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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카페’ <아시아문화사연구회> 최두환 선생님의 2010년 1월 16일 <“만주”가 정말 어디에 있어야 될까?>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보고 필자가 느낀 점이 있어서 여기에 간단히 적어보고자 합니다.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년 ~ 1951년)의 아들인 닥터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년 ~ 1991년)이 지은 <닥터 홀의 조선 회상(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원작: 1978년 간행)이라는 책에서 출발한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로제타 셔우드 홀은 의료 선교사이며 교육자였는데, 미국 뉴욕시 ‘리버티’에서 출생하였고, 캐나다인과 결혼하였습니다. 로제타 셔우드 홀은 44년간 한국에서 ‘여성의료선교자’로서 지냈습니다.
최두환 선생님은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이라는 책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내지는 아시아의 서부 지역이 ‘만주’가 아니었을까?”라고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로제타 셔우드 홀의 ‘여행 경로’에 관한 다음의 내용을 검토하신 결과라고 합니다.
1. 어머니는 1910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사회의’에서 ‘조선’ 지역 대표로 임명되었다. [p. 245]
2. 우리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경유하는 육로 여행을 계획했다. 당시 사정으로 보면 참으로 과감한 행로였다. 우리가 탄 만주 철도는 노일전쟁 직전에 ‘러시아’가 완공한 것이다. ... 기차가 산맥을 통과할 때의 흥분과 스릴은 대단했다.
기차는 가파르고 꾸불꾸불한 산 옆으로 불안하게 달렸다. 창 밖을 보면 협곡이 새까맣게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자칫 잘못하면 기차가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아 매우 불안했다. [pp. 245~246]
3. 여행 이틀째 ... 그날 밤 여관에서 혼자 묵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종업원이 ... 만주식 겨울 침실을 제공해주었다. 이것은 추운 겨울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조선인들은 바닥 전체를 덥게 하지만, 만주인들은 방바닥 중에서도 침대가 될 부분만 데운다. [p. 246]
4. 우리는 ‘만주의 끝’ 시베리아 국경에 도착했다. [p. 247]
5. 시베리아의 절반쯤 갔을 무렵 나는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 어머니는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5천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르쿠츠크’에서 내렸다. 이곳은 아름다운 ‘바이칼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p. 249]
6. <키니네(quinine)>로 치료받아 다음 주에는 ‘시베리아 횡단 기차’를 다시 탈 수 있었다. [p. 249]
7. 다시 기차를 타고 긴 여행 끝에, 우리는 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p. 249]
[출처=http://cafe.daum.net/asiaculture/Dd9i/191]
필자가 생각하기에, 로제타 셔우드 홀의 일행은 ‘동쪽’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데, 최두환 선생님은 문장의 흐름으로 보아서 그 일행이 ‘서쪽’에서 출발하여 계속 ‘동쪽’으로 이동한 것 같다고 언급하셨습니다.
위에 나오는 이동 경로를 “에딘버러 → 만주 → 시베리아 끝 → 이르쿠츠크 → 모스크바”로 파악하셨습니다.
특히, ‘에딘버러’ 다음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만주’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다른 지명이 보이지 않고 ‘만주’가 먼저 나오는 까닭이 무엇일까?”라고 최두환 선생님이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내지는 아시아의 서부 지역이 ‘만주’가 아니었을까?”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런 내용을 정말로 납득할 수 있을까요?
위에 인용된, “어머니는 1910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사회의’에서 ‘조선’ 지역 대표로 임명되었다”는 문장을 잘 살펴보면, 최두환 선생님이 무엇을 혼동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최두환 선생님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를 그 일행의 ‘출발지’로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만약, 그 일행의 ‘목적지’가 ‘조선’이었다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였다고 보아도 문제는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 ‘조선’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문제됩니다.
위에 나온 여행 경로를 순서대로 잘 살펴보면, 그 일행의 ‘목적지’는 분명히 ‘모스크바’였습니다.
“긴 여행 끝에, 우리는 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는 문장에 분명히 나옵니다.
