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가 죽기 전날, 왜 황제도 급사했을까? 100년 후에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 / 2/20(금) / 쿠사노미도
[사진] 서태후와 광서제
◇ 동요하는 청조
[사진] 1900년의 자금성, 경산에서 바라본 신무문 전망 public domain
1908년의 베이징. 자금성 안쪽에서, 청조라는 거대한 제국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청일전쟁(1894~1895년)과 의화단 사건(1900년)을 겪으며 청조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 의화단 사건은 청말 민간 결사 ‘의화단’이 배외 운동을 전개해 열강 공사관을 포위한 것을 계기로, 청조와 열강 8개국 간의 무력 충돌로 발전한 사건이다.
특히 의화단 사건에서는 베이징이 열강군에 점령당하고, 1901년에 체결된 베이징 의정서에 따라 거액의 배상금과 주병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열강의 압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국가 주권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청조는 1906년에 ‘입헌 준비’를 선언하고 근대적 제도로의 전환을 시도했지만, 체제의 기반은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당시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은 서태후(자희태후)였다.
[사진] 서태후(자희태후) 말년의 진영 public domain
1852년, 함풍제(청조 제9대 황제)의 왕비로 입궁한 그녀는 1861년 함풍제가 서거한 뒤, 어린 황제이자 제10대 동치제를 보좌하는 형태로 정권 중심에 섰다.
또한 동치제 사후에는 조카에 해당하는 광서제(光緒帝 제11대)를 즉위시켜 두 대에 걸쳐 실권을 장악했다.
명목상의 황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정권은 언제나 그녀에게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황제인 광서제는 무술의 변법에 실패한 뒤, 자금성 안의 한 구석으로 옮겨져 마치 감금된 듯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무술의 변법이란 1898년 광서제가 주도한 근대화 개혁을 말한다. 교육 제도와 관제, 군제의 개혁을 급속히 추진했지만, 기존 이익을 위협받는 보수 세력이 반발하여 같은 해 9월 21일 서태후가 쿠데타(무술의 정변)를 단행해 실권을 장악했다. 개혁은 103일 만에 중단돼 ‘백일 유지신’이라고도 불린다.
광서제는 형식상 국가 원수이지만 정치적 자유는 거의 없었고 실권에서 멀리 떨어진 존재였다.
그리고 1908년 11월 14일, 그 광서제가 급사한다.
게다가 다음 날인 15일, 서태후도 사망하고 말았다.
청나라의 최고 권력자와 황제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이 비정상적인 사건은 청나라에 추가적인 충격을 주었고, 여기서부터 오랫동안 이어질 ‘사인’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 젊은 황제의 급사 미스터리
[사진] 광서제 반신상 소묘 public domain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저녁 무렵, 자금성 안에서 서거했다.
발견됐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향년 38세.
고령에 병상에 있던 서태후보다 먼저 젊은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당시 궁정에 강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앞서 언급했듯이, 광서제는 1898년 무술의 변법 이후 오랫동안 감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결핵과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공식적으로는 쇠약사로 분류된다.
하지만 후년에 전해진 증언은 온건하지 않다.
죽음 직전 격렬한 복통에 시달리며 바닥 위에서 몸을 비틀고 있었다는 회상이 남아 있다.
얼굴빛이 검게 변하고 급격히 쇠약해졌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묘사는 단순히 만성 질환의 악화라는 설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상을 준다.
게다가 가장 주목받는 것은 바로 그 ‘타이밍’이다.
다음 날인 15일에 서태후가 서거함으로써, 청조의 최고 권력자와 황제가 단 하루 차이로 연이어 사망한 셈이 된다.
이 우연은 당시부터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소문으로 변해갔다.
◇ 100년 후 과학 검증
[사진] 청태후와 광서제가 영수궁에 안치된 모습(1919년) Unaccredited Public domain
광서제의 사망으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2008년, 오랫동안 이어져 온 사인 논쟁에 결정적인 자료가 제시되었다.
중국 연구팀이 보존돼 있던 광서제의 머리카락과 뼈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 결과, 모발에서 일반 수치를 훨씬 초과하는 비소가 검출되었다. 게다가 그 농도는 만성적인 섭취가 아니라 단기간에 대량 섭취된 가능성을 나타내며, 자연사설을 크게 뒤흔드는 발견이 되었다.
비소는 당시에도 구입 가능한 독성 물질이었으며, 급성 중독 시 심한 복통, 구토, 전신 쇠약 등을 일으킨다.
