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와 보물을 지닌 숨은 사찰 영주 흑석사 @흑석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에 지은 초암사, 비로사, 성혈사, 축서사와 더불어 5부석으로 알려진 사찰 중 하나로,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폐찰로 내려오다가 8.15광복 후 소백산 일대 소개령에 의하여 순흥 초암사에 계시던 김상호 스님에 의하여 초암사 재목을 옮겨와 중창된 것이다. 흑석사란 이름의 유래는 절 가까운 마을 이름을 흑석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마을 뒷편 산자락에 검은 빛깔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국보와 보물을 지니고 있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흑석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산 1380-1 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신라 때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조선 전기까지의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재난을 당한 뒤 사세가 급격히 기울어 겨우 명맥만 이어 왔다. 그러나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지금은 폐사되었다’라고 나와 있다. 1945년 8.15 뒤 초암상호(草庵 祥鎬)가 중건하였고, 1950년 6.25를 피하여 정암산 법천사(法泉寺)의 아미타여래좌상을 이 절로 옮겨와 봉안하였다.
(흑석사 일주문인데 편액이 없다) 흑석사는 편액이 걸린 법당으로 극락전과 대웅전뿐이지만 유물로는 국보 제282호인 목조아미타불좌상 및 복장 유물, 보물 제681호인 흑석사 석조여래좌상과 경북문화재자료 제355호로 지정된 마애삼존불이 있다. 목조아미타불좌상은 효령대군이 권선하여 세조 등 왕실에서 법천사에 봉안하였던 것으로 1458년(세조 4)에 조성되었으며,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목조 불상이다. 이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유물로는 금동사리합과 사리 등이 있다. 한편, 석조여래좌상은 9세기 통일신라 때의 것이나 발견당시는 불상과 광배, 대좌가 분리된 채 서로 떨어져 놓여 있다. 왼편 전각이 극락전이고 중앙은 대웅전이다. 대웅전 뒤 편 보호각 안에 마애삼존불이 봉안 되어 있다. 좌측으로 오르면 편액이 없는 전각(?)이 하나 있다. 안내판도 편액도 없어 용처를 알 수 없다. 작은 석실 안에 지장보살을 모셨다. 조선의 불상이라기 보다 일본식 불상 같은 느낌이 든다. 극보 제 282호 아미타불을 봉안한 극락전이다. 대웅전과 더불어 전각을 갖춘 유일한 법당이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복장유물은 일괄 국보 제2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72㎝, 머리의 높이는 21㎝이다. 흑석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호)과 삼국시대의 불상으로 보이는 마애여래상이 있어 늦어도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로 내려오다가 1945년에 중창된 사찰이다. 최근에 대웅전의 목조아마타불상의 복장(腹藏: 배)에서 복장기(腹藏記)와 불상조성권선문(佛像造成勸善文) 등의 전적(典籍) 7종 14점, 사경보(寫經褓: 경을 싼 보자기) 등 직물류 38점, 사리·유리·구슬 등 기타 5종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복장기에 의하면, 이 목조아마타불상은 1458년(세조 4)에 조성된 삼존상 가운데 본존불로서 원래 정암산(井巖山) 법천사(法泉寺)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법천사는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있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의 명봉산(鳴鳳山) 법천사 외에 대전광역시 대덕구 계족산(鷄足山), 전라남도 무안군 승달산(僧達山), 경상남도 하동군 법산(法山) 등에 법천사가 현존하거나 또는 기록에 나타나지만, 권선문에 보이는 정암산 법천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螺髮: 곱슬머리가 동그랗게 말아 올려진 모양)이며, 높은 육계(肉髻: 부처님의 정수리에 솟은 상투 모양의 모습) 위에 정상 계주(頂上髻珠: 육계 위에 있는 둥근 구슬)가 있어서 조선 초기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얼굴은 계란형의 수척한 모습이나, 단정하고 아담하며, 체구도 가늘고 긴[細長] 동그란 형태[隋形]이다. 어깨 전체를 두르고 있는[通肩] 법의(法衣)는 일정한 두께로 표현했지만, 옷의 무늬[衣文]는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왼쪽 팔꿈치 위에 있는 Ω형태의 모양과 배 위에 평행하게 표현된 옷 주름선[衣褶線]은 조선 초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조성기(造成記)와 대공덕경(大功德經)에 이 불상이 법천사의 당주(堂主)로 1458년(天順 2)에 조성된 아미타삼존불의 본존불이라는 기록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유리전시관에 보돤되어 사진촬영이 어려워 아래 3개의 아미타불상은 펌한 것이다.) 또 1457년 화남(和南)이 작성한 「백지묵서법천사아미타불삼존조성보권문 (白紙墨書法泉寺阿彌陀佛三尊造成普勸文)」과 1458년에 조성되었다는 복장기의 기록에 의하면, 성철(性哲)·성수(性修)의 화주(化主)로 태종의 후궁인 의빈(懿嬪) 권씨(權氏), 명빈(明嬪) 김씨(金氏)와 효령대군(孝寧大君) 등 왕실과 종친들의 시주, 그리고 이소세(李小世)·이화(李華) 등 275명의 시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불상을 조성하는데 화원(畵員)에 이중선(李重善)·이흥손(李興孫), 각수(刻手)에 황소봉(黃小奉), 소목(小木)에 양일봉(梁日峯) 등이 참여하여 제작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복장기는 불상 제작연도와 제작에 참여한 인물이 나열되고 있어서 불상과 더불어 조선 초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목판본인 『불설대보부모은중경합각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合刻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은 권말(卷末)에 있는 정암(定菴)의 발(跋)에 의하면, 1432년(세종 14)에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의 발원으로 『장수경』과 함께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소을진(金所乙進)과 옥매(玉梅)가 영가 천도를 위해 찍어낸 것임이 권말의 묵서지기(墨書識記)에 나타나 있다. 