역사상으로 ‘에딘버러’와 ‘모스크바’의 위치가 크게 변동되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최두환 선생님의 주장으로는, 지금의 ‘에딘버러’와 ‘모스크바’ 사이에 ‘만주’가 있었고, 게다가 ‘시베리아 대륙 횡단 기차’까지 탈 수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당시 사정으로 보면 참으로 과감한 행로였다”는 문장의 표현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지금의 ‘에딘버러’와 ‘모스크바’ 사이에 ‘이르쿠츠크’가 있었다는 주장에 결정적 모순이 생깁니다.
‘이르쿠츠크’는 아름다운 ‘바이칼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고 문장에 분명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행의 ‘출발지’는 어디였을까요?
“우리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경유하는 육로 여행을 계획했다”는 문장에서 그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만주’가 먼저이고 그 다음은 ‘시베리아’입니다.
그 장소는 단순히 ‘경유 지역’이었습니다.
그 일행은 ‘조선’을 출발한 후에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행은 ‘동쪽’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이동한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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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자료]
<닥터 홀의 조선 회상>
셔우드 홀 저, 김동열 역, 좋은씨앗, 2003년 6월 30일
(2009년 증보판 간행)
-책 소개-
이 땅에서 태어나 이곳 사람들의 몸과 영혼을 지극히 사랑하다 이 땅에 묻힌 닥터 셔우드 홀 일가의 조선 사랑 이야기. 이 책은 닥터 홀이 이 땅에서 겪었던 수많은 사건들, 그가 주님을 사랑해 순종했던 길, 삶 속에서 늘 복음을 붙잡고 살았음을 보여주는 귀하고 복된 기록이다. 이 책을 통해 2대에 걸친 선교사 가족의 이야기는 물론 한국 선교 100여 년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저자 소개-
셔우드 홀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황해도 '해주 구세병원'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였다. '해주 구세병원'에서 원장 겸 내과의사로 일하면서 매일 수많은 결핵 환자를 진료했다. 저자는 비장한 결심과 각오로 폐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소 설립을 계획하고 해주시 황해 바다가 보이는 곳에 백여 명의 결핵 환자를 수용, 치료하였으니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요양소였다.
요양소 운영비도 마련하고 결핵의 심각성을 계몽하기 위해 1932년 남대문을 그린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한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사는 사람은 커녕 그의 의도를 이해해주는 사람조차 전혀 없어 부득이 교회나 학교를 통해 선전했다. 저자는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와 같은 외국에서도 호응이 있기를 바라면서 여러 곳이 편지와 실들을 발송했다. 일본인들의 방해가 있었지만,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이 일들을 계속해나갔다. 한국과 한민족을 위한 그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횡포를 부리던 일본인들은 결국 범죄자라는 누명을 씌워 저자를 추방하였다.
[리브로 제공]
-목차-
추천의 글1 - 사도행전의 속편
추천의 글2 - 살아계신 하나님의 발자취
추천의 글3 - 한국과 한민족을 위해 산 일생
추천의 글4 - '위대한 이'를 위하여
머리말 - 긴 세월의 이야기를 풀며
닥터 홀의 편지 - 나의 사랑, 한국
감사의 글 - 도움을 준 이들에게
프롤로그 - '보배'이야기
1 시작
2 첫인상
3 개척을 향한 모험
4 평양에서의 수난
5 에디스 마거리트
6 마음의 상처를 수습하고
7 은둔 왕국의 백인 소년 (=로제타 셔우드 홀의 아들인 닥터 셔우드 홀)
8 시베리아 - 유럽 횡단 여행
9 내일을 찾아서
10 조선을 향해
11 조선으로 돌아와서
12 오리엔테이션
13 첫해와 예순한번째 해
14 첫 아이
15 원산의 여름
16 기초 작업
17 긴급 취임
18 꿈은 이루어지고
19 최초의 요양원 - 해주 구세요양원
20 안식년 휴가
21 크리스마스 실
22 이정표
23 공수병 소동
24 반가운 사람들의 방문
25 화진포의 성
26 대행
27 전쟁의 소리
28 헌병대
29 엉터리 재판
30 조선을 떠나며
31 만세
에필로그 - 핍박 가운데 밀알로 썩어져
옮긴이의 말 - 출간 후 뒷이야기
연표
[인터파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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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홀의 조선 회상>
(이하, 일부 인용)
시베리아-유럽 횡단 여행
어머니는 1910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열린 전 세계 선교사 회의에 조선 지역의 공식 대표로 임명되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여행은 교육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내 나이 열여섯, 새로운 세계로 모험을 떠날 준비를 갖춘 때였다. 우리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경유하는 육로 여행을 계획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참으로 과감한 행로였다. 우리가 탄 만주 철도는 노일 전쟁 직전에 러시아가 완공한 것으로, 기차가 산맥을 통과할 때의 흥분과 스릴은 대단했다.