후년에 전해진 ‘죽음 직전 고통받았다’는 증언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이 분석 결과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만 비소가 검출됐다는 사실과 누가 이를 투여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렇게 해서, 왜 광서제가 비소를 섭취했는지, 누군가가 은밀히 암살했는지 등 다양한 설이 떠오르게 되었다.
◇ 배후는 과연 누구일까?
[사진] 서태후(자희태후, 1835~1908년) 1902년 촬영 Public domain
우선, 의혹의 중심에 놓인 것은 서태후였다.
그가 중병에 누워 있던 1908년 가을, 만약 광서제가 살아남아 복권한다면, 무술 변법 이래의 권력 관계가 크게 재편될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의 사후에 정치적 주도권이 황제 측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선제적으로 움직였다는 추측이다.
사망 시기가 단 하루 차이였던 점도, 서태후가 이제 막 붕어 직전이 되자 급히 실행 지시를 내렸거나, 그런 명령을 사전에 내렸고 주변 사람들이 실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서태후의 단독 범행이라는 구도에만 국한되지 않는 점도 많다.
당시 신건 육군을 이끌며 부상하고 있던 원세개(袁世凱)는 무술 변법으로 광서제를 배신한 인물이다. 만약 광서제 복권한다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한 사정 때문에 원세개와 관련됐다는 설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또한, 서태후의 측근으로 오랫동안 섬겼던 환관 이련영(李蓮英)의 관여를 주장하는 회고록도 존재하며, 궁정 내부의 권력 다툼이라는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설도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어느 가설도 동기에 대한 설명은 가능하지만, 결정적인 증거에 이르지는 못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1908년 11월, 청조의 최고 권력 중심부에서 중대한 정치적 전환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광서제의 급사와 서태후의 다음 날 사망은 청조의 운명을 한 번에 결정짓는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그 무대 뒤의 전모는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참고:
『청사고』 제23권(본기) 『청사고』 제214권(효흔현황후전)
China’s reformist second-to-last emperor was murdered 他
글 / 쿠사노미도 편집부
西太后が死ぬ前日、なぜ皇帝も急死したのか?100年後に判明した衝撃事実
西太后が死ぬ前日、なぜ皇帝も急死したのか?100年後に判明した衝撃事実 / 2/20(金) / 草の実堂
西太后と光緒帝
動揺する清朝
画像 : 1900年の紫禁城、景山からの神武門の眺め public domain
1908年の北京。紫禁城の奥で、清朝という巨大な帝国は静かに揺れていた。
日清戦争(1894〜1895年)、義和団事件(1900年)を経て、清朝の国力は著しく衰えていた。
※義和団事件とは、清末の民間結社「義和団」が排外運動を展開し、列強公使館を包囲したことを発端に、清朝と列強八カ国との武力衝突へ発展した事件。
とりわけ義和団事件では、北京が列強軍に占領され、翌1901年に締結された北京議定書によって巨額の賠償金と駐兵権を認めざるを得なくなった。列強の圧力は日増しに強まり、国家主権そのものが揺らいでいたのである。
清朝は1906年に「立憲準備」を宣言し、近代的制度への転換を図ろうとしていたが、体制の基盤はすでに大きく軋んでいた。
そんな当時、頂点に立っていたのが西太后(慈禧太后)であった。
画像 : 西太后(慈禧太后)晩年の真影 public domain
1852年、咸豊帝(清朝第9代皇帝)の妃として入内した彼女は、1861年の咸豊帝の崩御後は、幼帝・同治帝(第10代)を補佐する形で政権中枢に立った。
さらに同治帝の死後は、甥にあたる光緒帝(こうしょてい 第11代)を即位させ、二代にわたり実権を掌握した。
名目上の皇帝が存在しながら、最終的な決定権は常に彼女の手にあったと言ってよいだろう。