복장유물 가운데 『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白紙墨書佛祖三經合部)』는 최초로 한역(漢譯)한 『사십이장경』, 부처님이 마지막 설했다는 『불유교경(佛遺敎經)』, 그리고 위산 영우(潙山靈祐)의 법어[潙山警策]를 필사한 것이다. 이 가운데 『사십이장경』과 『불유교경』은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미 송·원대부터 합편 되어 불조삼경(佛祖三經)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으며, 우리나라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에 유통되어왔다.
『위산경책(潙山警策)』은 경문에 수록되어 현재까지 초심자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판본은 모두 송나라 수수(守遂)의 주(註)가 붙어 있지만, 이 사경은 원문만 필사되어 있다. 권말에 있는 원의 고승 몽산화상(蒙山和尙) 덕이(德異)의 서에 의하면, 덕이가 수수의 주가 있는 불조삼경을 구해 1286년에 정산(靜山) 혜대사(慧大師)의 시주로 휴휴암(休休庵)에서 간행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사경은 원판인 휴휴암본의 번각본(飜刻本:새로 새긴 판본)을 원본으로 하여, 주는 생략하고 원문만 필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사연대는 사경의 품격으로 보아 조선 전기로 추정된다. 이 외에 『백지금니묘법연화경』 권2의 권수에 붙이기 위한 변상도와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2·권3·권5의 사경, 그리고 조선 전기의 부적 등의 복장유물이 있다. 외부는 닷 집 문양을 덧대어서 이질감을 없앴다. 금고의 전면은 특수유리로 제작하여 외부에서 볼 수 있게 했다. 이는 한때 국보급 불상이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었기에 도난방지를 위한 감시카메라와 화재감지기를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은 1993년 11월 05일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과정이 흥미롭다. 1980년대 후반 어느 가을날 도난을 당했는데 훔친 도둑이 불상이 금불상도 아니고 복장유물 또한 낡은 천과 종이뿐이라서 그런지 불상과 복장물 모두를 절에서 좀 떨어진 논밭에 버리고 도망을 갔다. 절의 주지가 이를 발견하여 수습한 후 다시 목불의 복장으로 봉안하려다가 문화재청 관계자와 관련 학자들을 흑석사로 불러 불상과 복장유물을 살펴보니 국보급의 가치가 있어 체계적인 연구와 고증,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1993년에 이 불상과 복장유물은 국보 제282호로 일괄 지정되었다고 한다.
@복장유물로는 「아미타삼존복장기」」 등 7종, 「불상조성권선문」 『불설대보부모사중경목판본』, 『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 『금니묘법연화경권이변상도』, 『감지은니묘법연화경』3권 등으로 전적과 보자기, 번 등의 직물류, 복장용의 사리, 칠약, 오곡 등은 당시 자세한 분석과 보존처리를 위해서 대구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보관 중이라고 한다. @아미타불의 협시불로는 주로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모시는 데 흑석사는 대세지보살대신 지장보살을 모셨다. 이는 이곳이 단종과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위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극락전 앞 석조부재. 불상대좌와 석탑부재를 쌓아 놓았다. 상대석은 결실되고 중대석 하대석만 남아 있다. 흑석사 마애삼존불상(黑石寺磨崖三尊佛像)은 높이 5.7m, 너비 3m의 바위 면에 얕게 조각한 삼존불로, 중앙의 본존불을, 좌우에 삼산(三山)형태의 보관을 쓴 좌우 협시보살이 부조되어 있다. 상체는 양호한 편이나 하체는 손상이 심해 불분명하다. 삼존의 광배와 입술 부분에는 채색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이 마애삼존의 광배와 본존의 얼굴 등은 붉은색으로 처리해 마애불의 채색 유행을 규명할 중요한 단서를 가진 문화재다. 마애불의 조성연대는 신라말 고려초로 추정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높이 3.1m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머리에 육계가 크다. 이목구비는 도식적으로 표현했는데, 코가 작고 입술도 간략하게 새겼다. 귀는 어깨까지 닿아있고 목이 없어서 머리가 어깨 위에 얹힌 것처럼 움츠려 보인다. 수인과 법의 등은 확인하기 힘들다. 본존에 비교해 낮게 새긴 좌우 협시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썼고 본존불과 같은 원형 두광만을 둘렀다. 흑석사 마애삼존불은 현재 경북문화재자료 제3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주 흑석사 석조여래좌상(榮州黑石寺石造如來坐像)은 통일 신라 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마애 삼존불 앞에 위치하고 있다. 보물 제6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불신(佛身) 높이는 160㎝, 어깨너비는 80㎝, 무릎 너비 90㎝이다. 절 후면의 암석에 삼존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에 시멘트로 단을 만들어 이 석조여래좌상을 안치하였다. 이 불상은 원래 부근에 매몰되었던 것을 발굴하여 모셔 놓은 것이다. 목 부분이 절단되었던 것을 다시 이었다. 그리고 코의 끝부분과 두 귀, 두 손, 무릎 부분도 파손이 심하였으나 현재는 석회로 보완하여 놓았다. 그 옆에는 역시 지하에서 발굴되었다는 대좌와 광배가 놓여 있다.
