쉬시고 내일부터 영양식사로 기운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정의의 하느님입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평화롭고 차별없는 공정한 사회를 이루라고 우리 모두를 격려하십니다.
다음 말씀은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상징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이사 40,3-5)
얼마나 고무적인 격려인지요.
대림시기 주어진 과제가 이처럼 “정의의 사람”입니다.
셋째, 연민의 하느님입니다.
언젠가 사라져갈 불쌍하고 측은하고 가엾은, 짧고도 슬픈 인생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지닌 “연민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시편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 버리나이다.”
(시편 90,10)
어제 수원에 사는 어느 모르는 자매님의 부탁도 참 안타까웠습니다.
“친척 오빠의 갑작스러운 비보 소식에 미사 신청합니다.
원인은 심근경색입니다.
56세로 비신자이며 외아들이고 정말 착한 오빠입니다.”
다음 이사야서의 말씀에서 연상되는 바 연민입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이사 40,6-8)
풀같이 덧없는 인생임을 생각하노라면 저절로 겸허해지고 동료 인간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지닐 것입니다.
60대 부부가 불쌍해서 살고 70대 부부가 고마워서 산다는 것도 이런 연민의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풀같은 우리 존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인 파스카 예수님과의 일치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무의미,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넷째,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되찾은 양의 비유가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주님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기어히 찾아나서는 하느님입니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길이신 예수님을 잃었다는 것이니 이보다 큰 재앙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 살다보면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할 때가 있을 때마다 우리를 찾아나선 주님을 생각할 때 정신이 번쩍 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이 참 단호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기뻐한다.”
(마태 18,13)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어 주님은 모두에 대한, 특히 작은 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 18,14)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정통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심전심'이 아니라 '하심예심'입니다.
하느님 마음이 예수님 마음입니다.
교회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지도자들 특히 대통령은 이런 사랑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후반부 이사야서 말씀도 착한목자 하느님의 사랑이 잘 드러납니다.
역시 하느님의 기쁨은 길잃은 양 하나도 없는 일치와 평화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이사 40,11)
참으로 기쁨 가득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대림시기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사랑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이런 임마누엘 사랑의 파스카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뿐이 없습니다.
착한목자 영성은 비단 공동체 지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착한목자 하느님을 닮아갈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유의 참나의 실현이며 이것이 참행복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아 위로의 사람, 정의의 사람, 연민의 사랑,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평생 깨어 분투의 노력을 다하고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중 입당송, 제1독서, 화답송, 복음 환호송에는 "오신다"는 말씀이 반복되어 선명히 언급됩니다.
우리를 향해 기쁘게 서두르시는 주님의 경쾌한 발걸음이 그려지고 있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복음에서는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길 잃은 양"
(마태 18,12)
그동안은 이 복음 내용의 주제를 '목자의 기쁨'에 집중해 묵상했는데 오늘은 길 잃은 양이 더 눈에 밟힙니다.
양들은 목자의 뒤를 따라 양치기 개들의 호위를 받으며 목초지로 이동합니다.
아무래도 양의 수가 많다보면 이탈하는 양도 생기게 마련이지요.
제 고집에서건 어리석음 때문이건 아니면 속도를 못 쫓아가는 약함 때문이건 낙오된 양은 두려움에 휩싸일 겁니다.
황량하고 물 없는 광야, 굶주린 맹수들, 어둠과 적막, 천재지변, 강도떼...
주인의 보호에서 벗어난 양에게 세상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다들 제 탐욕을 채우려 호시탐탐 기회만 엿볼 뿐이지요.
목자의 품에서는 소중한 가족이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기다릴 건 잡아먹히거나 다치거나 굶어죽거나 그중 하나의 결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양이 얼마나 애타게 목자를 기다리겠습니까!
방향성을 잃은 까닭에 스스로는 더 이상 목자와 양 떼를 찾을 힘이 없으니, 오직 하나 남은 희망이라면 목자가 자기를 찾아주는 것 뿐입니다.
이처럼 간절하고 절박한 양의 심정에 머무릅니다.
오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희원(希願)이 이러해야 하지요.
"그가 양을 찾게 되면 ...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마태 18,13)
고맙게도 목자는 양을(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양들의 안전을 뒤로 하고 보잘것없는 한 마리 양을(나를) 찾아 온 광야를 헤집고 다닌 것 같습니다.
목자에게 양은(나는) 무수한 재산 목록 중,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닙니다.
곁에 두고 싶어 애가 닳는 사랑이고, 행여 상하고 다칠까 간을 졸이는 자식입니다.
