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크리스마스트리 싸리나무와 개똥벌레
한여름 밤의 크리스마스트리 싸리나무와 개똥벌레 /송영욱
오늘은 음력으로 유월 그믐이다. 내가 세상에 빛을 본지 열 번째 생일이다.
“생일날은 국수를 먹으면 명이 길다.” 며 외숙모께서 저녁에 손국수를 한다. 뒷마루에서 국수를 만들기 위해 홍두깨를 외숙모가 바쁘게 민다. 밀가루 반죽을 펴 놓고 홍두깨로 밀고 또 밀면 주먹만 하던 밀가루반죽은 어느새 홑이불 크기만 해진다. 홍두깨에 말아 한 번씩 밀고 펼칠 때 마다 콩가루를 뿌리면 말린 부분 끼리 서로 붙지도 않고 국수 맛도 구수하다. 홍두깨에 돌돌 말린 국수 반죽을 꺼내서 적당한 크기로 썰으면 국수가 된다. 지금의 손칼국수와 비슷하다. 이때 처음과 끝 부분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게 쓸리며 잘게 썬다해도 삶을 때 뭉쳐버려 양끝을 엇비슷하게 잘라 낸다. 이것을 ‘국수 꼬랭이’ 라고 불렀다. 그것을 아궁이 속에 장작숯불에 올려놓으면 노릇노릇 구워진다. 그 맛도 어디에 비할 데 없다. 애호박을 참기름에 볶아 고명으로 언고 오래된 진간장에 고춧가루, 파, 마늘등을 다져 넣으면 양념장이 만들어진다. 양념장을 한 숟갈 푹 퍼 넣고 이리저리 섞어 먹으면 정말 꿀맛이라지만 나는 날콩 냄새나는 국수를 먹기 싫어한다. 국수보다는 국수 꼬랭이 맛이 훨씬 좋았다. 앞마루에 둘러앉아 국수를 먹고 나면 달이 휘영청 밝게 뜬다. 검은 하늘이 뽀얀 달과 별과 이것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와 어우러져 은빛이 찬란하다. 얕은 남쪽 하늘가로 긴 꼬리를 그으면서 떨어지는 별똥별이 오늘밤에는 유난히도 잦다.
“예전에 흉년이 들면 보릿고개에는 소나무 속껍질도 벗겨 먹고 살았다.”
“그것에 곡식을 조금 넣고 죽을 쑤면 *송쿠죽이 된다.”
“그걸로 연명하며 보릿고개를 넘기기도 했지”
“특히 여인네들은 식구들 먹이느라 굶어서 얼굴이 누렇게 부황이 들었지.”
“할아버지 부황이 뭐예요?”
“오랫동안 밥을 못 먹고 굶주리면 얼굴이 누렇게 변하고 배에 물이 차며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 병이란다.”
“부황 들어 죽어나가는 사람도 많았지.”
“오죽하면 여인들이 죽으면 주린 귀신이 나간다 했을까!”
“은하수가 이쪽 감나무에 걸리면 나락이 익는다.”
장죽 담뱃대를 물고 계시던 외할아버지가 길게 연기를 품어내며 한숨 섞인 말씀을 하신다. 달빛을 함박 먹은 이슬이 비단 치맛자락 펼치듯 시야視野를 흔들며 내린다. 뜰 밑 너른 안마당에는 싸리나무를 심었다 가을이 되면 싸리나무를 잘라 마당비를 만들어 쓴다. 그 싸리나무에 다닥다닥 개똥벌레가 붙어 꽁지에 불을 밝히고 반짝거리며 암컷을 유인한다. 나와 막내이모 그리고 마실 온 용호와 술래잡기 놀이를 한다. 개똥벌레 꽁지에서 빛나는 부분을 떼어내 내 눈에 붙인다. 내 눈은 어둠속의 악마의 눈처럼 시퍼렇게 빛나 보인다. 모두들 무섭다하지만 술래잡기 할 때면 특히 용호가 비명을 지르며 깔딱 넘어간다. 나는 용호와 싸리나무 뒤에 숨는 것이 좋았다. 둘이 싸리나무 뒤에 숨으려면 바짝 붙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용호의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앞가슴에 내 등이 닿는다. 숨소리가 커지는 것 같아 꾹 눌러 참아 본다. 그래도, 용호와 나의 숨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린다. 더군다나 싸리나무에 붙은 개똥벌레 불빛도 점점 더 밝아진다. 용호의 얼굴은 붉어지고 나는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몇 달 못 본 사이 용호는 키가 한 뼘쯤 자랐다. 붉어진 입술에서는 덜 익은 앵두 냄새가 난다. 무언지 모르지만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극성맞은 술래 막내이모에게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다. 개똥벌레가 다닥다닥 붙은 싸리나무는 한여름 밤 크리스마스트리 같다.
*송영욱의 수필선<개불알꽃에 매달린 작은 십자가>중에서