머리 모양은 나발(螺髮)로서 큼직한 육계(肉髻)가 표현되었다. 사각형의 얼굴은 적당히 살이 붙어 부드러운 윤곽과 함께 양감이 잘 나타나 있다. 가늘고 긴 눈, 높고 오뚝한 코, 듬직한 입 등이 균형 있게 배열되었다. 전체적으로는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양쪽 귀는 길게 늘어졌다. 목에는 희미하게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신체 역시 정제되고 안정감 있는 표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어딘지 약간 위축된 감이 있다. 즉 어깨가 약간 움츠러든 점이나 불상 높이보다 무릎 폭이 좁아진 점 등이 통일신라 말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쪽으로 하고 무릎 위에 놓았는데 손 위에 무엇인가를 올려놓았는데 이것이 보합이나 약호(藥壺)이라면 당연히 약사여래가 된다.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로 내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쪽으로 옷 주름이 흘러내린다.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비롯하여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31호) 등 통일신라 말에 제작된 불상들의 의문(衣文 : 옷자락 무늬)과 비슷한 특징을 보여 이 불상의 제작 시기를 짐작케 한다. 의문은 비교적 얇고 유려한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가슴에 보이는 평행한 옷주름 선이나 무릎의 옷주름이 다소 형식화되었다. 불상 옆에 따로 놓여 있는 대좌는 상대석이 없고 중대석·하대석만이 남아 있다. 중대·하대 모두 8각으로, 하대석에는 각 면에 안상(眼象)이 1구씩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는 복판(複瓣: 겹잎)의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중대에는 무슨 조각이 있었던 것 같으나 손상이 심하여 분별하기 힘들다.
광배는 현재 두 조각이 남아 있는데, 원형은 주형 광배(舟形光背)였던 듯하다. 두광과 신광을 2조(條)의 음각선으로 구분하였다. 두광에는 연꽃무늬와 비운문(飛雲文), 신광에는 비운문만이 조각되었다. 그리고 가장자리를 불꽃무늬로 둘렀다.
이 광배와 대좌는 모두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그 형태가 통일신라 말에 널리 유행하던 대좌·광배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점이나 조각 수법이 우수한 점 등으로 보아 불상과 같은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양감 있는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지만, 어깨가 움츠러들었고 무릎 폭이 좁아 보이는 등 통일신라 후기 때 작품으로 보인다. 통견의 얇은 옷은 자연스러운 옷 주름을 형성하며 두 발 앞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흘러내렸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구분해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를 표현했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9세기의 석불좌상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마애삼존뒤 편 숲속에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법륜을 든 석조여래상과 좌우에 신장(위태천)과 산신을 조성해 놓았다. 대웅전이다. 보수 중이라 법당안을 보지 못했다. 범종각인가 보다. 대웅전 오르는 계단 좌우에 설치된 사자상. 마모가 심하다. 조성연대는 알 수 없다. 대웅전 오르는 석담을 보니 옛적에는 제법 규묘가 큰 사찰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공양간인가 보다. 옛 시골집 같은 풍경을 느끼게 한다. 우측 숲에는 작은 연못도 있고, 주변에 여러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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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네를 가벼이 여기지 않노니,
당신들은 도를 행하여 모두 마땅히
부처님을 지을 것이오.」
묘법연화경 제 이십 상불경보살품
나무 석가모니 비로자나 부처님 ()
나모 삳다르마 뿐다리까 수뜨람 ()
나무 본화지용 무변아승지 보살마하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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