목자에게 그 양은(나는) 목숨을 걸어도 좋을 소중한 존재입니다.
"양을 찾게 되면"
잔뜩 긴장해 있던 양은 비로소 안도합니다.
이젠 살았습니다.
양은 목자가 자기를 찾아 주리라 신뢰했고, 그가 반드시 오리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기뻐한다."
그런데 양도 기쁘지만 목자가 더 기쁩니다.
양을 품에 안은 목자는 그 양이 자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존재에서 존재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기쁨과 양의 기쁨에 함께 머무릅니다.
두 존재의 기쁨은 하나입니다.
찾은 이와 찾아진 존재가 하나 되어 누리는 기쁨으로 두 존재 모두 위로를 받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은 당신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린 사람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주시리라."
(영성체송)
이상하지요?
의로움의 화관이라면 적어도 일생동안 정의와 공정을 실천한 이에게 수여되어야 맞는 게 아닌가 싶은데, 고작 한 일이라고는 당신이 오시길 애타게 기다린 것 밖에 없는 사람에게 주신다니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곧 믿음입니다(로마 3,28 참조).
그리고 믿는 사람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길 잃은 양이 목자가 자기를 찾아 주리라 믿고 희망하듯이, 오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애타게 기다린 이는 이미 의롭습니다.
의로운 행위 이전에 믿음으로 이미 의롭게 되었으니 오시는 주님께서 그에게 합당한 "의로움의 화관"을 씌워주시는 겁니다.
묵상을 맺으며 오늘 제1독서에 나타난 주님과 우리 관계의 표상을 선물로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이사 40,11)
주님은 이처럼 정성스럽고 극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몫은 그분의 사랑을 믿고 애타게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날 의로움의 화관은 우리의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1986년 1월 31일은 제가 군에 입대한 날입니다.
1988년 5월 4일은 27개월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날입니다.
군에 입대할 때는 한 겨울이었습니다.
군 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요령도 생겼고 말년 병장 때는 나름 지낼만 했습니다.
그러다 제대의 날이 다가왔고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무사히 전역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그날이 오면 유배가 끝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평등의 세상, 자유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아침 점호도 없고, 구보도 없고, 유격훈련도 없고, 상명하복의 계급도 없듯이, 그날이 오면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은 군대라는 공간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은 유배지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은 장소의 이동이 아닙니다.
제가 살았던 서울도, 지금 살고 있는 뉴욕도 그날이 아닙니다.
골짜기가 깊다면 서울도 뉴욕도 그날이 아닙니다.
언덕이 높다면 제대해서 복학했던 신학교도 그날이 아닙니다.
골짜기가 메워진다면, 언덕이 평평해진다면, 군대에서도, 유배지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날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분명 골짜기가 있습니다.
학력, 지역, 이념, 직업, 계층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너무 깊어서 넘어가기도 힘들고, 넘어오려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기도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듯이 우리의 삶도 짧은데, 우리는 골짜기를 메우기보다는 더 깊게 만들곤 합니다.
이런 골짜기를 메우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산과 언덕이 있습니다.
권력, 재물, 명예라는 바벨탑이 있습니다.
바벨탑은 교만, 욕심, 허영, 위선, 가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탑을 낮추어 평평하게 하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착한 목자 이야길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성공도 실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기쁨과 슬픔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유함과 가난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행운과 좌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길 잃어 방황하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려고 기다리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아는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 형제님께서 커피를 무척 좋아하셨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커피를 두 분에게 대접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님께서 커피에 손도 대지 않는 것입니다.
“커피 좋아하시잖아요? 이 커피 맛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자매님께서 “이이가 속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는데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했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순간 실수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시지 못하고 있는데 커피를 내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아마 커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셨을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이나 선입견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데,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에만 맞추는 실수를 얼마나 자주 반복하고 있습니까?
저 자신도 과거와 지금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전에는 쫄면, 짬뽕, 매운 닭발 등의 매운 음식을 너무나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수학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국어가 더 좋습니다.
저도 이렇게 많이 변하는데 남에게만 변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큰 욕심일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질 때, 상대방의 변화를 탓하는 것 자체가 큰 오류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의 격언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모든 만남이 첫 만남이다.”
이 격언처럼 모든 것을 매번 처음인 듯 대하면 후회할 일이 줄어들며, 관계가 깨지는 것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주님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해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불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도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모범을 본받아 비록 불완전해도 사랑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이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렇게 당신 백성만을 향한 사랑에 집중하시는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완전해도 포기하지 않고 완전한 사랑을 닮아가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사랑이지만 계속해서 실천해 나갈 때 좀 더 완벽한 주님 모습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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