우리는 날짜에 맞춰 에딘버러에 도착했다. 큰 회의장은 세계 각국에서 온 대표들로 꽉 찼다. 회의는 선교 활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존 모트 박사가 주재했다. 그는 1897년 어머니에게 나와 동생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가 일하라고 조언해주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 개인적인 친구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기쁨이었다. 그는 일부러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를 찾아와주었다. 선교 회의는 정말로 감명 깊었고 고무적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우리는 캐나다의 몬트리올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여행의 종착지는 매사추세츠주의 마운트 허몬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생전에 원했던 대로 이곳의 마운트 허몬 학교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드와이트 무디가 창립한 이 학교는 ‘학생 자원 운동’을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마운트 허몬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아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아버지는 자주 어머니에게 “아들을 낳으면 이 학교에 보내고 싶다”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내 앞에는 학업, 그리고 적응이라는 두 과제가 놓여 있었다. 나는 내가 태어났고 성장기를 보낸 조선과 미국 생활과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어머니가 안식년 휴가를 끝내고 조선으로 귀임한 1911년, 나는 마운트 허몬에 홀로 남았다. 아마도 나는 다른 선교사의 자녀들보다 더 철저히 조선식으로 자란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온종일 병원에서 일했으므로 형제도 없는 나의 놀이 상대는 거의 조선 아이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조선 놀이를 배웠고 거의 그들처럼 행동했다. 사고 방식도 조선 사람과 다름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이곳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간섭이 별로 없는 조선의 생활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시계 없이 살고 있다. 조선에서는 서양 사람들의 긴박감과 시간 개념을 배울 수 없었다. 조선인들의 생활 철학은 서두르지 않는 태평함에 있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내 성격에도 맞는 것 같았다. 조선 사람들은 “또 내일이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마치 ‘내일은 오지 않는 것’같이 일한다. 항상 눈을 시계에서 떼지 않아야 하는 이런 생활 방식은 내게 여간 큰 어려움이 아니었다.
이 학교에는 ‘노동 시간’이라 부르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하루 2시간씩 일하고 번 돈을 수업료에 보태게 했다. 그들은 학교 농장에서 내게 여러 일을 시켰다. 또한 학구적인 면에서 이 학교는 내게 매우 고무적이었다. 나는 필수 과목의 하나로 해리슨 박사의 성경반을 수강했다. 강의는 ‘학생 자원 운동’이 탄생되었던 바로 그 교실에서 있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가 있는 존 포먼 목사의 아들도 한 반이었다. 1887년 아버지를 이 운동에 참가하게 한 사람이 바로 포먼 목사였다. 나도 아버지를 조선으로 가게 했던 ‘학생 자원 운동’에 참여했다.
마운트 허몬에서의 견습은 졸업과 함께 끝났고, 이제 나는 대학에 갈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나는 다른 도시의 종합대학에 갈 계획이었는데 윌슨 목사님의 의견을 따라 마운트 유니언 대학에 가게 되었다. 이 대학을 선택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 메리안을 여기서 만났던 것이다. 한 방을 쓰게 된 프레드 브래턴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또한 행운이었다. 문장력이 뛰어난 그는 훗날 『특출한 친구들』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썼는데 그 책에 나도 친구로 등장하고 있다.
