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제1독서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6,19-23
형제 여러분,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령의 불은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불’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있다면 세 사람이 두 사람과 갈라지고 두 사람이 세 사람과 갈라지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불’은 성령님이고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실 때 내려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혼자 서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체제와 맞서는 새로운 체제를 갇춘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란 뜻입니다.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는 사막의 교부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창시자로 기억됩니다. 많은 은수자와 수도자들이 있었지만, 그가 수도회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이유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실현할 수도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젊은 안토니오는 약 251년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일찍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어느 날 성당에 들어갔을 때 부자 청년의 복음이 낭독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당신을 따르려거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듣고는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친척들과 문제가 없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다 팔고 사막으로 들어갔고 20여 년을 수련한 후에 거기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교 은둔 수도회의 초창기 형태가 형성된 것입니다.
안토니오에게 떨어졌던 것은 성령의 불입니다. 이는 혼자만 타라는 말이 아니라 많은 이들과 함께 불타도록 만들라는 명령과 같았습니다. 불은 붙어 있는 것들을 함께 태우는 본성이 있습니다.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혼자만 타게 만드는 불은 없는 것입니다.
동방의 수도회 시초가 성 안토니오라면 서방은 성 베네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은 연대상으로 2백 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청년 때 로마에서 교육받다 도시의 부도덕한 생활에 실망하여 수비아코라는 곳의 바위 동굴에서 약 3년 동안 은둔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전파하기 위해 수도회를 창설하고 “일하고 기도하라”라는 깨달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체제는 진실보다 강합니다. 공동체는 진리보다 강합니다. 전에도 설명했듯이 바보 마을에서 해시계는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진리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의 공동체에게 합당합니다. 성령은 진리이십니다. 성령의 불이 붙으면 그 불을 유지하기 위해 그 진리에 합당한 체계가 필요합니다. 체제를 변혁시키지 않고서는 성령의 감도가 숨을 쉴 수 없고 실현될 수 없습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H. pylori)라는 박테리아가 소화성 궤양과 위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발견은 의학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발견 중 하나였습니다. 이 발견은 궤양이 주로 스트레스, 매운 음식 또는 과도한 위산에 의해 발생한다는 오랜 믿음에 도전했습니다. 이 발견을 한 호주의 두 과학자인 배리 마샬과 로빈 워렌 박사는 수년 동안 의료계에서 거부당해왔습니다.
이에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마샬 박사는 헬리코박터균 배양액을 마셨습니다. 며칠 내에 그는 위염이 발생하여 박테리아가 위염을 유발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 자체 실험은 위험했지만, 가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했습니다. 그렇다고 경직화된 의학계가 바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연구하는 집단을 세우고 끊임없는 반복 실험과 결과를 제공하자 어쩔 수 없이 의학계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노력이 10년 뒤에 결실을 거둬 둘은 노벨 의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가난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수도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쫓겨났고 교회에서도 쫓겨났습니다. 나중에야 교황이 회개하여 탁발수도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자신만 타는 게 아니라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이전의 공동체와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혼자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쇄신을 일으킬 생각을 해야 성령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나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성령을 어떻게 나의 공동체에 시스템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성령을 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생각하지 말고 다음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해 보십시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천재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곡가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자는?’ 저의 경우 이에 대한 대답으로 모나리자, 아인슈타인, 모차르트, 빌 게이츠를 말했습니다.
이렇게 생각 없이 답변하면 ‘뻔’한 결과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질문이든 처음에 나오는 자동적으로 나오는 대답은 썩 재미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대답이나 의미 있는 대답은 즉각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의식적이고 신중하게 그리고 천천히 나오는 생각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느린 사고를 해야 합니다.
주님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결코 즉흥적이지 않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자동으로 나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철저히 느린 사고를 해야 합니다. 즉,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너무 섣부르게 생각합니다. 이 섣부름이 예수님을 자기와 상관없는 분으로 만들고, 예수님이 없어도 된다는 잘못된 판단으로 넘어가곤 합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일이 주어지면,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천천히 떠올리려 하기보다 ‘나를 미워하신다, 불공평하신 하느님이다.’ 등의 불평불만이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나왔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그리고 이어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는 말씀도 하시지요.
아무런 생각 없이 이 말만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예수님은 폭군인가? 예수님은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회 부적응자인가? 등의 생각이 곧바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느린 사고를 해보면 그렇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세상의 평화가 아닙니다. 단순히 힘 앞에서 굴복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함께하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그런 평화를 추구하다 보면, 자기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과정 안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납니다.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의 불을 심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지혜와 용기를 얻습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평화보다 주님의 평화를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천천히 그리고 느린 사고를 받아들여 보십시오. 분명히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진실은 마음가짐이 바뀐다면 현실도 바뀐다는 것이다(플라톤).
사진설명: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