一方、皇帝である光緒帝は、戊戌の変法(ぼじゅつのへんぽう)に失敗して以降、紫禁城内の一角に移され、幽閉同然の生活を送っていた。
※戊戌の変法とは、1898年に光緒帝が主導した近代化改革。教育制度や官制、軍制の刷新を急速に進めたが、既得権益を脅かされる保守派勢力が反発し、同年9月21日、西太后がクーデター(戊戌の政変)を断行して実権を掌握した。改革は103日で停止され「百日維新」とも呼ばれる。
光緒帝は形式上は国家元首でありながら、政治的な自由はほとんどなく実権から遠ざけられた存在であった。
そして1908年11月14日、その光緒帝が急死する。
さらに翌日の15日、なんと西太后も崩御してしまう。
清朝の最高権力者と皇帝が、相次いで世を去ったのである。
この異常な出来事は清朝にさらなる衝撃を与え、ここから長く続く「死因」をめぐる疑惑が生まれることとなる。
若き皇帝の急死の謎
画像 : 光緒帝の半身像の素描 public domain
光緒帝は1908年11月14日夕刻ごろ、紫禁城内で崩御した。
発見された時には、すでに息絶えていたとされる。享年38。
高齢で病床にあった西太后よりも先に、若き皇帝が世を去ったという事実は、当時の宮廷に強い緊張を走らせた。
先述のとおり、光緒帝は1898年の戊戌の変法以降、長く幽閉状態に置かれていた。持病として結核や心疾患を抱えていたとの記録も残っており、公的には衰弱死とされている。
しかし、後年に伝えられた証言は穏やかではない。
死の直前に激しい腹痛に苦しみ、床の上で身をよじらせていたという回想が残っているのである。
顔色が黒ずみ、急激に衰弱していったとも伝えられる。
これらの描写は、単なる慢性病の悪化という説明だけでは割り切れない印象を与える。
さらに最も注目されるのは、その「タイミング」である。
翌15日に西太后が崩御したことで、清朝の最高権力者と皇帝が、わずか1日の差で相次いで死亡したことになる。
この偶然は当時から疑念を呼び、やがて「何かが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噂へと変わっていった。
100年後の科学検証
画像 : 清太后と光緒帝が寧寿宮に安置された様子(1919年) Unaccredited Public domain
光緒帝の死からちょうど100年後の2008年、長く続いてきた死因論争に決定的な材料が提示された。
中国の研究チームが、保存されていた光緒帝の毛髪や骨などを科学的に分析したのである。
その結果、毛髪から通常値をはるかに上回るヒ素が検出された。しかも、その濃度は慢性的な摂取ではなく、短期間に大量摂取された可能性を示すものであり、自然死説を大きく揺るがす発見となった。
ヒ素は当時も入手可能な毒物であり、急性中毒では激しい腹痛、嘔吐、全身衰弱などを引き起こす。
後年に伝えられた「死の直前に苦しんだ」という証言とも符合する部分があるとして、この分析結果は大きな反響を呼んだ。
もっともヒ素が検出されたという事実と、誰がそれを投与したのかという問題は別である。
こうして、なぜ光緒帝はヒ素を摂取したのか、誰かが密かに暗殺したのではないか、といったさまざまな説が浮上することとなった。
黒幕は誰なのか?
画像 : 西太后(慈禧太后、1835~1908年)1902年撮影 Public domain
まず、疑惑の中心に置かれたのは西太后であった。
自らが重病に伏していた1908年秋、もし光緒帝が生き延びて復権すれば、戊戌変法以来の権力関係は大きく組み替えられる可能性があった。自分の死後、政治的主導権が皇帝側に戻ることを阻むため、先手を打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推測である。
死亡時期がわずか1日違いであった点も、西太后がいよいよ崩御寸前となったことで焦って実行指示した、またはそういう命令を事前に下しており周りが実行したとも考えられる。
しかし、西太后の単独犯行という構図には収まらない点も多い。
当時、新建陸軍を率いて台頭していた袁世凱(えんせいがい)は、戊戌変法で光緒帝を裏切った人物である。もし光緒帝が復権すれば、自身の立場が危うくなる可能性があった。
そうした事情から、袁世凱関与説も根強く語られてきた。
また、西太后の側近として長年仕えた宦官・李蓮英(りれんえい)の関与を唱える回想録も存在し、宮廷内部の権力抗争という観点から事件を捉える説も根強い。
いずれの仮説も動機の説明は可能であるが、決定的証拠には至っていない。確実に言えるのは、1908年11月、清朝の最高権力中枢で重大な政治的転換が起きたという事実である。
光緒帝の急死と西太后の翌日の崩御は、清朝の命運を一気に定めた転換点となった。しかし、その舞台裏の全貌は、いまなお完全には解き明かされていないのである。
参考 :
『清史稿』卷23(本紀)『清史稿』卷214(孝欽顯皇后伝)
China’s reformist second-to-last emperor was murdered 他
文 / 草の実堂編集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