목적이 같을 때 낯선 사람들도 쉽게 친구가 된다. 우리는 마치 상대방의 성격을 탐색하려는 듯 차분히 서로를 관찰했고, 나는 곧 그가 이상적인 동료이며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흥미 있는 사람 중의 하나임을 알았다. 함께 지낸 숱한 날 밤마다 홀은 침대에 걸터앉아 놀랍고도 신기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나는 열심히 경청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홀의 뛰어남은 학교 생활 중에 곧 드러났다. 그는 교회, 선교 단체 등 여러 모임에 나가서 조선에 대한 역사, 부모의 사업, 조선과 다른 곳에서 얻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의 강연은 인기가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호랑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이야기는 조선 사람들 사이에 전해온 민담이다. 그는 ‘학생 자원대’의 회장이기도 했다. 양심적이고 신중한 학생이었으며, 비교적 말이 적었으나 그의 의견은 언제나 존중되었다. 셔우드 홀과 한 방을 쓸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한다.
[출처=http://www.knnamu.org/bbs/board.php?bo_table=z4_3&wr_id=77&page=18&sca=%C0%CF%B9%DD&page=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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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홍필님! 최두환은 어떤 책을 읽으면 "결정적 모순"이나 저지르고, 착각이나 하는 사람 같습니다. 김홍필님은 혹시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을 직접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게 더 궁금하군요. 겨우 "최두환 선생님은 문장의 흐름으로 보아서"라는 문장으로 보아서 그렇게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의 글의 순서와 이동로의 순서를 함부로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최두환 선생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저는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의 글 순서와 이동경로 순서를 함부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최두환 선생님이 직접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을 읽어보신 후에 그 일부를 그대로 인용하신 글을 제가 읽어보고 느낀 점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을 직접 읽었는지의 여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의 ‘에딘버러’와 ‘모스크바’ 사이에 ‘이르쿠츠크’가 있었다는 최 선생님의 주장에 결정적 모순이 생깁니다. ‘이르쿠츠크’는 아름다운 ‘바이칼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고 문장에 분명히 나오기 때문입니다.
부디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위 본문에 인용된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의 글에 따르면, "(만주철도 승차) 만주 경유 → 만주의 끝(=시베리아 국경) 도착 → 시베리아 대륙 (절반쯤) 횡단 → (고열 발생) 이르쿠츠크 하차 (치료) → (다시 승차) 시베리아 대륙 횡단 → 모스크바 도착"이라는 순서의 이동 경로는 매우 분명합니다. 저는 로제타 셔우드 홀의 일행이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 부분을 꼭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이라는 책의 "시베리아-유럽 횡단 여행" 부분을 제가 확인하여 보니까, 그 당시 로제타 셔우드 홀의 일행은 (중간) 목적지인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 도착하기 위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의 종착지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마운트 허몬'이었습니다.
(위 본문에 관련 문장을 인용하여 제가 추가하였습니다.)
저는 최선생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 일행이 조선에서 출발했으면 한반도에서 출발했다는 말씀인간요?? 대조선이 한반도에만 있었을 까요?? 만주가 동북삼성이라 못박는 겁니까? 만주의 위치는 현재 내몽골자치구에 만주리, 해발만(=발해만)에 있으며, 이곳도 중간정착지 만주입니다. 그 원초적인 만주가 다름아닌 동유럽이라고 사료됩니다. 몽골이 있던곳, 징키스칸이 있었던 만주가 바로 동유럽이란 말입니다. 그 징키스칸족속은 푸른눈의 백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최선생님의 글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원초적인 만주가 "동유럽"이었다는 주장에 제가 반론을 제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 부분은 제가 공부를 하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제 글의 취지는... 최두환 선생님의 글만을 읽어보면, 그러한 모순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도 조형진 선생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시베리아의 절반쯤 갔을 무렵 나는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 어머니는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5천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르쿠츠크’에서 내렸다. 이곳은 아름다운 ‘바이칼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라는 문장에 따르면, 바이칼호의 위치를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역사상으로 ‘모스크바’의 위치는 크게 변동되지 않았다고 보이므로...
참고로, 1910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사대회"(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선교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이 전 세계 선교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함께 고려하도록 소집된 것이었고, 어느 누구도 초청된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참가한 사람들은 단지 합법적인 선교단체들이 선택하여 파견한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출처=http://www.kjfmissi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